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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한 <안녕? 허대짜 수짜님!>을 보았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기획한 극영화이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해 왔던 노뉴단의 첫 장편 극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가질만 하다.
자 그렇다면... 영화는?

노-노 갈등의 문제를 제기하다.


90년대 초반의 <파업전야>를 기억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고, 공안정국의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 노동현장 및 각 대학에서의 상영을 진행했던 엄청난 영화다. 민주화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엔 여전히 사회적 분위기가 엄숙하기도 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열망들이 만나서 완성되었던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스탭들은 현재 충무로의 각지에 뻗어나가 영화를 하고 있고, 90년대의 중반 학번이었던 나조차 공대 지하의 어느 강의실에서 쉬쉬하면서 겨우 보았던 영화이다. 그 <파업전야>의 그림자가 21세기에 다시 드리워졌다.

<파업전야>와 <안녕? 허대짜 수짜님!>(이하 <허대수>)님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거리감만큼이나 너무나 다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동영화'라는 단어를 쓴다면 하나의 궤를 이룬다고 할 수 있지만, 두 편의 영화를 안으로 들어가서 본다면, 그것은 정말로 판이하게 다르다.
갈등의 소재가 '노-사'였던 <파업전야>, 그러나 IMF이후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친 대한민국은 새로운 신조어 '비정규직'이 등장하고 이것은 다시 '노-노'(정규직-비정규직)갈등을 만들어냈다. 이게 현재 21세기의 가장 극렬한 초상이다.
이는 분명히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에 신자유주의의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란 여전히 '서민' 옆에 붙어있는 단어이며, 그것은 결국 외적으로 양적팽창을 중심으로 내적인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섬찟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의외로 익숙하다. 현재 이미 현대자동차 노조는 신차조립라인의 투입을 앞두고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고, 거기서 주인공인 허대수는 정규직 노조 대의원으로써 사측과 협상의 주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200명 감축안을 20명의 비정규직 감축안으로 협상성과(?)를 이뤄낸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 노조는 투쟁을 계속하고 그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런 가운데 딸이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우연히 딸이 사귀는 남자가 비정규직 노조 투쟁에 앞장선 세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대해서 딸을 생각한답시고, 거짓말로 아픈 척을 하고 딸은 잠시 결혼얘기를 접는다. 게다가 세희는 계속 마음에 들지 않는 가운데 실제로 디스크 진단을 받는다. 한편, 처남의 실수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고, 결국 아버지를 철썩같이 따르고 존경했던 딸 연희는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집을 나간다. 그래도 세희는 대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딸을 찾아 세희를 쫗았던 대수는 옛날 직장동료였던 영조를 만난다. 98년 대투쟁때 영조를 외면했던 대수. 그리고 그의 재해 진단은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다. 망연하게 공장에 서있던 대수는 갑자기 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때 세희가 대수를 구하려다 같이 다친다. 둘은 어줍잖은 화해를 하게 되고, 세희는 좀 더 강한 투쟁을 해야한다고 마음먹지만, 대수는 절대 안된다고 세희를 말린다. 그리고 퇴원후 대수는 마음을 바꿔먹고 사측과 재협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다. 쉽진 않지만,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힘을 합쳐 사측과의 협상에 성공하고 세희, 연희는 결혼한다. 그리고 예쁜 딸을 얻는다.
영화는 손녀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

대충 내용은 이렇다. 익숙한 TV드라마 같은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사실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해결이 난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 새로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원인에 대한 고찰 부족.

영화가 진정으로 얘기하고자 한 지점은 어디일까?
정말로 노-노 갈등을 다루고자 한 것인가? 노-노 갈등이라면, 그 안에서 무엇을 문제로 제기하고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과정까지가 주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노-노 갈등의 출발점은 사실 IMF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다. 사실은 매우 고전적인 수법이라고 봐야한다. 중세 사회에서 지주와 농노(혹은 소작농)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름'이라는 특별한 지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노사관계에서 끼어있는 정규직인 셈이다. 이런 것을 '분리주의'라고 한다. 분리주의는 계급적이기도 하고, 민족적이기도 하다. 물론 계급적인 차원이 더욱 심각하고, 만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용자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불만들을 완충시키기 위해서 중간자를 두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들에게 돌아가야 할 저항은 중간에서 흡수되어버린다. 바로 허대수가 처한 상황처럼 ...
여기에 대항할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은 바로 노-노 갈등을 노-노 '연대'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방법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은 핵심이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을 그렇게 쉽게 던지더라도 그 현실 안으로 들어가면, 매우 첨예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파이 영화에서 가족들을 볼모로 잡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잡는 것도 그러한 이유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명분은 약자에게 있다. 그러나 실리는 강자에게 붙어야만 생긴다. 즉, 기본적으로 희생정신이 생기지 않고서는 거의 이러한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어내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허대수>는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가? 이 영화의 기획의 출발점이 바로 현대 자동차 정규직 사내방송에서 시작했다면, 더더욱 그 갈등의 시작점과 중간 과정, 그리고 그것이 어떤식으로 해결이 나는지에 대해서 더욱 주목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지점에서 허대수가 마음을 바꾸고, 재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비정규직노조와 정규직 노조가 텐트앞에 모여들어 웃으면서 끝이난다. 그리고 정작 해야할 이야기는 애니매이션 부분에서 해설로써 끝을 맺는다.  결국 영화는 그냥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연대해야 해!'라는 '선언'만 한 셈이고,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영화의 아버지격인 <파업전야>에서 조차 시나리오는 훨씬 뛰어나다. 단지 노-사문제에서만 하더라도, 내적 약점을 가진 자를 포섭하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갈등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노-노 간의 갈등은 단순히 친구(영조)에게 잘못했던 자신의 과오, 그리고 딸과의 관계, 세희의 인간성 등으로 손쉽게 그 갈등을 봉합해버리고 만다. 해결은 가족주의다. 사실 이 부분에 난 노동영화는 사실 퇴행했다고 느꼈다.
이는 단순히 감독이 현대 자동차 노조에 대해서 얼마만큼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회를 보는 틀에 있어서 너무 순진한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알면서도 뭔가 한계에 봉착한 나머지 외면을 해버린 것일까?
어쩌면,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플롯이 잘 섞이지 않아서 일까?

영화적 재미?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을 찾는다면, 바로 의사 캐릭터가 아닐까? 대수에게 디스크 진단을 내리는 의사야말로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다. 그에게는 어떠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재해진단을 자주 접한 의사로서의 본연의 건조함만 남아있다.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의사로써의 따뜻한 인간미 따위는 세세하게 가지지 않고, 오로지 사실의 진단을 내리는 데에만 집중한다. 영화는 사실 여기서 가장 영화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오히려 이쪽에서 좀 더 재미난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매일매일 아픈 사람을 상대하고, 똑같은 조끼를 입는 사람만 보는 의사는 당연하게도 삶이 별다를 것이 없을테고, 그런 가운데 새로이 나타나는 환자들에게 인간적인 교감을 하기는 커녕, 정확히 진단해주는 것만이어도 어디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산업재해 문제를 좀 더 깊이 가져가서 재해 진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를 가진 사람으로 끌어올렸다면, 노-사간의 문제에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기서 허대수는 자신이 돕지 못했던 영조와의 문제, 거기서 사실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문제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예전에 친구를 돕지 못했던 자가, 지금 와서 자신이 같은 처지에 처하는 아이러니에 방점을 맞추었다면, 그리고 다른 비정규직인 세희 혹은 사측에서 나오는 어떤 인물들이 허대수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플롯이 있었다면 영화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에 영화적 드라마란 인물에 대해서 관객이 얼마나 밀착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감동과 정서가 통용될 것이고, 더더욱 원래 기획의도에 부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외에..
이 영화의 편집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유림은, 단편에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또 다른 감독이다. 그는 <크레인, 제4도크>, <낫시리아>, <새끼여우> 등의 자신의 단편에서 더 깊숙한 노동영화의 한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노동영화의 전적인 스타일 혹은 드라마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새로운 감수성을 담아내고 있는 가능성있는 감독이다. 그가 <허대수>의 편집을 맡았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더 뛰어넘는 노동영화를 기다리며..
세상의 결국 계급의 분화가 마치 아메바의 분열만큼이나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분화하는 세상속에서 각 계급의 입장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다면화할 것이다. 누구는 언제나 갑이고, 누구는 언제나 을일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최상과 최하는 큰 요동이 없겠지만, 중산층이 몰락하고, 중간 관리자들이 여러 문제에 부딪쳐서 갈려나가고 하는 와중에 중간계급의 몰락과정에서 그 자신들은 '갑'이 되고 싶어하지만 ,'을'일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개인적으로, 계급적으로 상황적으로 다양하게 펼쳐질 것임에 분명하다. 그럴수록 영화는 그리고 예술은 더욱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어서 그 면들을 아주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허대수>의 등장은 영화적인 아쉬움을 남긴다 하더라고, 현재의 시점에서 꼭 한번은 나왔어야 할 영화이며, 그것이 노동자 스스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좋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또 더 좋은 노동영화를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덧붙여..

김규항씨가 블로그에 올리던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계급01 : 우스운 건, 다들 ‘양극화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계급'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양극화라는 말은 계급적 격차가 커진다는 뜻이다.

계급02 : 세상은 공식적으로는 '국가(나 민족)'로, 실제론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계급03 : '계급의식'은 노인이 신문을 보기 위해 돋보기를 준비하듯,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계급04 : 대중들이 계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니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은, 사랑이 메마른 세상이니 사랑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계급05 : 계급을 인정하든 부인하든 계급이라는 말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누구나 계급에 속해 있다.


계급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때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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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마 스튜디오에 관해서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들이 서울에 왔다.

<톡식 어벤져>시리즈와 최근작 <폴트리가이스트>.
B급이란 이런 것이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른바 '난 사람'들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거의 좌절의 바닥을 헤엄치다 못해,
그들의 영화에 나오는 화장실에 내가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토록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녕 그들의 능력이며, 명랑함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B급영화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생산되고 있지만,
항상 되풀이 되는 이야기는 과연 "B급"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더욱이 B급 영화의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한국 영화판에서, B급이라는 단어는 다시금 정의해야 할 지도 모른다. 99년이었나,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영화잡지 <키노>에서 박찬욱, 류승완, 오승욱, 임필성 등이 대담을 나눈 기사도 있다.
요즘의 한국영화는 참 희한하다.
로이드 카우프만의 말 그대로 "주류영화사들이 비주류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비주류영화와 B급 영화는 조금은 다른 단어가 아닐까? 한국 영화에는 비주류영화라기보다는 비주류의 감성들이 조금씩 가미되고 있을 뿐이다. 엄연하게 B급영화의 시장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80~90년대에는 비디오 시장에서 그것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오프라인 렌탈샵이 망해가고, 그러는 가운데 B급영화 시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것이 헐리우드의 "B급영화"와는 또 달랐던 영화들이지만...)
어찌 되었든 다시 돌아와서, "B급"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B급"은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떠한 '컨셉'이거나 '장르'이기 보다는 '정신'에 가깝다. 자본의 크기, 혹은 성향 등과는 관계없이 B급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오히려 영화를 떠나서 김규항의 <B급 좌파>, 또는 우석훈이 스스로를 'C급 경제학자'라고 칭하는 단어들과 더 가깝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글쎄... 본디에 인문사회학적 소양이 깊지않은 나 인지라 그것을 정확히 진단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설명하는데 노력을 해보자면....
주류사회(영화, 학자)들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숨기고, 부끄러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통렬한 풍자를 통해 지적하는 방식. 그리고 양식 혹은 방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나 문법 혹은 거동(습속 등을 포함해서) 등에 전혀 반대의 방법 혹은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복을 기도하는 것 등이 B급 정신 혹은 양식에 포함되는 것들일 거다.
물론 용어는 굉장히 포괄적이라서 다른 부분도 더 있을 것이다.
실제로 B급이 '컨셉'일 수도 있는 것이다. 뭐 아니라면 어떠랴??

B급 정신의 진수는 '나는 이렇다... 어쩔래? 넌 아니냐? 그럼 말아라..' 쯤의 태도가 아닐까?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같이 놀아보겠다는 태도. 뭐 어떻게 보면 편협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것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협하달 수 밖에...
A급 따위는 통렬하게 부수고, 놀리고, 갖고 놀아버리는 그들의 유쾌함은 정말 훔칠 수만 있다면, 훔쳐버리고 싶다. 물론 왠지 그 녹색의 구토물 등을 좀 닦고서 ...

현재까지 <트로마 in 서울>에서 본 영화들은.
<톡식 어벤져 4 : 시티즌 톡시>
<트로미오와 줄리엣>
<폴트리가이스트>
<카니발 더 뮤지컬>
이렇게 4편이다.

영화들을 한 편씩 리뷰를 쓰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위와같이 글을 시작했다.
그냥 기분상 이중에 정말 신났던 것을 꼽자면, 오히려 <트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고전적인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오고, 환타지를 가미하고, 결말을 전복시켜버리는 거침없음에 박수를 보낸다.

왠만큼 마음의 준비도 했고, 왠만큼 자극에 익숙하다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름 근작인 <폴트리가이스트>를 보면서, 꾸엑꾸엑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인분이 난무하고, 성기가 기이하게 변하는 상황들을 보고 있노라면, ㅋㅋ. 자연적으로 고개가 조금은 돌아가더라.
아직도 뭔가 내 안에 이상한 윤리나 도덕 혹은 어떤 질서와 평형에 대한 것들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일까.
하긴 신체훼손이라는 것은 언제나 공포의 느낌을 가져온다.
그러나 트로마의 재능은 그 공포감 안에 어떤 유쾌함과 신랄함이 같이 담겨온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세상은 계속 나빠지고, 뭐랄까 뉴스만 보면 토나오는 일의 연속이다.
이럴 때일수록 좀 하드코어한 자극을 영화관안에서 좀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다.
게다가 이들의 영화는 단순히 하드코어함을 넘어서 명랑하고,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현실과 어떻게 싸워야할지 혹은 어떻게 넘어야 할지에 대한 방법도 깨달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8월 14일까지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이다.
놓치지 말 것.
하하하하.


ps. 영화 한 편에 대한 리뷰를 안 쓰려고 했지만..
왠지 <폴트리가이스트>와 <패스트푸드 네이션>과의 비교를 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인디스페이스 블로거 프렌드의 활동 시작!
그 첫번째가 바로 이 인디애니박스가 되겠다.

일단은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라는 거 미리 주지해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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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체 배경설명.
옴니버스라고 하지만, 어떤 특정한 주제가 있어서 그것을 관통한다거나, 배우(?)가 같다거나 하는 식도 아닌 그냥 단편의 묶음이라고 봐야겠다. 문화컨텐츠진흥원에서 지원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의 선정작들로 추정되고, 그중에 나름 독립애니메이션계에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세 감독의 작품들을 모은 셈이다.
하지만서도, 세 작품에는 동일하게 사용되는 소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풍선'이다. 극장에서 만나게 될 리플렛은 누가 디자인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풍선이 나오는 장면으로 앞면을 채웠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를 보면, 각자의 영화에서 사용되는 '풍선'의 역할은 모두 다르다
이건 뭐 잠시 여담삼아 하는 말이 되겠다.

일단 각 단편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

첫번째로, "미스터리 스릴러" <원티드>
세 작품 중에서 가장 동화적인 그림체를 갖고 있는 영화다. 몸통이 둥그렇고, 손발은 굉장히 가느다란 캐릭터들이 나온다. 마치 중세시대의 마을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등장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부극의 아이콘들을 많이 가져온다. 수배장이라던지, 마을의 길과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들이라던지.
초반부에 나오는 호기심이 조금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게 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내 곧 영화는 홍수라는 커다란 재난을 통해 엄청난 이입을 가져온다. 앞부분의 성긴 드라마와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는 사라진 듯 하다.) 어쨌든, 커다란 홍수(말그대로 재난)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오르게 한다. 이미 자막으로 보여주는 날짜는 1987년 7월의 시기를 알려줌으로써, 환타지적 세계와 현실적 이야기의 만남을 예고한다.(그래서 더더욱 재난영화로 보인다.) 그리고 그 재난에 대해서 대처하는 경찰과 관료의 모습은 당시(정말 '당시'만일까?) 한국 사회의 답답한 모습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이 은유하는 그것이다. (한편, 관료가 삽질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의 대통령이신 2MB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잠시 얘기를 딴 데로 새자면, 정말 이명박은 80년대 TV속의 한 장면에서 톡 튀어나온 사람같다.) 그리고 돌아와서 복구하는 세상. 말그대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이야기다.
일단 영화로써, <원티드>는 처음의 호기심이 장르의 변화로 인해 달라져 버린다. 앗, 감독의 fake인가? 그렇다면 감독 스스로가 이 장르는 fake요 하는 지점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음, 한 번 봐서 놓친걸까? 뭐 아무튼 그렇다는 말씀이다.
한편, 애니매이션으로써, 개성적으로 생긴 캐릭터들을 봄으로써 생기는 재미가 있다. 그것에 장르적인 부분이 동화처럼 펼쳐짐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컬함도 좋다.
한가지! '할머니'로 형상화한 '셀마'라는 캐릭터의 활용도가 좀 떨어지는 듯 하다. 약간의 아쉬움.
그러나 의도적으로 장르의 변주를 가져온 것이라면? 장르는 낚시고, 이면에 깔린 그 무언가를 보자면? 이 영화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해야할지도 모른다. 박수!!!!!

다음, "판타지 멜로" <무림일검의 사생활> (어제 본 상영에서는 순서가 이렇게 되었다.)
이미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보았던 작품인지라 반갑게 또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로 줄타기를 잘한다고 해야할까? 감독의 상상력와 장르의 전형들이 적당히 버무러져서 흘러간다. 멜로라는 굵은 동아줄 위에서 뛰노는 검객과 그의 애인이라고나 할까? 장형윤 감독의 재능은 바로 여기서 흘러나온다. 천연덕 스럽게 난 '애니메이션 감독'이요 하고 나오는 캐릭터들. 동물과 사물과 인간이 서로 대화하고, 변신하고 심지어 직업을 가진다. 크기는 자유자재인데다가, 서로가 뻔뻔하고, 단순한 감정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제목에서도 이미 줄타기는 예고되어있다. '무림일검'과 '사생활'이라니...
하지만, 영화는 절대적으로 감정과 감성 중심이기 때문에 거부감없이 따라서 보기 좋다. 게다가 그 순박함과 순정, 그리고 혜미의 쿨함과 쿨한 정서 안에서 여전히 순애보의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분히 현대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홍대 주변, 한강 주변, 낙안 읍성 주변 등등 실제 현실의 이미지들을 끌여들여와서 만든 장면들에서 왠지 익숙함과 함께 현실성에 더욱 참여도를 높이고 있다.
그의 전작들에서 이어져 오는 기발한 상상력과 단순하면서도 귀여운 그림체, 그리고 한발짝 한발짝씩 전진하는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당연히 흐뭇함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이 영화는 이미 다른 영화의 공간을 빌려오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로 추정된다.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에 나오는 가리봉동 쪽방의 난간과 옥상이 나온다. 뭐랄까. 이걸 찾아내는 나는 또 뭘까. ㅡㅡ; 어찌되었거나 반가웠다. 분명 마음에 드는 장면이기에 서로 빌려갔지 않았겠나.. ^^)

마지막으로, "블랙 코미디" <사랑은 단백질>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작품이다. 최규석의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각색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이 단편은 다음 작품인 <습지생태보고서>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만화가인 최규석. 특히 <습지생태보고서>는 리얼하면서, 그 이상으로 진솔한 캐릭터와 이야기. 그리고 유머가 가미되어있다. 그래서 더더욱 기대가 된 작품. 그런데 초반부에 나오는 크레딧에 익숙한 이름들이 나온다. 성우로 참여한 배우들 중에 양익준, 오정세가 있다. 독립영화계에서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면서, 연기력이 입증된 배우들이다. 기대가 되었다.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원화의 장면들을 고스란히 잘 살려내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진 시간으로 만화는 영화가 되었다. 강한 드라마를 갖고 가기 보다는 짧은 단편 안에서 각자의 캐릭터들이 잘 살아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듯. 배달온 돼지의 갈고리 손과 배갈린 돼지 저금통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걸 보노라면, 그의 다른 작품속 손가락 잘린 '공룡 둘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은 이토록 각박한 건가. 뿐만은 아니다. 캐릭터들의 계급성을 벗어나서 단순히 닭과 돼지의 등장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에 외국 플래시 애니매이션 <the Meatrix>라 떠오르는 지점도 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구안에 어디든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미덕은 '유머'인 셈이다. 감성은 분명 슬프게 가져가지만, 겉으로는 웃어야 하고, 웃음으로써 가져가야 할 심정적 괴리감을 '유머'로 만들어낸다. 복잡다단한 느낌을 말그대로 '승화'시키는 거다. 다시 한번 박수!!!


'인디'라는 것.
인디는 분명 '자본'의 종속성의 여부에서 나오는 정의일 거다. 그러나 이 애니매이션들에게 '인디'라는 단어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상상력'이라는 정의로 가야할 듯 하다. 저 너머 다른 '인디(아나 존스)'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뭔가를 욹워내려고 애쓰는 반면, 이 곳의 "인디"라는 단어는 이렇게 다른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뱀발.
옛날의 극장용 장편 애니매이션들은 분명 동화(動畵)라는 측면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말은 애니매이션을 그렸다는 느낌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즘의 애니매이션들은 분명 영화라는 측면에 가까운 듯하다. 분명 그렸는데, 카메라로 찍은 듯, 사실적 앵글들이 나온다. 또 하나의 장점의 측면에서 얘기하는 바다.
동화를 그리는 것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태도가 달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때로는 동화를 그려내는 자유로운 방식도 넘나들어야 하겠지만...
^^

강력추천합니다.

중앙 시네마에 있는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입니다.

영화, 그 자체를 찾는 여정.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작성자 : 정경록
- 날짜 : 10/26

1. ‘상실’을 이야기하다.
- 영화를 찾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독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상길(안길강 분)은 주구장창 영화를 찾고 있다. 독립적으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첫 시퀀스는 그 현실적인 어려움 안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드는 것(찾는 것,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그가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속초를 향하게 된다. ‘무정차’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무정차는 없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 안에서 운명적(!)인 여자를 만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후, 여자를 따라서 홀연히 여자의 동생찾기에 합류하는 상길. 여기까지 오면, 영화의 주제는 잘 드러난다. 상길의 사촌형과 숙모는 이산가족으로써,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여자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자 한다. 물론 상길은 자신의 영화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여자를 따라서 강원도의 탄광촌들을 다니던 상길은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물론 관객도). 사실 이 상황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태도와 진지함에 (혹은 뻔뻔함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제 영화는 단순히 내용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상실을 회복하려는 모습에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 영화를 욕망하다.
여자의 이름이 ‘영화’인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다. 내용 혹은 상황으로 상길이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그저 있는 이야기들 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바깥으로 보면, ‘감독은 영화를 욕망한다’는 철학적(?) 명제를 구현한 셈이 된다. 게다가 그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옛 탄광촌의 건물이다. 폐허 안에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찾기를 원하는 감독. 이 쯤 되면 사실 은유가 은유가 아니고, 이야기가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관객은 이 영화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지 물음표가 찍힌다. 감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 여자(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나서다.
결국 여자의 동생찾기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는 개발이나 자본에 의해 자신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탄광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을 오가는 동안에 상길은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속초에서의 자신의 기억 역시 탄광촌들과 다를바 없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개발과 자연의 사이, ‘거주호와 철거호’ 사이, 부산과 속초 사이, 속초와 탄광촌의 사이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 찾으려고 하는 노력만, 과정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된다. 정말로 개인지 늑대인지... 집을 나간 우리집 개인지, 자신의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는 야생의 늑대인지 구분할 수 조차 없다. 상길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다시 자신의 영화를 찾으려 편집실로 연락하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데뷔작)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2. 영화를 받치고 있는 이상한 징후들? 혹은 상징들?
이 영화는 내연의 이야기와 외연의 쇼트(혹은 구조, 또는 기호체계)들이 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상한 인상들을 남기고 있다. 먼저 가장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술집의 아저씨. 그 아저씨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횟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아저씨는 무언가를 초탈했거나 허무한 표정을 한 채로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상길의 일행의 건배에 박자를 맞추어서 혼자서 건배를 한다. 단독 쇼트와 롱샷 안에서의 포커스를 할애하면서 까지 영화는 그 인물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이 사람은 영화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아지. 속초에 도착해서 묵은 민박. 그 민박집에는 너무나도 귀엽게 ‘개밥’스러운 개밥을 먹는 하얀색의 강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살이 토실토실 오르기를 기대하는 주인이 있다. 이 영화에서 정녕 강아지라고 주장할 법한 하얀 강아지이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 함께 떠난 여정 중에 도계에서 만나게 되는 검은 강아지가 있다. (이 쇼트들은 카메라가 비추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시선과는 무관하며, 관객만이 알게 되는 전지적인 쇼트들이다.) 그러나 검은 강아지는 개가 아니라 ‘늑대’이다. 주인이 없고, 혼자서 버려진 쓰레기들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담고 있다.
폐허의 공간. 강원도에서 만나는 태백, 사북, 도계 등의 공간은 한동안 석탄 붐을 따라서 발전했지만, 광산들이 모두 폐광 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져버린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거기서 상길(감독)은 영화와 교합(!)한다. 마치 김기찬의 사진들(<서울 풍경>이라는 사진집)에 나오는 공간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꿈같다.

3. 감독론
전수일 감독을 논하는 데 있어서 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스토리텔러?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스타일리스트?인지는 전후작들을 더 살펴보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만을 놓고 그가 어떤 감독인지를 조심스럽게 논해본다면, 아무래도 그는 성긴 이야기 구조와 약한 드라마위에 독특한 징후들을 심어 놓는 데에서 영화를 세워나가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징후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계속적인 잔상을 남겨놓음으로 해서 어떤 영화적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이번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는 드라마와 시네마 사이에서의 고민점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길의 여행은 마치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여행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는 그래도 영화의 메인 플롯을 이루면서 마지막 시퀀스를 가능하게끔 했다. 결국에 숙모가 돌아가시고, 그가 다시 부산에서 속초를 향하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눈덮인 강원도의 한 골짜기에서 영화를 끝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것일까? 오히려 커다란 구조에서 영화를 강원도 여행을 둘러싸고서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한편의 완결된 형식의 구조를 갖고서, 그의 고민과 환상특급을 구현하는 쪽을 선택했다면 어떨까? 그것이 구조의 측면에서 <개와 늑대>를 형성해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를 놓고서 ‘만약’이라는 단서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설명불가능한 징후들을 형성하고 그것의 분위기를 더 이끌어내는 것이 구조와 특정 쇼트들을 기반으로 더욱 영화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수일 감독은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적인 이름, 제목, 쇼트들에서 매우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말그대로 이 영화를 완성한 시점에서 그의 결론과 일치할 것이다. 모호한 예술성을 근간으로 끝내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려고 한 점에서 그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