2층의 공포.

-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분석이므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딴지를 걸지 마시오. 하지만 그래도 정녕 딴지를 거신다면, 정말로 당시에게 러브러브를 날려줄 것임을 명심하시오!! ^^

2층이라는 곳.

우리에게 있어서, 2층이라는 곳이 가지는 의미.

우리가 가진 역사에서 우리의 건물들은 어느 양식에서도 2층을 찾아보는 것이 힘들다. 보통의 옛날집에서 서민들은 흙벽과 짚을 댄 초가집에서 생활했고, 권세있는 양반들도, 비로 굇돌 위이고, 평지보다 바닥을 돋아서 집을 지었을 지언정, 집이라는 생활공간에서 2층을 만날 수는 없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관공서나 도심에서 여러층의 서구식 건물이 들어섰고, 어떤 일본인 지주, 혹은 한국인 지주들은 일본식의 2층집을 지어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보통 한국인들의 생활공간에서 2층집은 실제로 낯설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평지 혹은 1층이라는 같은 층에서 살아온 가정에 “2층”이 배달된 셈이다. ‘편지는 반드시 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했던 라깡(혹은 지젝)의 말들과 다시 만나는 셈이다. (사실 이런 말 쓰는 거 싫어하는 데 왠지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재미있어서 ‘끼워넣기’!) 이러한 명제를 갖고서 출발하는 게 앞뒤가 바뀐 건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1960년이라는 한국에 <하녀>는 대중들 앞에 처음 선보였고, 10만 이상의 관객이 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흥행영화가 되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집에 ‘2층’이 배달되었다. 2층집을 짓는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중상층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가정이어야 한다. 2층이란 필연적으로 상승운동을 통해서 올라가야 한다(물리적 상승이 신분적 상승과 같은 의미). 또한 2층이란 공간은 진짜 땅에서 떨어져 있고, 가짜 땅(콘크리트 바닥)을 밟고 서 있어야 하는 곳이다(하늘과도 같은 가상의 공간, 혹시라도 옥황상제?).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 2층에 ‘하녀’가 산다(그녀 역시 천상의 여자?). 그러나 김기영 감독은 그러한 환타지를 당연하게도 그 시대의 암담함과 어두운 면과 연관지은 공포의 존재로써 바꾸어냈다. 한발짝 떨어져본다면, 하녀가 사는 2층은 외계의 다른 행성과도 같고, 하녀는 에일리언과 다름없다. 결국에 2층에 올라가면 모든 사건이 터져 나오고, 거기서 에일리언은 숙주(남자)를 통해 생존하려고 하지만, 결국 숙주가 숙주임을 포기하면서, 다시 지구라는 1층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리고 끝내 1층으로 돌아온 숙주와 에일리언은 끝내 1층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영화의 본 내용은 끝난다. 하녀에게 있어 1층은 오히려 외계인 셈일테니......



<아래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다 쓰고 올리려고 하였으나 괜히 집중해서 뭔가 쓰질 못하는 요즘의 상황때문에 일단은 위에거라도 올린다. 아래는 차차 채워나갈 기회가 있으려니...>

가족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가족적인 공간이 없는 가정.

이 영화안에 집은 크게 거실 겸 안방, 부엌, 계단, 피아노방, 하녀방, (테라스)로 구성된다. 절대 어디에도 두 아이들만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유리라는 프레임 혹은 스크린 속 스크린

뎅깡쇼트가 없는 스튜디오식 세트.

양식적 연기 - 에이젠슈테인, 마이어홀드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다. 첫째로, 우주에서 지구로 찾아든 침입자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의 자식들이 자꾸 위험에 빠지게 되고, 주인공들은 자신의 아이를 구하는 데 정신이 없다는 두 번째 지점, 마지막으로 이 침입자들이 주인공들의 영웅적 노력이 아니라, 지구라는 낯선(그들에게는 분명 낯설지..) 행성에서의 부적응(혹은 면역 부족)으로 망하게 된다는 커다란 틀들이 매우 비슷하다.

 

나는 여기서 영화들이 왜 이런 반복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영화들이 가족애를 강조하는 결말을 갖고 있다. 단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두 편이 너무나도 비슷한 구조와 성격을 갖고 있기에 집중 조명해보자는 것일 뿐!

 

내러티브를 단순화 해보자.

 

1.     전제로서의 사건 우주왕복선의 추락, 그리고 그에 묻어들어온 이상한 외계의 바이러스.

2.     주인공의 남편에게 바이러스 중독

3.     주인공의 환자 남편 역시 중독

4.     점차 커지는 위협

5.     주인공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놀러가는 전환 사건

6.     주인공이 알게 되는 주변의 사건들(바이러스의 발견, 남편의 변화)

7.     아들구하기 및 살아남기

8.     해결책의 발견

9.     그리고 대단원

 

위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러면 이것을 다시 갈등이라는 측면으로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의 가장 큰 갈등은 [외계의 바이러스 vs 지구인], 메인플롯은 지구인들이 죽도록 고생(?) 후에 살아남기쯤이 될 거다. 그리고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미분해보면,

 

1.     [주인공의 남편 vs 주인공 정신과 의사]

2.     [아이의 납치 vs 아이의 엄마 (주인공 정신과의사)]

3.     [남편으로부터 바이러스 감염 vs 잠들지 않아서 감염을 이겨야 하는 주인공]

 

식으로 다층화 한다. 가장 큰 외연에는 위에서 언급한 사회 대 사회의 갈등이 싸고 있으면서, 그 안으로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사회의 갈등 들이 다층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형태의 갈등 구조인데,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 2,3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2,3번 갈등이 이루어지고 작용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가족주의인 셈이다. 비록 남편이라는 상징적 권위가 배제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가부장(다니엘 크레이그)이 등장하면서 대치되고, 그 근원으로는 아들을 구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모성애가 가장 큰 핵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결국 이 가족이 붕괴되지 않고, 다시 안정적인 엄마,아버지,아이라는 축으로 가족을 이루면서 이 영화의 질서는 모두 회복한다. 아이의 뇌염 면역은 주인공에 의해서 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대 사회적 갈등인 지구인의 살아남기에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은연중에 가족이라는 집단으로 회기함으로써 우리가 살아남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또 하나의 보수반동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키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이렇게 강한 선언을 하는 것은 나의 쓸데없는 버릇이라고 생각하고!!!! 갖다 버리라고 하셔도 상관없고!!!

어찌되었거나, 이 영화가 끌고 가는 주인공 니콜 키드만의 가장 큰 갈등은 아들 올리버를 지키고 싶다는 지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바깥의 갈등과 무관하다. 혹시라도 올리버가 수두를 앓고, 뇌염에 관한 면역이 없었다면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긴 개연성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러한 내러티브적인 개연성보다도 아버지를 새롭게 대치하는 다니엘 크레이그는 결국엔 대안이 아닌 대치일 뿐이라는 지점에서 결국 활성화 에너지가 모자라서 다시 메타 스테이블한 상태로 내려앉은 영화의 운명 및 결론이 슬퍼보일 뿐이다.

 

한편, <우주전쟁>의 경우, 딸은 구하려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이 눈부시다. (희한하게도 니콜 키드만은 아들을 구하고, 탐 크루즈는 딸을 구하는데 거의 목숨을 다 바치면서 뛰어다닌다. 그런데도 더욱 아이러니컬한 (영화밖) 사실은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을 영위할 당시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가족이었던 두 배우가 아이도 없는 채로 찢어져서 각각 가족의 온정이 넘치는 영화를 찍었으니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신가? 거참 장난도 심하시지) 개인적으로 <우주전쟁>을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실망감을 가졌다. 실망감을 갖고서 내가 왜 실망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1차적인 답은 탐 크루즈의 이미지였다. 그는 출연한 전작들에서 꽤나 열심히 뛰어다니고 능력이 뻗는 요원이었기 때문이고, 나는 <우주전쟁>을 보면서, 탐 크루즈가 화성에서 온 트라이포드를 부수고, 외계인을 처단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영화안에서 단 한번 수류탄으로 트라이포드를 부수는 장면을 봤을 때는 정말로 영화의 남은 1/3이 우리의 영웅탐 크루즈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기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전쟁>에서 빛나는 장면은 탐 크루즈가 차를 갖고서 도망치려고 할 때이다. 굴러가는 유일한 차를 본 군중들은 그것을 뺏으려고 달려들고, 그는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한 장면은 <인베이젼>에서 (이미 변신한) 외계 지구인들이 니콜과 아들이 도망치려는 차 위로 달겨드는 장면과 겹친다. 이것은 두 영화에서 공통된 공포이고, 각각에서 괜찮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벗어나서 현대 사회를 생각해보면, 점차 가족의 단위는 축소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고, 가족간의 혈연 역시 그 끈끈함이 묽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전 지구적 위기를 가족주의를 통해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러한 영화들이 갖고 있는 성찰들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이 강조하는 퇴행적(!) 이데올로기인 가족주의를 다시 불러들어야 하는 것인가?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사실은 그렇게 얼굴에 무언가 뱉어지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외계인이다.

모두(?) 다 알다시피, <인베이젼>은 이번이 4번째로 만들어지는 영화다. 잭 피니라는 소설가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4명의 자식이 만들어진 셈. 그러나 이는 돈 시겔의 1956 <신체강탈자의 침입>, 필립 카우프만의 1978년작 <신체강탈자의 침입>, 아벨 페라라의 1993 <바디 스내쳐즈>(국내 출시명 : 바디 에일리언)에서 현재 올리버 히르비겔의 <인베이젼>까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거꾸로 보았다. 시대의 역순을 따라가면서 이번 추석 프로젝트(?)를 실행한 셈. 괜찮은 느낌의 순서를 나열해 본다면, 첫번째로 1978년 필립 카우프만 작, 2번째로 1993년 아벨 페라라 작, 1956년작과 2007년작은 비슷한 느낌이라고 혼자서 나열해본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재미와 관심에 관한 것이며, 특별한 기준에 의거해서 순위를 매긴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4작품 모두가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어설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화란 보는 자의 취향과 마음에 달린 법이니까! 딴지를 건다면 내 맘대로 !’을 날려주리라. 푸하하하..

 

여러 군데의 리뷰(최소한 네이버 검색에 의해서 나오는 홍성진의 영화해설이나 어떤 개인들의 영화평)들을 살펴보면 뻔히 나오는 말들이 바로 시대와 엮어내는 지점들이다. 이런 분석은 결국엔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라면 누구나 찾아낼 수 있으므로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다. 그런 건 내가 써도 내 것이 아니니깐. 정 궁금하면 알아서 찾아볼 것. 억지로 세로축을 사다리 삼듯 이어야 하는 부분에서만 다시 조금씩 언급하는 수준일 것임을 미리 알리는 바이다.

 

우선적으로 살필 영화는 당연히도 <인베이젼>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처음으로 뒤에서 들린 말은 완전 무서, 완전 무서. 허리가 다 아파라는 어떤 여성의 말이었다. 그 문장 속의 느낌은 몇해 전 내가 <큐브> (지금은 없어진) 동숭 씨네마텍에서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그러한 촉각과 동일한 것이었다. 생생히 기억하건데, 난 그 때 <큐브>를 보고 나오면서 허리에 굉장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허리가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뻣뻣함을 느꼈던 가장 무서운 영화였고, 그 기억을 그대로 소환하는 말이었다.

한편, 그 사람의 말은 나의 기억을 떠올렸으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나에겐 그 때 그 느낌을 고스란히 재현시키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여기저기 검색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올리버 히르비겔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올리버 히르비겔이 촬영을 완료하고, 편집한 버전에 대해서 제작자(조엘 실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감독(제임스 맥테이그)을 고용하여 많은 군중씬들을 재촬영했고, 다시 편집되었다. Imdb의 데이터로는 제임스 멕테이그는 ‘not credited’이다.

그래서 일까? 올리버 히르비겔의 편집본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랬더라면, 이전의 3편의 작품들과 비해서 어떤 평가를 들었을까? 막연히 상상해 보지만, 그것은 전혀 알 수가 없으니만약에 존재만 한다면, 제임스 본을 고용해서라도 그 편집본을 훔쳐오게끔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랬다면, 좀 더 이 시대상과 맞물려서 영화는 더욱 강한 인상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간단히 전작들을 얘기하자면, 돈 시겔의 작품은 당시의 매카시즘을 암시하는 바가 있고, 필립 카우프만의 작품은 70년 후반의 급격한 사회의 보수화를 꼬집는 면이 있다. 또 다른 리메이크작 아벨 페라라의 작품은 90년대 초 미국의 첫번째 이라크 침공과 관련한 미국사회의 보수성을 짚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샛길, 무엇보다도 아벨 페라라의 작품에서는 그 변화하는 주체로서,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군인들은 외계의 식물에 의해 변화했지만, 내 생각에는 군인들은 굳이 그렇게 변화하지 않았어도, 똑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경직성들을 잘 표현하는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폭격에 의해 부서지는 군대의 모습은 이상한 쾌감을 전해주고, 뭔가 아이러니컬함을 남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베이젼>은 충분히 앞의 작품들의 성향을 이으면서, 또 한편으로 독자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2007년 현재,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괴뢰정부를 세워놓은 상태이다. 물론 그렇게 확대 해석 하지 않더라도, 현재 미국(한국도 다름 없지만) 사회에서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을 충분히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사회는 이것을 가족주의의 온정(?)으로 치유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인베이젼>을 위시한 신체 강탈자시리즈가 갖고 있는 강점이자, 독자성은 한 문장의 대사로 대표된다.

 

“My husband is NOT my husband.”

 

익숙했던 사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감정과 표정 등이 탈색되어서 나타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위의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원래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일 뿐이고, 어떤 다른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져오는 두려움은 무엇보다도 크다. 그것은 어떤 괴수보다도 무섭고, 에일리언 보다도 무섭다. 저 대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네 편의 영화를 통틀어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 역시 그러한 ‘NOT’의 지점이다. 우리 사회안에서도 그러한 폐쇄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거꾸로 반대로 그것을 작용시키고 있다. 예전에 박노자씨는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자신이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미 귀화한 지 수 년이 지난 그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 시장의 아줌마는 박노자씨를 한국인이 NOT(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모 언론의 기사는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몇몇 출연자들의 국적인 한국임을, 다시 말해 그들이 외국인이 NOT임을 걸고 넘어지면서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다들 좀비가 되어버린다. 한국에서 외국인은 외계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 영화가 1차적으로 깔고 있는 메시지는 이렇게 억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우 굉장한 상업적 완성도로 잘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시지 따위를 지우려고 편집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히르비겔 감독의 편집본이 궁금하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정녕 그러한 외계인들과 같다. 획일화하는 우익집단이 판치고, 스포츠 민족주의가 판치고,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신체강탈자시리즈에서 보이는 미국의 모습과 다를 것은 크게 없을 것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볼 때 별 씁쓸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몰락>을 만든 독일 감독 올리버 히르비겔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이고, 그의 완성본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제작자 조엘 실버는 다른 감독을 데려다가 재촬영, 재편집을 통해서 완성한 새로운 영화가 가족주의라는 또 다른 우파적 생각으로 영화안의 비극 혹은 재난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그럼 어디쯤에 서야하는 걸까 의문이 생기지만, 그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78년판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 답이지 않을까? 결국엔 그 도날드 서덜랜드 처럼 되는 게 아닐까?

 

ps. 그래서 요즘 괴상한 소리과 그 제스쳐를 연습중이다. ^^ 그건 바로 이거다

OoO

궁금하면, 78년작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보시길.. 이걸 알고 나면 열라 무서울 거다.

오늘 아침 mbc에서 추석 특집쇼 프로그램으로 '가위바위보쇼'를 방영했다.
불운한 사람들의 1000만원 따기(!) 프로젝트인 이 프로그램은, 방송과 윤리 그리고 인권에 대한 총체적인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말았다.

뭐 거창하게 어려운 말을 쓰려는 게 아니다. 그럴만한 글재주도 식견도 없다.

돈 1000만원을 따기 위해서 벌이는 가위바위보쇼라는 방식이 마치 중고등학생들의 짤짤이가 커지는 판의 양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지점도 그냥 식상하다.

그러나 꼭 지켜봐야 할 것은 '차사순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TV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 나로서는, 평소에도 드라마에 열성이지도 않고, 심지어 드라마와 TV에 미쳐있는 요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삐딱이다. 그런 내가 어쩌다가 집에 돌아와서 밥을 먹을 때면, 꼬박꼬박 TV를 켤 수밖에 없다.
(이는 나중에 혼자 밥먹기와 TV와의 상관관계를 한 번쯤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언제였던가, '세상에 이런일이'류의 방송을 봤더랬다. 역시 mbc였고.. (정확한 프로그램 제목은 모른다. 고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닌데, 그런 제목따위가 기억날리 만무하지.)
이 차사순 할머니의 경이(?)로운 기록(!)에 관해서 나온 것이다. 내용인 즉슨, 500번도 넘게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있는 할머니에 대해서 나온 것이다. 전북 전주였나, 그곳의 면허시험장에 매일 출퇴근하듯, 필기시험을 보러 나오시고, 그 모든 시험을 떨어져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보러 다니시는 할머니는 사실 겉으로 봐서는 약간 모자라는 분 같았다. 가족도 없으시고, 폐지를 모아서 팔고, 국가에서 나오는 약간의 보조금을 보태서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구구절절히 보여지는 꼭지였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그 때 이 할머니의 삶과 운전면허 시험이 '세상에 이런일이'류의 프로그램에서 다뤄질 깜짝성의 내용인가 싶었다. 그 내용 역시 '세상에..'류보다는 '인간극장'같은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프로그램 제작자 조차 헷갈린 거다.

어찌되었든 그 때 그렇게 보았던 차사순 할머니가, 추석이 되어서 '불운한사람' 입장으로 '가위바위보' "배틀"에 등장했다.

할머니는 첫 등장부터, 주변 연예인들에게 부축(몸 뿐만 아니라 진행 조차)을 받으면서 가위바위보를 승승장구 해 나갔다. 분위기는 마치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있는(!) 혹은 잘 나가는(!) 연예인들이 희생 및 도와주어야 한다는 느낌이 가득한 채로.....

순간, 이것은 모두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일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추석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불운한 사람들에게 어느정도의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지 않게냐 라는 식의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렇다면 불운한 사람들은 어디서 찾냐 하다가, 차사순 할머니가 등장한 프로그램을 보았던 누군가가 추천을 해서 출연 섭외를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고, 배틀을 통과하면서 올라가는 과정이 그러한 각본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의심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내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방송 자체의 윤리보다도, 그 안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이 할머니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들의 눈을 통해, mbc의 카메라를 통해 차사순 할머니를 바라볼 시청자들의 시선에 이상한 우월감(?) 혹은 연민의 마음 등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도와주는 것이 무어 나쁘냐? 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을 보면,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이해해서 도와주는 것, 즉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이 있는가 하면, 저 사람보다 난 상대적으로 잘사는 구나라는 계급의 분리에서 나오는 연민의 마음에서 나오는 도움이 있다.
후자의 기능의 분명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그대로 기능이고 효용일 뿐, 우리 사회의 근원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우리에게는 후자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진정 필요한 것은 전자의 마음들이다.

그 프로그램 안에서 내 눈에, 마음에 가장 남았던 장면은 차사순 할머니를 전주에서부터 모시고 올라온 운전 강사였다. (아마도, 시험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일 것이다.) 오로지 그 분만이 차사순 할머니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mbc에서 전주에 계신 할머니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신경써주고, 그리고 서울행까지 도와주러 올라온 분일 것이다.
할머니의 어수룩함을 두고서 김제동이 '할머니, 이런식으로 하면 1000만원 금방 따 가실 수 있어요.'라고 말을 하는 사이에 그 강사분은 계속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차사순 할머니에게는 가족이 아무도 안계신다. 그것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방송과, 그 과정에서 할머니의 인권은 아주 교묘하게 밟히고 있었다.

진짜 이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어떤 시선을 갖게끔 유도하는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우리들의 티셔츠에 들어와서 훌륭한(!)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는 사이에, 차사순 할머니는 스펙타클의 사회안에서 조롱되고 있다. 2007년 한국사회에 등장한 트루먼인 셈이다.


뱀발) 며칠전,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드라만인 <아현동 마님>을 보다가, 이동준이 왕희지의 마음을 얻기위해, 연극하는 장면이 나왔다. 기사를 시켜서 빵파는 할머니에게 돈을 쥐어드리고 자신이 굉장히 괜찮고, 착한 인간인 척하는 장면이었다. 드라마 상으로는 굉장히 잘 만든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하나로 이동준의 캐릭터는 다 드러나니깐.. 드라마를 벗어나서 그런 장면이 가능해지고, tv에서 보여진다는 것은 우리 역시 이동준과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어찌되었든 그 장면을 보면서, 소름이 쫙 끼쳤고, 순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나는 과연 위에 얘기한 차사순 할머니를 따라 올라온 운전강사처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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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이라는 이 블로그의 제목은 영화 <괜찮아, 울지마>에 나오는 주인공인 무하마드이고, 그의 거짓말에 관한 진실여부를 판가름하는 바이올린 가방을 가리킨다.

마치 말장난과도 같지만,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결론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그 사유의 과정을 거칠 때, 영화가 더욱 생명력을 가지고, 감독과 진정으로 이 영화를 두고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까페에서 이 영화를 두고, 어제 세미나가 이루어졌고, 민병훈감독 역시 참석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뵙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한 번쯤 뵙고 싶어하던 차에 기회가 잘 닿았다. 그리고 세미나의 발제자의 발제문에서도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은 바이올린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그 발제문을 듣고, 이야기하는 와중에 민병훈 감독의 의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은 비단 이 바이올린 가방만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정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의 가장 전면에 세워져 있는 껍데기이며, 그는 모스크바에서 내려올 때부터, 고이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가방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떠날 때 역시 가방을 잘 들고 간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하마드는 음악가로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 행동한다. 억지춘향으로 유추를 하자면, 무하마드의 원래 꿈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영화적 근거는 없지만, 인간적으로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하려던 바가 안되었을 때 하게 되지 않는가.. 신정아의 경우처럼황우석의 경우처럼..) 그렇게 전방위적 위치에 존재하는 소품이고, 무하마드라는 인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차인 바이올린 가방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비어있다거나, 바이올린이 없다거나 하는 상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하마드가 동생에게 숙제를 가져다 주러, 그리고 다시 학교를 빠진 동생을 찾으러 뒷동산의 투계장을 오르는 동안, 어머니는 무하마드의 방에 와서 그의 바이올린 가방을 열어본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이내 닫아버린다. 어머니의 표정에 커다란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감독은 세련되게(!) 바이올린 가방의 안쪽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관객들은 그것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고, 감독 역시 그 의도를 잘 유도(?)한 셈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기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만약에 그것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것들로 가득찼다면? 바이올린이 있긴 하지만, 줄이 하나도 없거나, 훼손된 상태라면? 아니면 정말로 바이올린이 들어있다면?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영화는 그 장면 이후에 다시 바이올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으며, 그 안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실제로 그 바이올린 가방이 비어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찌보면 속단이 되는 것이고, 무하마드라는 사람을 단정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마저 잠재된다. 단순한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고, 보통의 구라쟁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 하나의 진실한 순간이 있을 텐데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인물에게서 손을 놓지 않게 된다. 결국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감독의 의도가 그 가방은 비어있거나, 다른 물건으로 가득찬 무하마드=거짓말쟁이의 증거라고 하더라도, 속 내부를 안보여주거나, 보여주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의 영화적 분위기를 더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무하마드의 방에서 펼쳐지던, 엄마와 관계나 대화 상에서 보여지든, 같은 텍스트를 놓고서 하나의 지점을 얘기하는 담론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는 지점이다.

 

민병훈 감독과 다른 사람들과의 영화를 통한 이야기 중에 실제로 영화관의 배급문제까지 확산이 되어서 하는 이야기 중에 영화를 만드는 자들이 해야할 역할인 좋은 영화를 만들고 그것이 관객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른바 예술영화가 일반 관객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및 그 대책의 차원에서 구조(배급, 제작 등)적인 문제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고, 대중 혹은 관객은 틀리지 않다라는 논리를 펼치는 민감독이었고, 그에 대해서 영화과 과연 제대로 소통하고 있느냐?라는 부분에서 만드는 자들의 지적 허영심 혹은 우월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던 나였다. 그러한 논점을 <괜찮아, 울지마>라는 텍스트 안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본 지점이고, 감독은 이 지점에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연출력의 깊이에 관한 쪽에서 내 스스로도 앞으로 더 깊어져야 한다며 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분명 전방위적으로 영화를 생산하는 생산자이다. 감독들이 의자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연출이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 역시 동의하고, 그것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지난 5월 미로스페이스에서 잠시 얼굴만 보고, 그전에는 2005년 어느 여름날 밤 홍대역 주변을 지나던 그와 마주쳤고, 그전에 서강대 다닐 적에 수업시간에 만났던 선생으로서 민병훈 감독은 내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년만에 마주한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격려를 해주었다. ‘영화를 만들어라그것이 영화쟁이가 해야할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곁에 앉은 다른 친구가 자신의 첫 단편이라며 건네주는 DVD를 매우 공손하고 고맙게 받으면서, 잘 보겠다는 약속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매우 매력적이다.

조만간 또 다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그 동안에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