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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6년째 연애중'인 다진(김하늘)과 재영(윤계상)의 연애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제목이 아니다.

이 영화는 간단히 말해 '연애'에 관한 '메타담론'으로 이루어진다.

그 메타적인 제목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이 글의 "제목"이다.

물론 특수성이 언제나 작용한다고 선언(!)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의 연애라는 것이 기실 요즘의 88만원 세대에게 가깝거나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Film2.0의 인터뷰에도 나오듯, 박현진 감독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 속하기 보다는 그 앞전의 X세대 혹은 Y(또는 N일수도) 세대에 더 가까운 감성을 지닌 사람일 거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 인식에 관한 출발점이 살짝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바라봐져야 한다.

좋다.

그렇다면 (살아가야할) 현실과는 다르게 (사랑에 관한) 현실만을 놓고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전적으로 그들의 6년이라는 시간의 연애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영화적으로 의미 있는가 또는 정말로 그들의 마음이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떤 관객이 나의 딴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싸울 생각도 없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스스로가 공감한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사람들은 각자가 수용의 폭도, 방향도, 성격도 다른 법이다.

1. 6년이라는 시간의 퇴적? 그리고 공감?

6년의 연애를 하는 사람은 전체의 표본에서 본다면 많지는 않을 것이다.(21세기이지 않은가? 엉덩이와 거시기 먼저 부비다가 자고, 그걸로 연애 시작하는 사람도 많고, 그것이 며칠 맞지 않으면 헤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사실 연애란, 하는 당사자들의 정치적 보수성 혹은 진보성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1차적으로 6년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나를 포함한 당신이 6년 동안 연애를 했다고 상상해보자. 지금 그 연애가 진행중이라면, 그 연애는 다분히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시작되어서 진행중인 셈이다. 간단하게 연애는 남녀간 감정교류를 통한 '교집합'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고1 수학시간에 집합론을 배우게 되므로 크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라 판단한다. 누구라도 정석의 초반부 집합론을 열심히 안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있다면 중학생쯤?

집합의 영역의 속성으로 따졌을 때, 교집합과 여집합, 그리고 합집합이 존재한다. 결국 집합 '다진'과 집합 '재영'은 처음에는 공집합이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접점을 만들었을 거다.(갑자기 도형의 방정식) 그리고 그것들은 중심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공유하는 영역, 즉 교집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집합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숨쉬게 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6년의 시간은 그 교집합을 서로 키우고 조절하면서 둘 사이의 중심거리를 결정하는데 쓰여졌을 거다.

그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고, 전제로 정해진 바로 옆집에서 살아가는 연인이다.

그러나 이 전제부터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각자 독립해서 살아가는 1인 가정의 사람들이고, 젊은 연인들이 연애를 오래하면서 유지하는 거리가 바로 이웃해서 사는 거라니? 물론 이 영화의 출발점이 그 곳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기획부터가 이미 부서졌을 테지만, 영화는 뻔뻔하게 그것을 설득할 수 없으니 첫 장면에서 그것을 제시하고 나중에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의 대사로 관객에게 영화를 '주입'한다. 어찌되었건 '서로의 프라이버시'는 각자의 여집합이자 차집합이 된다. 그리고 이내 각자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차집합은 결국 교집합을 건드리고 이내 다시 교집합이 공집합이 되는 상태로 돌아간다. 전제는 그렇다 치고 영화의 방향은 뻔한 셈이다.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라고 쓰며 기존 로맨틱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영화를 읽어내는 지점에서 무책임함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물렁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몇몇의 얄싹한 대사 말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이 영화로써 존재하는 것은 내겐 글쎄올시다. 억지로 두 사람의 이웃해 살기를 인정한다 치고 출발해보자. 뭐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영화를 따라가려 해도, 두 사람간의 현실에는 어떠한 6년의 시간이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것은 '내가 투명인간이냐'나 '이제 여동생같고 딸같다'라는 대사말고 무엇을 근거하는가? 단지 외식보다 집에서 밥해먹는거, 가끔은 자기집이 아니라 편하게 애인집에 들이닥치는 거, 회식에서 술먹고 불러내서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6년'이라는 시간의 대의성을 갖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이지 않은가? 두 사람이 6년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혹은 겪어보았을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이 영화의 6년짜리 교집합은 불량품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영화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나 하면서 생각해본다. 얼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똑같은 시간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의 감정과 거리감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보여지는가를 말하려는 거다.) 그 영화에서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는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강릉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것에 대한 묘사 중에 은수는 신문지를 깔고 발톱을 깍고, 상우는 티비를 보고 있다가 라면을 끓여먹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간의 심리적 가까움과 편안함이다. 만약에 6년의 시간이 더해진다면, 그 깎은 발톱을 상대의 얼굴에 들이대는 장난도 하지 않을까? 그러한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보여주고, 그것이 다시 6년째 연애중이라는 특수성의 대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6년째 연애중>에는 그러한 시간의 퇴적에서 오는 두 사람의 감정 상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위에 슬몃 얘기한 것은 컨셉에 맞게 상상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사실 정말 보편적이지 않은 주거형태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6년이라는 시간을 연애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6개월 전에 곁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나란히 살게 된 두 사람이 가진 과거와 그들의 이야기는 좀 더 날카롭게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는 정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1년만 연애해도 다 겪게 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6년쯤 연애를 하면, 상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익숙함이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철학도 바뀌는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것을 반영하기는 커녕, 90년의 감수성과 그 상식으로 90년대적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연인을 그려낼 뿐이다. 그러면서 21세기의 관객에게 공감하고 이해받기를 강요한다. 이 쯤되면 좀 뻔뻔한 거 아닌가?

2. 연애의 진보성? 보수성? 설득되지 않는 21세기적 봉합!

수많은 커플들이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있다. 왜냐고? 배우자 혹은 연인의 바람끼 때문이다. 보통 바람이란 걸리기 전에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걸리지 않는 바람이란 너무너무 적어서 정녕 걸리지 않고 바람피우는 사람은 거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21세기에 들어서 연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또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진과 재영은 모두 다 바람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보수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에 관한 문제도 캐릭터에 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다진도, 재영도 굉장히 밋밋한 캐릭터들이다.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특이점을 보이기 보다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 즉 외연에서 비롯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수준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물들에게 어떤 강력한 행동력을 기대하는 것도 분명 무리수다. 강철중도 아닌데...

그래서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물들의 욕망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작은 욕망들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인물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돈에 대해서 강한 동인도 없고, 각자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들을 적극 수용한다거나, 하룻밤에 충실한 리비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연인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지도 않는다. 아... 그렇다면 그들의 옅디 옅은 감정의 굴곡을 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작은 지점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그것들은 위에 얘기했다시피 피상적으로 넘어간다.

연애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냐 아니냐, 또는 일부일처주의자나 아니냐를 놓고서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라고 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느 정도 비약이 있을테니. 하지만, 분명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렇다면 캐릭터들의 행동들에서 얘기하는 진보성, 보수성이 아니라 감독이 연애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냥 애매모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영화의 결말부분에 가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클라이막스에 가면 그들은 분명 헤어진 것이다. 6년째 연애중이라는 제목에서 예견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 말의 이면을 들고서 구성한 클라이막스다. 결국 재영은 다진의 언어(빠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재영은 여전히 뻔한 이야기(랑그)를 반복한다. 끝내 다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영역을 돌아보는 것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연애 영화의 전형성이고, 보수적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다시 에필로그에 가서 더욱 어이없어진다. 각자 이웃해 살던 집을 정리하고 다시금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이는 정녕 아이러니다. 영화는, 감독은 이것을 필연 혹은 숙명적이라고 표현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녕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랑그를 앞세워서 얘기한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 헤어져야 한다. 결국 소통되지 않고서 각자 발걸음을 바꾸어서 간다. 걸어가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도착하는 문자메시지!!(이것도 정녕 편지인가? 제 때 도착하는 편지!!) 그리고 그 안에는 둘이 행복했던 시절에 주고 받았던 이야기와 둘이 못내 그리고 싶어했던 곱게 늙은 커플의 사진이 담겨있다. (아 얼마나 21세기적이고, 새로운 기술의 위력인가!!) 이것 한 방으로 그동안에 멀어졌던, 이해하지 못했던 크레바는 순식간에 봉합되고, 뒤돌아서 뛰어온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한다. 정녕 21세기적이고도 순식간에 강력한 드라이아이스 분무식의 봉합이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날카로운 메스를 담고 있다. 수술을 너무 급하게 끝낸 나머지 메스를 미처 꺼내지 못하고 봉합해 버린 거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앞으로 몇 년을 연애 중‘일’지도 모른다. 아주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정녕 사진속의 늙은 커플 처럼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단기적으로 내일은 만나고, 혹은 이번에는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것을 충분히 읽어내고서 모호한 결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본 분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