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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이라는 이 블로그의 제목은 영화 <괜찮아, 울지마>에 나오는 주인공인 무하마드이고, 그의 거짓말에 관한 진실여부를 판가름하는 바이올린 가방을 가리킨다.

마치 말장난과도 같지만,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결론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그 사유의 과정을 거칠 때, 영화가 더욱 생명력을 가지고, 감독과 진정으로 이 영화를 두고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까페에서 이 영화를 두고, 어제 세미나가 이루어졌고, 민병훈감독 역시 참석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뵙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한 번쯤 뵙고 싶어하던 차에 기회가 잘 닿았다. 그리고 세미나의 발제자의 발제문에서도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은 바이올린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그 발제문을 듣고, 이야기하는 와중에 민병훈 감독의 의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은 비단 이 바이올린 가방만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정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의 가장 전면에 세워져 있는 껍데기이며, 그는 모스크바에서 내려올 때부터, 고이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가방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떠날 때 역시 가방을 잘 들고 간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하마드는 음악가로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 행동한다. 억지춘향으로 유추를 하자면, 무하마드의 원래 꿈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영화적 근거는 없지만, 인간적으로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하려던 바가 안되었을 때 하게 되지 않는가.. 신정아의 경우처럼황우석의 경우처럼..) 그렇게 전방위적 위치에 존재하는 소품이고, 무하마드라는 인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차인 바이올린 가방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비어있다거나, 바이올린이 없다거나 하는 상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하마드가 동생에게 숙제를 가져다 주러, 그리고 다시 학교를 빠진 동생을 찾으러 뒷동산의 투계장을 오르는 동안, 어머니는 무하마드의 방에 와서 그의 바이올린 가방을 열어본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이내 닫아버린다. 어머니의 표정에 커다란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감독은 세련되게(!) 바이올린 가방의 안쪽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관객들은 그것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고, 감독 역시 그 의도를 잘 유도(?)한 셈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기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만약에 그것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것들로 가득찼다면? 바이올린이 있긴 하지만, 줄이 하나도 없거나, 훼손된 상태라면? 아니면 정말로 바이올린이 들어있다면?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영화는 그 장면 이후에 다시 바이올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으며, 그 안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실제로 그 바이올린 가방이 비어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찌보면 속단이 되는 것이고, 무하마드라는 사람을 단정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마저 잠재된다. 단순한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고, 보통의 구라쟁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 하나의 진실한 순간이 있을 텐데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인물에게서 손을 놓지 않게 된다. 결국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감독의 의도가 그 가방은 비어있거나, 다른 물건으로 가득찬 무하마드=거짓말쟁이의 증거라고 하더라도, 속 내부를 안보여주거나, 보여주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의 영화적 분위기를 더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무하마드의 방에서 펼쳐지던, 엄마와 관계나 대화 상에서 보여지든, 같은 텍스트를 놓고서 하나의 지점을 얘기하는 담론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는 지점이다.

 

민병훈 감독과 다른 사람들과의 영화를 통한 이야기 중에 실제로 영화관의 배급문제까지 확산이 되어서 하는 이야기 중에 영화를 만드는 자들이 해야할 역할인 좋은 영화를 만들고 그것이 관객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른바 예술영화가 일반 관객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및 그 대책의 차원에서 구조(배급, 제작 등)적인 문제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고, 대중 혹은 관객은 틀리지 않다라는 논리를 펼치는 민감독이었고, 그에 대해서 영화과 과연 제대로 소통하고 있느냐?라는 부분에서 만드는 자들의 지적 허영심 혹은 우월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던 나였다. 그러한 논점을 <괜찮아, 울지마>라는 텍스트 안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본 지점이고, 감독은 이 지점에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연출력의 깊이에 관한 쪽에서 내 스스로도 앞으로 더 깊어져야 한다며 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분명 전방위적으로 영화를 생산하는 생산자이다. 감독들이 의자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연출이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 역시 동의하고, 그것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지난 5월 미로스페이스에서 잠시 얼굴만 보고, 그전에는 2005년 어느 여름날 밤 홍대역 주변을 지나던 그와 마주쳤고, 그전에 서강대 다닐 적에 수업시간에 만났던 선생으로서 민병훈 감독은 내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년만에 마주한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격려를 해주었다. ‘영화를 만들어라그것이 영화쟁이가 해야할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곁에 앉은 다른 친구가 자신의 첫 단편이라며 건네주는 DVD를 매우 공손하고 고맙게 받으면서, 잘 보겠다는 약속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매우 매력적이다.

조만간 또 다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그 동안에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