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PINA 3D를 보았다.
난 피나 바우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이름만 아는 수준, 그리고 무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배경지식이 없다.
그러나 빔 벤더스가 연출했다는 이 영화는, '3D'라는 수식어가 영화 앞에 붙기 시작한 이래 내게 가장 관심이 가는 영화였다.

기본적으로 그동안에 몇 편의 3D 영화를 보면서 (고전적인 기술 말고, 이른바 '아바타' 이후), 난 절대로 3D라는 기술이 왜 영화에 들어와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굉장한 피로감. 보고 있으면 어느 새 눈이 아파온다.
두번째, 인지에 관한 문제, 우리가 정말로 '입체적'으로 사물을 인지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물론 사물의 크기에 따라서 거리감을 가지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정말로 '입체'인가 라는 문제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2D)에는 '원근법'이 보편화되었고, 이는 사람이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가까운(!) 표현법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서는 이 원근법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회화이후, 카메라가 발명되었고, 이 카메라의 렌즈는 결국 다시 원근법의 원리에 의해서 렌즈가 '하나'로 채택된다. 인류는 태초부터 눈을 2개 달고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은 아마도 '인지'(perception)의 문제다. 원근법을 이용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보는가를 정의한다. 실제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재현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인지'하느냐 하는 감각을 재현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진기에 렌즈를 하나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보편화되어있다. 즉, 사진 기술의 모든 공학에 '시간'의 차원을 입힌 '영화' 역시 하나의 렌즈로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그 자신의 예술성을 담보하기 위해 '서사'를 도입하고, 영화는 '이야기' 중심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물론 영화의 역사 이래 여전히 치고 나오는 질문은 바로 '형식'에 관한 것이며, 무엇이 영화를 스스로 영화답게 하는가? 어떤 것이 영화적인가? 라는 질문 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아바타'를 보면서, 어떻게 이 영화를 보아야할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난 일단 이 영화가 재미가 없었다. 내용적으로!!! 뭐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입과 손이 동시에 아픈 일이고... 어찌되었건 '3D' 블록버스터. 제임스 카메론. 이라는 수식어들에서 중요하게 다뤄줘야 할 것은 결국 3D라는 기술이었다. 다시금 정성일의 글을 불러온다.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59556 또한 이 글 안에서 언급하는 다른 글. ‘최후의 승리까지 한뼘 더 필요해’ <씨네21> 736호

이 두 개의 글을 읽는 것은 나름 3D라는 기술에 대한 어떤 질문 제시로서 괜찮다. 그러나 각자의 답 혹은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리라. 나는 PINA를 보면서 비로서 질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에 몇 편 보지 않은 3D영화에서 왜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오히려 피곤해만 했었는지.... 일단 PINA의 특징을 몇 가지 거칠게 열거하자면,

- PINA는 다큐멘터리이지만, 일종의 공연 기록영상으로써, 내용적인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가 있지 않다. 공연 자체가 중요한 내용이다.
- 이 내용은 그 자체로 형식이 된다. 공연을 찍는다는 것!
-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거의 없다. 일단 무용수들이 무대에서 뛰고, 그들은 계속 움직이면서 자신들의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 대부분의 FS이거나 와이드샷이 많다.
- 3D를 구현하면서, 일반 2D 영화같은 심도(혹은 입체감)를 발견할 수는 없다. 전, 중, 후경에 있는 무용수들은 대부분 초점이 맞으며, 화면에서 튀어나와(!) 보인다. 그래서 눈이 바쁘다. 이것은 보통 공연을 보는 것과 비슷한 점일 수 있다.

결국 2D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포커싱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포커스의 이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장면을 비스듬하게 찍어도 모든 사람을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이건 그럼 딥포커스인가? 일단 임시적으로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딥포커스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그래서 무슨 상관이냐고? 이렇게 찍히고, 영사되는 화면에서 물음은 자연스레 나온다. 3D영화들은 애시당초 3D를 감안하고 찍는다는 전제에서, 그렇다면 그 영화들은 아직 3D 시설이 없는 곳에서 본다고 했을 때 그 차이란 무엇인가? 뭔가 좀 도드라져 보인다는 단순한 대답은 여기서 그만. 그런 말을 할 사람들과는 더이상 얘기할 시간이 없다. 3D(로 찍혀진) 영화를 2D로 본다면, 그것은 과연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인가? 그 수식어에 진짜 질문이 없는 수많은 헐리우드 3D영화가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냥 (3D) 영! 화! 이지. 3D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을 피곤하게만 할 뿐이고. 그 피로감에 대한 보상으로 약간은 도드라진 '신기함'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지를 인식하는 '인지'에 대한 눈속임 뿐.

다시 PINA얘기로 돌아오자. 내가 받은 느낌을 이렇게 표현해본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으로 돌아온 세계는 이미지에 원근법을 적용시키면서 인간이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PINA에서는 새로운 지점을 제안한다. 중, 후경 들에 존재하는 풍경과 다른 인물들, 움직임들의 포커스가 맞고, 고스란히 '존재'한다. 이는 마치 르네상스의 캔버스 위에 고대, 중세의 신화적 존재가 입혀진 듯하다.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들은 오히려 2D위에 2D처럼 기록했다. 한국의 민화들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작가의 자의성(혹은 또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중요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그려진 피사체들이 주를 이뤘고, 거의 대부분의 피사체가 초점이 맞아 있었다. 피사체들은 말 그대로 '존재'했다. PINA는 그렇게 3D를 구현해낸다. 빔 벤더스는 새로운 질문을 야기할 토양을 마련한 셈이다. 

이제 영화에서 3D란 얄팍한 신기함을 넘어, 그 자체로 형식이며, 새로운 붓이 될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제 포커싱에 의한 감정적 거리 혹은 인지적 거리를 만들어내는 고전적 서사의 영화가 아닌, 그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존적 피사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이제 '3D'영화 시대의 한 발판으로 보인다.
이는 다시 영화가 스스로 영화다움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라는 시선, 르네상스의 원근법에 종속당해서 그대로 재현되는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문학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2시간동안 우리를 붙들어두었던 영화는 이제서야 스스로 종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셈이다.
인간의 인지와는 관계없이 이제 영화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수많은 영화가 있고,
결국 아무리 영화를 좋아해도 그 모든 영화를 보고 사는 것은 바닷가에서 쓰나미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다 보면, 마치 비교체험 극과 극, 혹은 영화대 영화 같은 데에 쓰일 법한 이야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혹은 버스에서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보다가, 어떤 두 나무의 공통점을... 그리고 차이점을... 찾아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룰 영화는 바로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10억] (조민호, 2008)과 [생존게임] (El Metodo, The Method, 마르셀로 피네이로, 2005) 라는 영화들이다. (찾아보니 [생존게임]의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무릇 사는게 경쟁이고, 그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소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나 문학 등의 예술과 문화 매체에서 그러한 이야기들을 자꾸 또 보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작가가 생각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어떠한가, 또는 그만의 결말 혹은 세상과 인간을 다루는 시선에 있다고 보겠다. 영화를 그저 재미로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예술작품이란 난 여전히 시대 혹은 현실과 언제를 불화를 일으킬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10억].

[정글쥬스], [강적] 등의 선이 굵은 남성영화를 찍어온 조민호 감독. 그가 10억이라는 상금을 놓고 여러 사람이 벌이는 서바이벌 게임에 관한 영화를 내놓는다고 했을 때,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호주에 다녀온 경험이 있고, 그 와중에서도 서호주의 풍광은 직접 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대치는 약간 있었다. 한국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살고 있는 8명의 젊은이들. 그들이 낯선 육지내 무인도 같은 서호주의 혹독한 땅덩이 에서 상금을 타기 위해 벌이는 경쟁.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이 인터넷으로 상영이 된다는 자극적인 소재. 설정 자체는 아주 재미난 상업영화로서의 요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거꾸로 가본다.
자 이런 소재를 갖고, 당신이 감독 혹은 작가라면 무슨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이 질문을 갖고서 영화를 보기를 바란다. 영화는 언제나 따라가다 보면 관객이 속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게임의 공정성은 끝내 도마위에 잘 오르지도 않는다. 관객은 언제나 매저키스트적인 쾌감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렇다 하여, 작가가 무미건조한 사디스트만 된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영화적 쾌감은 반감 되고 만다. 어떤 복선이 필요하고, 장치가 필요하고 하는 식의 영화적 작법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겠다. 어찌되었거나, 8명의 젊은이가 등장하니까 이 사회 안에서 서로 마주침없이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된거다. 그랬을 때 그들은 서로가 어떤 부딪침을 가지게 될까? 여기서 '어떤' 이란 단적으로 "except 10억"이다. 영화의 제목은 10억이고, 서바이벌 게임이지만, 그들 사이의 갈등이 단지 10억이라는 돈밖에 없다면, 결국 그 영화는 제목만 보고도 다 본 셈이 아니겠는가? (호주라는 나라의 생경한 풍광이 있다고?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풍광은 호주말고도 많다.)

영화는 중간즈음에 이르러 애를 쓴다. 박희순의 사무실을 때려부수는 과정에서 박해일이 발견하는 사건 정리 파일이다. 내심 개인적으로 영화는 이제부터 본격적이겠구나 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 파일은 박해일 혼자서 숨겨버리는 걸로 끝나버린다. 아... 이제 영화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아무리 세상에 돈때문에 살고 죽고, 서로 물어뜯고 죽이고 하지만, 그걸 단순화 시키는 것은 인간적인 이야기를 포기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고시생, 증권맨, 독립PD, 해병대 출신, 운동선수, 모델지망생 등등의 각자의 삶을 꾸리는 젊은이들, 모두가 '돈'만 있으면 자신의 꿈이 다 이루어 지는것일까? 돈 말고도 다른 부분은 충분히 많다. (뭐 그렇다고 식상한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겠지? 아무튼!!!)
여기서 캐릭터들이 진짜로 충돌하고 있다는 지점은 없다. 각자의 삶들에서 다른 사람의 삶이 부럽다거나, 혹은 밉다거나 하는 부분이 있나? 아마도 10억이라는 타이틀을 쫓기에 급급한 나머지 마지막에도 뻔한 반전(?)으로 마무리 되어버리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누구 하나 살아남은 인물(이거 밝히면 스포일러인가? 그럼 말지 뭐.)이 10억이 든 돈가방을 들고, 종로 한복판으로 유유하게 걸어들어가는 거다. 결국 어떻게 살든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냥 그렇게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사는 게 장땡이라고 말하는 걸까?
영화에서 엔딩장면은 언제나 중요하다. 아마도 감독의 모든 생각을 집약해놓는 장면이고, 그가 생각하는 가치들이 모두 여기로 귀결한다고 본다. 나로써는 엔딩장면을 찍기 위해서 결국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 앞의 이야기들을 주구장창 찍어대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는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좀 뜨악한 느낌이 든다.
자극적인 소재, 호주의 풍광 말고는 도대체 무얼 찍은 거라고 해야할까? 10억의 상금이라는 외연을 너무 크게 잡아놓은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을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다시 왜 호주에서 찍어야 했을까? 그 8명의 젊은이들은 굳이 호주까지 불려가서 Die Hard 해야하는 이유가 무얼까? 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게 된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든,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는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수업시간에 그토록 따갑게 들으면서 그것들을 외워왔다. 좀 어이없는 얘기지만, 그토록 그것을 외우게 하고 시험문제에 내고, 풀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야기에서 그 배경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이야기를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10억]의 호주는 꼭 호주이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곳이 어디 중국의 사막이면 어떻고, 아프리카의 사막이면 어떻고, 아니라면 차라리 한국 어디 구석에 있는 무인도면 어떻겠는가. 한국의 무인도는 작아서 힘들다면, 무인도 몇개를 오가는 이야기면 어떤가.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곳이 구글 어스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들이 만난 정신적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적 세계에서 어디에 위치하느냐라는 문제가 아닐까?
(영화를 본지 시간이 좀 지났고, 최근에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게 뜸하다 보니 글이 좀 중구난방에 핵심이 없어 보일수도 있겠다.)

그런가 하면 [생존 게임]
그보다 먼저 [최종면접].

이 영화는 원래는 스페인의 희곡이 원작이다. 희곡의 제목은 [그뢴홀름 방법론]. 스페인의 극작가 조르디 갈세란의 작품이다. 당연히 먼저 스페인에서 상연되었고, 그 희곡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상연된 연극이 [최종면접]이다.
(어찌어찌 알게 된 과정이었는데, 교수님의 부탁을 받아 지인이 이 희곡을 직접 스페인에서 구해와서 한국에서 번역되어 연극화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 과정을 듣게 되면서 찾아본 영화가 바로 [생존게임]이다.)
연극에 대해서는 각종 검색엔진에서 "최종면접", 혹은 "그뢴홀름" 이라는 단어로 검색해보면 알 수 있으니 찾아보시길... 나름 인기가 있어 여러차례 앙코르 공연이 되고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본인도 꼭 찾아서 보러 갈 예정!
(게다가 연극에 대해서는 문외한 인지라....쩝)

다시 [생존 게임].

영화의 원제는 [El Metodo]. 영어로는 The Method. 즉, 방법, 혹은 방법론이겠다. 희곡의 원제목은 [El Metodo Gronholm] (알파벳위에 점자들이 있는데, 이 자판으로는 어떻게 치는 지 모름)
이 제목은 직접적이지만 나름 은유적이기도 하다. 세상을 압축해놓은 느낌. 마치 윈도우 로고를 구겨서 구글 크롬 로고를 만든 느낌이다.
영화에서는 7명의 면접자가 등장한다. DEKIA라는 어떤 회사의 고위간부를 뽑는 과정이고,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트촬영일까 라고 생각하면서 봤지만, 왠지 아닌것도 같고... 컷어웨이를 보면 로케이션 촬영같기도 하다.)
즉, 저예산이라는 말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7명의 후보자를 불러놓고 면접을 보는데, 실제 면접관은 나타나지 않고, 한 방에 가두어진 이 7명의 후보에게 지령이 떨어진다. 맨 처음 7명 모두가 후보자는 아니며, 이 중에 한 명 면접관이 있으니 그를 찾아내라는 것이 첫 출발이다. (이쯤되면 마피아 게임?) 그리고 여러 후보들은 (겉으로는) 민주적인 절차들을 통해서 한 명씩 탈락시켜 나간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서 인신공격도 하게 되고, 과거를 들춰내고, 능력보다는 인간적인 약점들을 공격해가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아예 출발부터 흥미진진하다. 각자의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일자리)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상대를 간파, 공격하고 자신을 보호해나가는지를 여실하게 드러낸다. 즉, 외연도 크지만, 내부도 아주 흥미진진한 양상을 펼치게 된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과거에 연인이었던 커플이 오늘의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또 다른 양상을 예고한다.
여기서 리뷰는 조금 수박의 겉만 핥을 예정이다. 역시나 영화를 본지 1주일이 지나서 세세하게 기억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이런 류의 영화는 어떤 논쟁의 장면보다는 크게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번역 희곡은 블랙유머적인 측면을 두드러지게 내보였다고 해서 따로이 기대가 되는데,
영화는 유머라는 멋진 방법보다는 정공법으로 돌파한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틈을 찾아내려고 하고, 서로간에 그 틈을 공격하는데 정신이 없다. 그런 가운데 각종 범죄자들에게 쓰는 딜레마도 활용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단순히 인간 대 인간의 문제 위에 남녀간의 차이를 슬그머니 병치시키면서 또 다른 긴장감을 선사한다.
이야기적으로는 충분히 훨씬 뛰어나고, 재미난 이야기이지만, 영화적으로도 굉장한 수준은 아니다. 한 면접장에서 극한의 방법론을 통해 인간사이의 균열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카메라가 아주 뛰어나게 잡아내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필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좀 느슨하게 괜찮은 구조를  갖고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뉴스 장면들이 나오고, 면접장을 향하는 인물의 준비과정을 보여준다. 하필 이날은 스페인에서 신자유주의와 세계은행, IMF 등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는 날이고, 하루 종일 그 시위는 과격하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라디오를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가서는 거리가 난장판이 되어있다.
긴 이야기는 빼고, 엔딩장면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자. 최종적으로 합격한 사람은 안전하면서도 후광이 넘치는 회사건물에 남는다. 한편 마지막 면접에서 떨어진 이는 시위 후에 만신창이가 된 거리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언뜻 이게 별게 있으랴 싶지만, 이는 [10억]과 비교해보면 더욱 뛰어난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최종 경쟁에서 갈라진 자를 둘러싼 풍광은 이토록 다르다. 튼튼한 건물과 만신창이 거리. 결국 마지막 경쟁에서 진 자는 다시 혈투의 거리로 내몰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거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그걸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아주 성기게 표현되어있지만, 결국 인간이 선택해야할 가치를 마지막 부분에서 병치시킨다. 연대해서 무화시킬 것인가. 그냥 경쟁을 끝내서 나 하나만 살아남을 것인가.
그! 리! 고! (이것은 좀 확실한 방점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한 방법론이 여성과 남성을 통해서 각자가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 최종적인 선택을 달리함으로써, 아주 약하게 여성과 남성의 생각하는 방식이 다름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 난 왠지 평소 내가 존경하다시피하는 여성들의 생각방식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10억]과 [생존게임]
뭐랄까, 이 두 영화는 아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있다면, 단지 내가 이 두 영화를 비교적 근접한 시기에 연달아 보았다는 것이며, 그 안에서 다루어야할 세계가 너무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럴땐 정말 '영화가 찾아온다'는 표현을 안 쓸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바이벌의 직접적인 내세움인 거대한 자연과 무인도라는 설정의 [10억], 반대로 가장 은유적이고도 반대의 지점인 이 세계를 마음껏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층빌딩안의 면접장소라는 설정의 [생존게임]은 같은 세계를 가장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인 셈이다.
같은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두 영화의 포스터에서 비슷한 점이 드러난다.
결국 이것은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점에도 두 영화 모두 배우들을 골고루 포스터에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10억]은 사막(자연)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생존게임]의 경우는 말쑥한 정장을 입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어느 것이 더욱 영화적으로 세련되었는가. 그리고 세련됨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이야기가 더 관객들을 환기시킬 것인가는 알아서 해석하기 바란다. 취향은 모두 다를 테니...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편을 모두 보고 곰곰히 곱씹어보기를 바란다.


ps. 인서트
영화에서 인서트들이 정말 죽이는 효과를 낼 때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식상하거나 별게 아닌 것처럼 나올 때도 있다.
[10억]에서 캥거루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좀 뭐랄까 직유적인 표현인데다가, 그것이 주는 감흥이 상당히 약하다. 호주니깐 캥거루를 찍었거나, 캥거루가 아니면 호주라는 나라의 특징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걸까? 마치 중국가면 팬더를 꼭 찍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근데 이 인서트를 보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바로 [콜래트럴]에서 등장하는 LA 한복판의 코요테. 일단 이 인서트는 정말로 끝내주는 장면이라고 미리 일러둔다. 보통 자연의 야생동물이 주는 클리셰가 바로 캥거루 같은 거라면, 이 코요테는 정말 거꾸로 의인화한 야생동물이라고 하겠다. 고독한 킬러가 택시를 타고 타깃을 하나씩 하나씩 죽여야만 하는 과정에서 이 차가운 도시 한복판에 슬그머니 돌아다니는 코요테는 이미지 자체로도 이질적이지만, 주인공 킬러(탐 크루즈 분)의 고독감을 그대로 반영한 장면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마이클 만 만큼 고독감을 잘 표현하는 감독이 있을까?)
한편, [생존게임]에는 휴식시간에 나오는 사운드 및 빌딩 바깥에서 건물안의 사람들을 잡는 컷어웨이가 있다. 아주 탁월하다고 까지는 않더라도 아주 괜찮은 장면중에 하나다. 빌딩밖에서는 한참 시위가 이루어지면서 굉장히 시끄러운 가운데, 빌딩안 면접장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안의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그들 스스로가 이미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마냥 바깥을 내려다 보지만, 카메라는 거대 건물의 유리창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그들을 본다. 저예산 영화라서 그 장면을 보여주기는 어려워서 사운드로 표현한 듯한 냄새가 나지만, 어찌되었거나 그 여건 안에서 좋은 선택으로써 표현한 장면이다.

ps2. 엉뚱하게 단정하기.
찾아보니 조르디 갈세란은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 문과대학을 다녔던 이력이 있다. 이런 희곡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에게 '바르셀로나'라는 디딤땅이 있어서가 아닐까? 물론 비약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런 희곡을 쓰고, 그가 갖고 있을 세상에 대한 어떤 가치관을 상상하면 왠지 먼나라의 좋은 선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긴다.

ps3. 비좁은 공간에서 풀어가는 영화.
먼저 역시나 나름 최근에 본 괜찮은 영화로서 [맨 프롬 어스]. 이 역시 굉장한 수작.
[12명의 성난 사람들] (시드니 루멧, 957)이 아마도 꽤 오래된 수작이 아닐까 싶다. 흑인 소년의 살해 혐의를 놓고서 세상에 가득한 부조리와 이데올로기를 격파해나가는 수작이다. 이 영화는 다시 미국, 일본, 러시아에서 리메이크 되었다.
미국 리메이크판은 윌리엄 프리드킨(프렌치 커넥션과 엑소시스트의 그!)이 같은 제목으로 1997년에 TV영화로,
러시아 리메이크판은 2007년 [12명의 배심원]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리메이크판은 [12명의 마음약한 일본인]으로 1991년에 만들어졌다.

시드니 루멧영화와 일본판은 보았고, 미국, 러시아판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일본판 완전 웃기다.


문화의 흐름이란, 일부러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유통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놀라운 것은 마치 역사의 필연마냥, 어떤 흐름들이 보일 때다.
물론 그것은 너무 미묘하고도 아주 큰 한강 같아서, 그 안에 흐르는 작은 조류들을 마치 중요한 흐름인 것 처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말로 '바다'로 흘러가는 '강'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다. 숲안에 있으면 숲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만, 숲이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이 결국 어떤 흐름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문화는 분명 어떤 '복고(復古)'의 흐름이 있다고 말하려던 참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문화평론가의 식견은 없으므로 몇몇 영화들을 중심으로 생각해볼까 한다.)

최근 몇개월간의 영화들.
최근에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과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가 개봉을 했다. 이른바 60~70년대 한국에서 큰 유행을 만들었던 만주웨스턴과 액션영화들을 불러온 영화다. 한편, 곧 개봉을 앞둔 <고고70>, <모던보이>등도 각각 70년대, 30~40년대의 시대배경을 갖고 있다. 간단히 말해 복고풍 영화다. 그리고 현재 개봉중인 <맘마 미아>. 여기엔 어떤 향수가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복고풍. 왜 우리는 복고풍에 열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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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맘마 미아>를 보고나서 흥겨웠던 것은 너무 당연하게도, ABBA의 노래덕분이다. 영화를 보면서 평점을 주자면, 영화로서 평점은 과히 높히 주기 어렵다. 별5개중 3개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메릴 스트립의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보는 재미를 기점으로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돋보였던 장면은 'Super Trouper'를 부르면서 작은 공연을 하는 다이나모스의 장면이었다. 줄리 월터스, 크리스틴 바란스키와 반짝이 나팔의상을 입고 두껍고, 투박한 굽의 하이힐, 그리고 메릴 스트립의 눈가에 그려진 스모키 메이크업에 율동에 가까운 안무를 펼치면서 디너쇼를 펼치는 장면에서 나는 뭔가 탁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이 영화는 이렇게 즐겨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 반짝거리면서 바깥단으로 뻗어나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나팔의상을 보고 있으니, 왠지 저것이 정말 70년대의 문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내가 영화를 보다보니, 아 저것이 바로 나의 부모님 세대가 향유했던 문화라는 것이구나.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 엄마, 아버지를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메릴 스트립은 우리 엄마와 동갑이다. ㅡ.ㅡa)
영화를 주론 보는 계층은 20~30대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아바를 즐기는 것은 동시대의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향수와 역사속에서 기록 등을 통해서다. 물론 음악자체를 즐기는 부분도 있을 테지만, 우리가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왠지 그 안에서 우리 부모들이 젊었을 때, 즉, 젊은 엄마, 젊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맘마 미아>속의 이야기는 뭔가 그런 지점을 잘 살려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시작은 그렇게 간다. 자신의 결혼을 앞두고,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한 딸.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찾고자, 무조건 3명의 후보를 모두 결혼식에 초대를 해버린다.(물론 엄마가 보낸 것처럼.) 그리고 결혼식 준비 와중에서 엄마 역시 자신의 옛 남자들을 모두 만나게 되고, 엄마는 순식간에 젊었을 적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금요일이면 놀기 위해 클럽을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댄싱 퀸'이 되고, 친구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 'Super Trouper'가 된다. 젊었을 적의 엄마가 되살아난 셈이다. 고스란히 나이만 더 먹은 세 명의 아빠, 세 명의 엄마가 젊은 모습으로 애정행각과 삶을 즐긴다. 이게 우리들의 부모를 만나는 방법이다.
(한편, A TEENS라는 스웨덴 그룹이 있다. 아바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젊은 친구들, 멤버구성도 비슷하고, 정말로 아바의 자식들이 부모의 노래를 재현하는 느낌이랄까?)

엄마, 아버지를 위한 영화표를 2장 더 샀음은 너무 당연한 거다. 비록 당시의 나의 부모님은 아바를 즐기지도, 음악을 즐기지도 못한 개발경제하의 순진한 일꾼 가족에 불과했지만..... 왠지 멀리서나마 길거리에서 들었을 아바의 음악을 다시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복고풍이 나에겐 이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영화 <맘마 미아>에 나오는 다이나모스의 "Super Troupers"
(여담이지만, 크리스틴 바란스키는 왠지 제이미 리 커티스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
(또 하나, 메릴 스트립의 스모키 메이크업, 정말 멋지지 않은가? 우리의 엄마들에게 저렇게 멋진 모습을 연출해 드리고 싶다.)

이번엔 아바의 "Super Troupers"


80년대말~90년대초의 한국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듯. 앵글봐라, 옆모습 하나도 없다.
'슈밥바'인지 '트루펍버'인지.. 코러스 완전 신난다. 아싸!

또, 아래는 A TEENS의 "Super Troupers"

이젠 그들조차 TEENager는 아닌 듯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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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마 스튜디오에 관해서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들이 서울에 왔다.

<톡식 어벤져>시리즈와 최근작 <폴트리가이스트>.
B급이란 이런 것이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른바 '난 사람'들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거의 좌절의 바닥을 헤엄치다 못해,
그들의 영화에 나오는 화장실에 내가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토록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녕 그들의 능력이며, 명랑함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B급영화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생산되고 있지만,
항상 되풀이 되는 이야기는 과연 "B급"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더욱이 B급 영화의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한국 영화판에서, B급이라는 단어는 다시금 정의해야 할 지도 모른다. 99년이었나,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영화잡지 <키노>에서 박찬욱, 류승완, 오승욱, 임필성 등이 대담을 나눈 기사도 있다.
요즘의 한국영화는 참 희한하다.
로이드 카우프만의 말 그대로 "주류영화사들이 비주류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비주류영화와 B급 영화는 조금은 다른 단어가 아닐까? 한국 영화에는 비주류영화라기보다는 비주류의 감성들이 조금씩 가미되고 있을 뿐이다. 엄연하게 B급영화의 시장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80~90년대에는 비디오 시장에서 그것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오프라인 렌탈샵이 망해가고, 그러는 가운데 B급영화 시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것이 헐리우드의 "B급영화"와는 또 달랐던 영화들이지만...)
어찌 되었든 다시 돌아와서, "B급"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B급"은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떠한 '컨셉'이거나 '장르'이기 보다는 '정신'에 가깝다. 자본의 크기, 혹은 성향 등과는 관계없이 B급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오히려 영화를 떠나서 김규항의 <B급 좌파>, 또는 우석훈이 스스로를 'C급 경제학자'라고 칭하는 단어들과 더 가깝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글쎄... 본디에 인문사회학적 소양이 깊지않은 나 인지라 그것을 정확히 진단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설명하는데 노력을 해보자면....
주류사회(영화, 학자)들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숨기고, 부끄러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통렬한 풍자를 통해 지적하는 방식. 그리고 양식 혹은 방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나 문법 혹은 거동(습속 등을 포함해서) 등에 전혀 반대의 방법 혹은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복을 기도하는 것 등이 B급 정신 혹은 양식에 포함되는 것들일 거다.
물론 용어는 굉장히 포괄적이라서 다른 부분도 더 있을 것이다.
실제로 B급이 '컨셉'일 수도 있는 것이다. 뭐 아니라면 어떠랴??

B급 정신의 진수는 '나는 이렇다... 어쩔래? 넌 아니냐? 그럼 말아라..' 쯤의 태도가 아닐까?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같이 놀아보겠다는 태도. 뭐 어떻게 보면 편협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것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협하달 수 밖에...
A급 따위는 통렬하게 부수고, 놀리고, 갖고 놀아버리는 그들의 유쾌함은 정말 훔칠 수만 있다면, 훔쳐버리고 싶다. 물론 왠지 그 녹색의 구토물 등을 좀 닦고서 ...

현재까지 <트로마 in 서울>에서 본 영화들은.
<톡식 어벤져 4 : 시티즌 톡시>
<트로미오와 줄리엣>
<폴트리가이스트>
<카니발 더 뮤지컬>
이렇게 4편이다.

영화들을 한 편씩 리뷰를 쓰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위와같이 글을 시작했다.
그냥 기분상 이중에 정말 신났던 것을 꼽자면, 오히려 <트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고전적인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오고, 환타지를 가미하고, 결말을 전복시켜버리는 거침없음에 박수를 보낸다.

왠만큼 마음의 준비도 했고, 왠만큼 자극에 익숙하다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름 근작인 <폴트리가이스트>를 보면서, 꾸엑꾸엑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인분이 난무하고, 성기가 기이하게 변하는 상황들을 보고 있노라면, ㅋㅋ. 자연적으로 고개가 조금은 돌아가더라.
아직도 뭔가 내 안에 이상한 윤리나 도덕 혹은 어떤 질서와 평형에 대한 것들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일까.
하긴 신체훼손이라는 것은 언제나 공포의 느낌을 가져온다.
그러나 트로마의 재능은 그 공포감 안에 어떤 유쾌함과 신랄함이 같이 담겨온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세상은 계속 나빠지고, 뭐랄까 뉴스만 보면 토나오는 일의 연속이다.
이럴 때일수록 좀 하드코어한 자극을 영화관안에서 좀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다.
게다가 이들의 영화는 단순히 하드코어함을 넘어서 명랑하고,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현실과 어떻게 싸워야할지 혹은 어떻게 넘어야 할지에 대한 방법도 깨달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8월 14일까지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이다.
놓치지 말 것.
하하하하.


ps. 영화 한 편에 대한 리뷰를 안 쓰려고 했지만..
왠지 <폴트리가이스트>와 <패스트푸드 네이션>과의 비교를 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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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된다!

다들 많이 들어 본 얘기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혹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태도에 따라서 이 문장은
체념적으로 들리기도, 강렬하게 들리기도, 가치중립적인 느낌으로 들리기도 한다.

뻔하게도 역사는 단순히 한 민족, 국가 안에서 되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간을 옮기고, 또 거기서 시간을 옮겨서 다시 되풀이된다.
일단 이유는 차치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앞뒤 정황을 얘기해보자면...

<존 레논 컨피덴셜>.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틀즈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존 레논의 독보적 행보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단순히 '반전운동'을 했다는 행적으로 나름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레논은 낯선 존재이다. 언제나 남의 나라의 위인들은 '일화'로써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비틀즈의 입장에서는 60년대 말,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멤버들간의 불화 및 음악 노선의 변화로 이미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오노 요코가 있다. 그리고 존 레논은 일단 요코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도약을 한다. 68년도를 거치면서 전 세계는 이미 들썩들썩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베트남전은 발발했다. 20세기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 사회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존 레논을 낳았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냉전의 대리전으로써 진행된 베트남전 시기에 요코와 레논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 사이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단 하나 '평화'다.
이미 비틀즈 시기에서 거침없는 발언을 하곤 했던 레논. 세상은 연예인 조차 가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요코와 신혼여행을 아예 '침대 시위'로 변모시킨다. 수년간 대중의 우상으로써 군림한 레논은 그에게 가해지는 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를 적극 이용해서 세상에 거침없이 '평화를 택하라'고 소리친다. 그들의 침대 시위는 정녕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미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찾아온 미디어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며,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다름이 아니라, 레논과 요코가 전 세계 11개 도시에 "War is over"라는 짧고 굵은 메시지를 닮은 포스터를 붙였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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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메시지를 붙였다.
자세히 보면(아니 대충 봐도) "if you want it /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라고 적힌 이 문구.
TV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는 그 포스터를 붙이는 작업의 돈은 어디서 나와서 쓰냐고 묻는다. 레논은 당당하게 '지금은 우리의 주머니(pocket)에서 나온다'라고 대답한다.
어떤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레논과 요코는 자신들의 돈을 털어서 11개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저 메시지를 뿌리고 있었다. 저 메시지를 읽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이 바로 "John & Yoko"가 원하던 당신(YOU)이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미국 내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극도의 패권주의자였던 닉슨과 그의 공화당. 한편 존과 요코는 공화당의 전당대회를 따라 다니면서, 그 곁에서 평화콘서트를 주최한다. 한편, FBI국장이던 에드가 후버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한다. 흑인들의 급진당이었던 블랙팬더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인권 운동을 주창한다. 그러는 가운데 마틴 루터킹은 암살을 당한다. 이러한 장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72년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존과 요코는 절대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계속한다. 백악관 주변에서 반전평화론자들이 촛불시위를 펼치고, 닉슨은 촛불시위를 축구경기 구경하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지저분한 방법으로 존과 요코를 추방하려 한다. 체류 비자를 연장해주지 않음으로써 강제 추방을 하려고 하지만, 존과 요코는 이에 대해서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수년이 걸리는 사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고, 존과 요코는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한다.
이후 영화는 투쟁에 승리한 존과 요코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잠시 이어간다. 결국 80년 12월 9일 데이비드 채프먼에 의해 권총 암살을 당하는 걸로 생을 마감하는 존 레논.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영화를 보면서 섬찟한 것은 이 역사가 고스란히 2008년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닉슨은 이명박, 에드가 후버는 어청수, 베트남전은 쇠고기 정국, 미국의 보수기독교는 한국의 보수기독교, 반전행동의 촛불은 시청앞 촛불, 관련한 수배자들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은 2008년 한국에는 '존과 요코'가 없다.
앙꼬없는 찐빵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불만이 아니라 일종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존은 <Happy Xmas (war is over)>, <Give peace a chance>, <Power to the people>, <Imagine>, <Love> 등의 노래를 만들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고, 민중들 역시 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더욱 힘을 모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리에겐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노래가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대칭항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윤민석 이라는 민중가요 작곡가가 만들었다. 이 노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다름을 얘기하는 것이다. 존의 노래들은 메시지도 강렬하지만, 존 스스로가 원래 대중가수였고, 그의 의식이 발전하여 예술가가 되었고, 다시 사회참여로 이어진 경우인 거다. 그가 가지는 파급력은 단순한 호응과 집결을 넘어서, 예술적 승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힘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레논의 노래를 부르면서 정치적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의 힘에 감복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정말로 "If you want it"라는 말을 보고 어떻게 원하지 않겠는가? 전쟁이 정말로 끝나기를 원한다면, 노래를 부르면서 옆사람의 손을 잡고, 군인들의 총부리에 꽃을 꽂으면서 '사랑'으로 감싸안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존과 요코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어떤 분야의 누군가가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또는 준비한다고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나라의 문화가 결국에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여 '존과 요코'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일 뿐이다. 좀 더 다르게 얘기해봐도 그래봤자 수많은 '예술가'들의 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안에서 어떤 영웅을 만들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잘못 택한 길이 될 거라 믿는다.

존은 스스로가 이렇게 노래한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
from <Imagine>
간단히 말하면, 함께 하자, 연대하자 쯤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나도 친구이고 평등한 관계로서 인간의 본연한 마음으로 만나서 함께 하자는 거다. 패권 따위일랑은, 나만이 잘살겠다는 욕심일랑은 버리고 같이 살자고 말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말그대로 당신이 원하면...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된다.

서글픔만을 따져서 본다면, 분명 우리는 아직 '존과 요코'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산 '존과 요코'를 만들거나 기다릴 것인가라면 그건 아닌것 같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일단 이 영화를 보고, 존과 요코의 노래를 듣고 생각해보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서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하는 거다. 진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해야할 일은
저 위의 사진...
마지막 줄에 쓰인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 옆에 당신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다.


<Give peace a chance>
처음에 나오는 장면은 존과 요코가 침대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호텔방에서 콘서트를 하는 장면이다.
뒤에 'Hair Peace', 'Bed Peace'라고 쓰인 문구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자신의 자료화면을 내보낼때 'PEACE'라는 문구를 꼭 내보라고 했다.


<Happy Xmas (War is over)>
존과 요코의 메시지의 마지막에 우리의 이름들을 적어놓고 전세계를 누비는 투어를 시작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피스보트가 출발한다면, 나의 이름을 같이 적어주기를.. 그 피스보트에 붙일 메시지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꼭 선물하겠다.


<Love>
존과 요코의 사랑인 듯 하지만,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래서 강렬하다.
우리의 이야기다.



<Power to the people>
민중에게, 시민에게 권력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촛불을 꺼트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나가자구요.
대한민국의 '존 레논'은 어떤 사람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일단 당신의 마음에 있구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서로서로 보여주고 나눠주고, 더욱더 키워나가면 그 곳에 '존과 요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슷한 사람도 나오리라 믿습니다. 순진한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ps.
또 다른 혁명영웅이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한마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존의 노래 <Imagine>의 가사와 놀랍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다.

뭐랄까 체와 레논은 만난적이 있을까? 어찌되었건 천상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만났겠지.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ps2.
영화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 칼 번스타인은 <힐러리의 삶>의 저자이며, 닉슨을 하야 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대우자동차 CF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통령의 음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인물이다.
그외에 노암 촘스키, 타릭 알리, 월터 크롱카이트 등도 인터뷰이로 나온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영화도 보고, 더 찾아보는 기쁨을 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