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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6년째 연애중'인 다진(김하늘)과 재영(윤계상)의 연애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제목이 아니다.

이 영화는 간단히 말해 '연애'에 관한 '메타담론'으로 이루어진다.

그 메타적인 제목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이 글의 "제목"이다.

물론 특수성이 언제나 작용한다고 선언(!)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의 연애라는 것이 기실 요즘의 88만원 세대에게 가깝거나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Film2.0의 인터뷰에도 나오듯, 박현진 감독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 속하기 보다는 그 앞전의 X세대 혹은 Y(또는 N일수도) 세대에 더 가까운 감성을 지닌 사람일 거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 인식에 관한 출발점이 살짝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바라봐져야 한다.

좋다.

그렇다면 (살아가야할) 현실과는 다르게 (사랑에 관한) 현실만을 놓고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전적으로 그들의 6년이라는 시간의 연애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영화적으로 의미 있는가 또는 정말로 그들의 마음이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떤 관객이 나의 딴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싸울 생각도 없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스스로가 공감한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사람들은 각자가 수용의 폭도, 방향도, 성격도 다른 법이다.

1. 6년이라는 시간의 퇴적? 그리고 공감?

6년의 연애를 하는 사람은 전체의 표본에서 본다면 많지는 않을 것이다.(21세기이지 않은가? 엉덩이와 거시기 먼저 부비다가 자고, 그걸로 연애 시작하는 사람도 많고, 그것이 며칠 맞지 않으면 헤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사실 연애란, 하는 당사자들의 정치적 보수성 혹은 진보성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1차적으로 6년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나를 포함한 당신이 6년 동안 연애를 했다고 상상해보자. 지금 그 연애가 진행중이라면, 그 연애는 다분히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시작되어서 진행중인 셈이다. 간단하게 연애는 남녀간 감정교류를 통한 '교집합'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고1 수학시간에 집합론을 배우게 되므로 크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라 판단한다. 누구라도 정석의 초반부 집합론을 열심히 안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있다면 중학생쯤?

집합의 영역의 속성으로 따졌을 때, 교집합과 여집합, 그리고 합집합이 존재한다. 결국 집합 '다진'과 집합 '재영'은 처음에는 공집합이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접점을 만들었을 거다.(갑자기 도형의 방정식) 그리고 그것들은 중심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공유하는 영역, 즉 교집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집합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숨쉬게 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6년의 시간은 그 교집합을 서로 키우고 조절하면서 둘 사이의 중심거리를 결정하는데 쓰여졌을 거다.

그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고, 전제로 정해진 바로 옆집에서 살아가는 연인이다.

그러나 이 전제부터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각자 독립해서 살아가는 1인 가정의 사람들이고, 젊은 연인들이 연애를 오래하면서 유지하는 거리가 바로 이웃해서 사는 거라니? 물론 이 영화의 출발점이 그 곳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기획부터가 이미 부서졌을 테지만, 영화는 뻔뻔하게 그것을 설득할 수 없으니 첫 장면에서 그것을 제시하고 나중에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의 대사로 관객에게 영화를 '주입'한다. 어찌되었건 '서로의 프라이버시'는 각자의 여집합이자 차집합이 된다. 그리고 이내 각자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차집합은 결국 교집합을 건드리고 이내 다시 교집합이 공집합이 되는 상태로 돌아간다. 전제는 그렇다 치고 영화의 방향은 뻔한 셈이다.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라고 쓰며 기존 로맨틱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영화를 읽어내는 지점에서 무책임함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물렁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몇몇의 얄싹한 대사 말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이 영화로써 존재하는 것은 내겐 글쎄올시다. 억지로 두 사람의 이웃해 살기를 인정한다 치고 출발해보자. 뭐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영화를 따라가려 해도, 두 사람간의 현실에는 어떠한 6년의 시간이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것은 '내가 투명인간이냐'나 '이제 여동생같고 딸같다'라는 대사말고 무엇을 근거하는가? 단지 외식보다 집에서 밥해먹는거, 가끔은 자기집이 아니라 편하게 애인집에 들이닥치는 거, 회식에서 술먹고 불러내서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6년'이라는 시간의 대의성을 갖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이지 않은가? 두 사람이 6년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혹은 겪어보았을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이 영화의 6년짜리 교집합은 불량품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영화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나 하면서 생각해본다. 얼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똑같은 시간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의 감정과 거리감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보여지는가를 말하려는 거다.) 그 영화에서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는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강릉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것에 대한 묘사 중에 은수는 신문지를 깔고 발톱을 깍고, 상우는 티비를 보고 있다가 라면을 끓여먹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간의 심리적 가까움과 편안함이다. 만약에 6년의 시간이 더해진다면, 그 깎은 발톱을 상대의 얼굴에 들이대는 장난도 하지 않을까? 그러한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보여주고, 그것이 다시 6년째 연애중이라는 특수성의 대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6년째 연애중>에는 그러한 시간의 퇴적에서 오는 두 사람의 감정 상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위에 슬몃 얘기한 것은 컨셉에 맞게 상상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사실 정말 보편적이지 않은 주거형태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6년이라는 시간을 연애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6개월 전에 곁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나란히 살게 된 두 사람이 가진 과거와 그들의 이야기는 좀 더 날카롭게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는 정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1년만 연애해도 다 겪게 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6년쯤 연애를 하면, 상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익숙함이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철학도 바뀌는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것을 반영하기는 커녕, 90년의 감수성과 그 상식으로 90년대적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연인을 그려낼 뿐이다. 그러면서 21세기의 관객에게 공감하고 이해받기를 강요한다. 이 쯤되면 좀 뻔뻔한 거 아닌가?

2. 연애의 진보성? 보수성? 설득되지 않는 21세기적 봉합!

수많은 커플들이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있다. 왜냐고? 배우자 혹은 연인의 바람끼 때문이다. 보통 바람이란 걸리기 전에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걸리지 않는 바람이란 너무너무 적어서 정녕 걸리지 않고 바람피우는 사람은 거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21세기에 들어서 연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또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진과 재영은 모두 다 바람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보수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에 관한 문제도 캐릭터에 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다진도, 재영도 굉장히 밋밋한 캐릭터들이다.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특이점을 보이기 보다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 즉 외연에서 비롯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수준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물들에게 어떤 강력한 행동력을 기대하는 것도 분명 무리수다. 강철중도 아닌데...

그래서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물들의 욕망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작은 욕망들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인물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돈에 대해서 강한 동인도 없고, 각자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들을 적극 수용한다거나, 하룻밤에 충실한 리비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연인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지도 않는다. 아... 그렇다면 그들의 옅디 옅은 감정의 굴곡을 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작은 지점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그것들은 위에 얘기했다시피 피상적으로 넘어간다.

연애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냐 아니냐, 또는 일부일처주의자나 아니냐를 놓고서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라고 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느 정도 비약이 있을테니. 하지만, 분명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렇다면 캐릭터들의 행동들에서 얘기하는 진보성, 보수성이 아니라 감독이 연애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냥 애매모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영화의 결말부분에 가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클라이막스에 가면 그들은 분명 헤어진 것이다. 6년째 연애중이라는 제목에서 예견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 말의 이면을 들고서 구성한 클라이막스다. 결국 재영은 다진의 언어(빠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재영은 여전히 뻔한 이야기(랑그)를 반복한다. 끝내 다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영역을 돌아보는 것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연애 영화의 전형성이고, 보수적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다시 에필로그에 가서 더욱 어이없어진다. 각자 이웃해 살던 집을 정리하고 다시금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이는 정녕 아이러니다. 영화는, 감독은 이것을 필연 혹은 숙명적이라고 표현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녕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랑그를 앞세워서 얘기한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 헤어져야 한다. 결국 소통되지 않고서 각자 발걸음을 바꾸어서 간다. 걸어가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도착하는 문자메시지!!(이것도 정녕 편지인가? 제 때 도착하는 편지!!) 그리고 그 안에는 둘이 행복했던 시절에 주고 받았던 이야기와 둘이 못내 그리고 싶어했던 곱게 늙은 커플의 사진이 담겨있다. (아 얼마나 21세기적이고, 새로운 기술의 위력인가!!) 이것 한 방으로 그동안에 멀어졌던, 이해하지 못했던 크레바는 순식간에 봉합되고, 뒤돌아서 뛰어온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한다. 정녕 21세기적이고도 순식간에 강력한 드라이아이스 분무식의 봉합이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날카로운 메스를 담고 있다. 수술을 너무 급하게 끝낸 나머지 메스를 미처 꺼내지 못하고 봉합해 버린 거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앞으로 몇 년을 연애 중‘일’지도 모른다. 아주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정녕 사진속의 늙은 커플 처럼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단기적으로 내일은 만나고, 혹은 이번에는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것을 충분히 읽어내고서 모호한 결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본 분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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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ey Road 표지를 떠올리게 한 스틸컷



10월 30일 미로스페이스에서 있었던 독립 장편영화 쇼케이스를 다녀왔다.

제목은 <마지막 밥상>. 이 영화는 감독의 이름도 몰랐고, 단지 위에 올린 사진을 어디선가 보았으며,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하는 비틀즈의 Abbey Road의 앨범 표지를 떠올리게 해서 뇌리게 강하게 남은 제목의 영화였다. 알고보니 20기 선배가 촬영을 했더군.
그리고 10월초 해피투게더 독립영화를 보고 뒷풀이를 하다가 옮긴 자리에서 노경태 감독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그의 차기작 시나리오까지 받아 읽어봤던 터라.. 이 영화를 꼭 보리라 했었다.


1. 실험영화같은 방식(?)으로, 또는 파토스를 제거하는, 드라마를 세우다.
실험영화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지하고, 본 것 조차 없는 터라 뭐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단지 (상영회에서 나눠준 자료에 따른) 노경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르면 그는 계속적으로 단편,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이고, 당연히 그러한 방식에서 이어지는 일관성 혹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꺼내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일단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참고해야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용어 사용을 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정서에 호소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인물들의 이름 조차 알려주지 않고, 심지어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지만)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두 단위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날 관객중에서는 할머니와 손자의 근친상간이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이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그 관객을 실소하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 그 관객을 욕할 수는 없는 거다. 영화는 정말로 상영이 되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감독의 의도 찾기 놀이는 말그대로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부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어있고, 배우들은 박제화한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서에의 호소? 그런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말라고 한다.
영화는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스크린에서 돌아가는 이미지들만 봐야 한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는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 고전적인 방식은 당연하게도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의 이입을 일으켜서 관객의 파토스를 자극하고 눈물과 웃음을 짜낸다음 오게되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방식이다. 어찌보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하고 일부 시도한 "지적 영화"(intelletual cinema)에 더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실험 영화가 고전적인 드라마를 벗어난 영화의 양식과 형식에 더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라는 것을 포함할 때 더더욱 이 영화는 실험영화같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이토록 폭력적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폭력을 바탕으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정보와 상황들을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파토스가 생길 수가 없다. 극도의 이성, 지적인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그리고 행위들을 보여주면서 조금씩조금씩 관객의 뇌는 쇼트 사이의 설명을 상상하고 아버지의 삶을, 아들의 에이즈를, 딸의 노력을, 엄마의 슬픔을, 할머니의 존속을 이해햐려 든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들이 얽혀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이 드라마가 된다. 파토스를 제거해서 이성적 사유만을 해야하는데 그들 사이의 드라마가 머리 속에 박히게 된다.
이 쯤되면 이 영화가 독자적인 느낌을 알게 된다.

2. 연출자의 의도대로 박제화한 '웅변조의 카메라', 휘저어댄 거품의 편집
이 영화는 수퍼16mm로 촬영해서 35mm필름으로 블로업된 포맷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영사시 문제가 발생했다. 35mm 비스타비젼을 영사실의 실수로 화면의 상단과 왼쪽이 잘린 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nA세션에서 질문해서 확인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헤드룸이 잘려나가 답답함 상태의 화면으로 영화를 본 셈이다. 어찌되었건 그것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더 준 셈이고, 하나의 미학을 더 잃은 셈이다. (제발 영사실의 실수는 이제 그만!!!!! -______________-;;;;; )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움직임이라면 주밍이 2~3번 나올 뿐이고, 거의 왠만한 앵글은 깊이감을 부각하지 않는 평면적인 상태이며, 또 대부분이 1scene 1cut으로 찍혀져 있다. 아닌 장면들도 있지만, 이 원칙이 보이는 상태에서 예외적인 것들을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그리고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보통이 LS이상으로 나온다. 이는 사실 연출자가 굉장히 카메라를 '보이게' 찍는 방식이다. 카메라가 고전적인 방식을 벗어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카메라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왜 그렇게 두고 있는지를 거의 항변하다시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웅변조의 카메라!!! 다시 말해 이제는 연출자가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를 읽어볼 필요가 생기는 셈이다.
노경태 감독은 연출의도를 "이 영화는 아이러니와 단절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지구의 오염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trivialism, surrealism and minimalism의 렌즈를 통해 나만의 코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줄 띄고) 모호한 액팅, 초현실적인 미쟝센과 탈색된 칼라는 현대 인간관계의 모순과 어색함, 그리고 세기말적인 암울한 현대사회를 표현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이러니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어로 나오는 사조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언급하긴 어려울 것 같고, 위에 설명한 카메라의 방식들이 분명 노경태 감독의 방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로 '하찮고... 현실이 아닌 것 같고..... 매우 작은.....' 단서들에서 출발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화적인 공간이 탄생한다. 감옥들의 방이 그렇고 지하철이 그렇다. 지하도도 그렇다. 면접보는 공간도 그렇고, 거대한 교각 밑이 그렇다. 어항속이 그렇고... 그곳을 다니는 인물들의 옷들이 그렇다. 분장이 그렇다. 세상에 흙을 뒤집어 쓰고 줄줄이 등장해서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지구인들을 깨우는 외계인을 보았는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처음 보고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지라도....
그런가 하면 역시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속에 등장한 이상한 장면들, 이상한 인물들이다. 전혀 스토리와 상관없이 떠도는 분절된 씬들이 등장한다.  터널을 뚫는  현장 시찰의 공무원들, 엄한 곳을 파는 전화공들, 발악하는 가스통남자와 카페트녀, 주차장자리를 놓고 싸우는 아가씨와 아줌마, 점점 검은물이 들어가는 밥그릇들 등등이 이야기가 좀 아리까리할 즈음에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요 5명의 인물들간의 고개돌리기 쇼트들. 이것들이 유기적(서사적)이 않고, 자의적(시네마틱)인 상태로 영화를 세우려는 감독의 휘핑크림식 편집이다. 크림을 휘핑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자의적이고, 잘 안섞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휘핑은 반복하고 힘조절을 하고 하면 할 수록 쓸데 없는 기포는 점점 빠져나가면서 양질의 크림을 탄생시킨다. 이 영화의 편집이 마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편집 방식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궁금했던 지점은 영화가 촬영이 끝나고 나서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재편집 될 때 이는 다시 작가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모습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분리이화 되는 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거다. (반쯤은 예상했지만) 노경태 감독은 사실 시나리오상의 이야기와 거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시나리오가 나오면 영화는 다 나온거라고 했던 히치콕의 방식인 셈이다. 그 방식을 동의하든 못하든 간에 그 오케스트레이션의 방식을 통해서 씬을 이어붙이고, 쇼트를 구성하는 편집은 (실제로 누가 편집을 했든 간에) 편집자(로서의 기능과 역할)보다는 (작가로서의) 연출자를 드러낸 결과인 셈이다.


3.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배달되는 영화적 파토스!
끝내 영화의 끄트머리에 가서 어떻게 된 구성의 가족들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미 정서적인 파토스를 거세해 보면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그 가족구성원의 정보가 이렇게 저렇게다라는 사실이, 영화를 대하게 되는 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스토리 정보가 영화를 좌지우지 하고,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미 머리가 좌석이 딱 붙어서 엔딩 음악에 놀래서 벌떡 깨는 사태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가족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면서 그들의 회합을 화성으로 떠나는 어느 간이역에서 마무리짓는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간이역에 만나서 화성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냐 찍지 않았냐는 것은 정서적인 영화찍기와 만들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어찌되었던 이 영화는 방식과 태도의 지점을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갖고서 움직여왔고, 감독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관철하고 싶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일단 당신이 엔딩음악에 겨우 깨어난 관객이 아니라면, 선택하면 된다. 감독의 이야기를 작게 주억거리며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사실 버틴다고 하는 순간 영화적 이야기는 다 알아들은 셈일텐데... ^^) 양자 택일의 이분법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정서적으로 동화할 감정의 표현도 없고, 드라마틱한 갈등도 없고, 따라가야할 주인공도 모르채 영화를 다 보았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눈물을 짜내거나, 가슴이 움직일 드라마틱한 파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묘한 인상, 이들이 어찌되었거나 하나의 개인들이고 각자의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으로 영화적인 파토스를 생성한다. 나만 그런건가? 당신도 보면 좀 그럴거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당신에게 격정적이지도 않고, 아리까리하기만 한 영화적 인상을 남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엄밀하게 관객과의 소통이란 친절하냐 불친절하냐의 측면보다는 어떤 방식의 소통을 요구하느냐로 시작해야 한다. 마치 TV처럼 주저리 주저리 대사를 쉬지 않고 내뱉어내는 설명조의 이야기는 엄밀하게 일방적 전달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의 영화는 TV 드라마와 별 차이점을 지니지도 못할 뿐더러, 이 지점에서 얘기한다면 <마지막 밥상>은 불친절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지적 영화"의 측면과 실험적인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다가가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의미를 형성하고 영화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장면들에서 정보가 부족한 것은 감독의 실수라고 받아들일 자세 조차 필요하다. 그의 첫 장편영화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짚어내야 한다. 노경태 감독을 위해서....)


5. 맺으며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다른 영화가 가능한 것도 같다. 하지만, 객석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배급의 기회 조차 못 갖는 것은 이미 무대조차 가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만든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가 하면 노경태 감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른 영화가 가능한지는 몰라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에너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며 살아온 나는 언제나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었고, 왠지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소심함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차리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 그의 영화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꺼져가던 불씨에 산소 한 움큼을 던져준 셈이다.
 

영화, 그 자체를 찾는 여정.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작성자 : 정경록
- 날짜 : 10/26

1. ‘상실’을 이야기하다.
- 영화를 찾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독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상길(안길강 분)은 주구장창 영화를 찾고 있다. 독립적으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첫 시퀀스는 그 현실적인 어려움 안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드는 것(찾는 것,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그가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속초를 향하게 된다. ‘무정차’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무정차는 없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 안에서 운명적(!)인 여자를 만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후, 여자를 따라서 홀연히 여자의 동생찾기에 합류하는 상길. 여기까지 오면, 영화의 주제는 잘 드러난다. 상길의 사촌형과 숙모는 이산가족으로써,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여자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자 한다. 물론 상길은 자신의 영화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여자를 따라서 강원도의 탄광촌들을 다니던 상길은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물론 관객도). 사실 이 상황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태도와 진지함에 (혹은 뻔뻔함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제 영화는 단순히 내용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상실을 회복하려는 모습에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 영화를 욕망하다.
여자의 이름이 ‘영화’인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다. 내용 혹은 상황으로 상길이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그저 있는 이야기들 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바깥으로 보면, ‘감독은 영화를 욕망한다’는 철학적(?) 명제를 구현한 셈이 된다. 게다가 그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옛 탄광촌의 건물이다. 폐허 안에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찾기를 원하는 감독. 이 쯤 되면 사실 은유가 은유가 아니고, 이야기가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관객은 이 영화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지 물음표가 찍힌다. 감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 여자(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나서다.
결국 여자의 동생찾기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는 개발이나 자본에 의해 자신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탄광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을 오가는 동안에 상길은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속초에서의 자신의 기억 역시 탄광촌들과 다를바 없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개발과 자연의 사이, ‘거주호와 철거호’ 사이, 부산과 속초 사이, 속초와 탄광촌의 사이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 찾으려고 하는 노력만, 과정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된다. 정말로 개인지 늑대인지... 집을 나간 우리집 개인지, 자신의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는 야생의 늑대인지 구분할 수 조차 없다. 상길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다시 자신의 영화를 찾으려 편집실로 연락하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데뷔작)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2. 영화를 받치고 있는 이상한 징후들? 혹은 상징들?
이 영화는 내연의 이야기와 외연의 쇼트(혹은 구조, 또는 기호체계)들이 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상한 인상들을 남기고 있다. 먼저 가장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술집의 아저씨. 그 아저씨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횟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아저씨는 무언가를 초탈했거나 허무한 표정을 한 채로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상길의 일행의 건배에 박자를 맞추어서 혼자서 건배를 한다. 단독 쇼트와 롱샷 안에서의 포커스를 할애하면서 까지 영화는 그 인물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이 사람은 영화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아지. 속초에 도착해서 묵은 민박. 그 민박집에는 너무나도 귀엽게 ‘개밥’스러운 개밥을 먹는 하얀색의 강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살이 토실토실 오르기를 기대하는 주인이 있다. 이 영화에서 정녕 강아지라고 주장할 법한 하얀 강아지이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 함께 떠난 여정 중에 도계에서 만나게 되는 검은 강아지가 있다. (이 쇼트들은 카메라가 비추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시선과는 무관하며, 관객만이 알게 되는 전지적인 쇼트들이다.) 그러나 검은 강아지는 개가 아니라 ‘늑대’이다. 주인이 없고, 혼자서 버려진 쓰레기들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담고 있다.
폐허의 공간. 강원도에서 만나는 태백, 사북, 도계 등의 공간은 한동안 석탄 붐을 따라서 발전했지만, 광산들이 모두 폐광 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져버린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거기서 상길(감독)은 영화와 교합(!)한다. 마치 김기찬의 사진들(<서울 풍경>이라는 사진집)에 나오는 공간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꿈같다.

3. 감독론
전수일 감독을 논하는 데 있어서 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스토리텔러?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스타일리스트?인지는 전후작들을 더 살펴보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만을 놓고 그가 어떤 감독인지를 조심스럽게 논해본다면, 아무래도 그는 성긴 이야기 구조와 약한 드라마위에 독특한 징후들을 심어 놓는 데에서 영화를 세워나가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징후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계속적인 잔상을 남겨놓음으로 해서 어떤 영화적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이번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는 드라마와 시네마 사이에서의 고민점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길의 여행은 마치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여행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는 그래도 영화의 메인 플롯을 이루면서 마지막 시퀀스를 가능하게끔 했다. 결국에 숙모가 돌아가시고, 그가 다시 부산에서 속초를 향하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눈덮인 강원도의 한 골짜기에서 영화를 끝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것일까? 오히려 커다란 구조에서 영화를 강원도 여행을 둘러싸고서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한편의 완결된 형식의 구조를 갖고서, 그의 고민과 환상특급을 구현하는 쪽을 선택했다면 어떨까? 그것이 구조의 측면에서 <개와 늑대>를 형성해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를 놓고서 ‘만약’이라는 단서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설명불가능한 징후들을 형성하고 그것의 분위기를 더 이끌어내는 것이 구조와 특정 쇼트들을 기반으로 더욱 영화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수일 감독은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적인 이름, 제목, 쇼트들에서 매우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말그대로 이 영화를 완성한 시점에서 그의 결론과 일치할 것이다. 모호한 예술성을 근간으로 끝내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려고 한 점에서 그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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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이라는 이 블로그의 제목은 영화 <괜찮아, 울지마>에 나오는 주인공인 무하마드이고, 그의 거짓말에 관한 진실여부를 판가름하는 바이올린 가방을 가리킨다.

마치 말장난과도 같지만,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결론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그 사유의 과정을 거칠 때, 영화가 더욱 생명력을 가지고, 감독과 진정으로 이 영화를 두고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까페에서 이 영화를 두고, 어제 세미나가 이루어졌고, 민병훈감독 역시 참석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뵙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한 번쯤 뵙고 싶어하던 차에 기회가 잘 닿았다. 그리고 세미나의 발제자의 발제문에서도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은 바이올린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그 발제문을 듣고, 이야기하는 와중에 민병훈 감독의 의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은 비단 이 바이올린 가방만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정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의 가장 전면에 세워져 있는 껍데기이며, 그는 모스크바에서 내려올 때부터, 고이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가방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떠날 때 역시 가방을 잘 들고 간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하마드는 음악가로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 행동한다. 억지춘향으로 유추를 하자면, 무하마드의 원래 꿈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영화적 근거는 없지만, 인간적으로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하려던 바가 안되었을 때 하게 되지 않는가.. 신정아의 경우처럼황우석의 경우처럼..) 그렇게 전방위적 위치에 존재하는 소품이고, 무하마드라는 인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차인 바이올린 가방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비어있다거나, 바이올린이 없다거나 하는 상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하마드가 동생에게 숙제를 가져다 주러, 그리고 다시 학교를 빠진 동생을 찾으러 뒷동산의 투계장을 오르는 동안, 어머니는 무하마드의 방에 와서 그의 바이올린 가방을 열어본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이내 닫아버린다. 어머니의 표정에 커다란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감독은 세련되게(!) 바이올린 가방의 안쪽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관객들은 그것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고, 감독 역시 그 의도를 잘 유도(?)한 셈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기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만약에 그것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것들로 가득찼다면? 바이올린이 있긴 하지만, 줄이 하나도 없거나, 훼손된 상태라면? 아니면 정말로 바이올린이 들어있다면?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영화는 그 장면 이후에 다시 바이올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으며, 그 안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실제로 그 바이올린 가방이 비어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찌보면 속단이 되는 것이고, 무하마드라는 사람을 단정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마저 잠재된다. 단순한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고, 보통의 구라쟁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 하나의 진실한 순간이 있을 텐데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인물에게서 손을 놓지 않게 된다. 결국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감독의 의도가 그 가방은 비어있거나, 다른 물건으로 가득찬 무하마드=거짓말쟁이의 증거라고 하더라도, 속 내부를 안보여주거나, 보여주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의 영화적 분위기를 더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무하마드의 방에서 펼쳐지던, 엄마와 관계나 대화 상에서 보여지든, 같은 텍스트를 놓고서 하나의 지점을 얘기하는 담론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는 지점이다.

 

민병훈 감독과 다른 사람들과의 영화를 통한 이야기 중에 실제로 영화관의 배급문제까지 확산이 되어서 하는 이야기 중에 영화를 만드는 자들이 해야할 역할인 좋은 영화를 만들고 그것이 관객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른바 예술영화가 일반 관객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및 그 대책의 차원에서 구조(배급, 제작 등)적인 문제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고, 대중 혹은 관객은 틀리지 않다라는 논리를 펼치는 민감독이었고, 그에 대해서 영화과 과연 제대로 소통하고 있느냐?라는 부분에서 만드는 자들의 지적 허영심 혹은 우월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던 나였다. 그러한 논점을 <괜찮아, 울지마>라는 텍스트 안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본 지점이고, 감독은 이 지점에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연출력의 깊이에 관한 쪽에서 내 스스로도 앞으로 더 깊어져야 한다며 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분명 전방위적으로 영화를 생산하는 생산자이다. 감독들이 의자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연출이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 역시 동의하고, 그것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지난 5월 미로스페이스에서 잠시 얼굴만 보고, 그전에는 2005년 어느 여름날 밤 홍대역 주변을 지나던 그와 마주쳤고, 그전에 서강대 다닐 적에 수업시간에 만났던 선생으로서 민병훈 감독은 내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년만에 마주한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격려를 해주었다. ‘영화를 만들어라그것이 영화쟁이가 해야할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곁에 앉은 다른 친구가 자신의 첫 단편이라며 건네주는 DVD를 매우 공손하고 고맙게 받으면서, 잘 보겠다는 약속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매우 매력적이다.

조만간 또 다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그 동안에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