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투표 며칠전까지만 해도, 이명박이 당선되면 어떡하지? 하는 근심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그 며칠전부터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 같았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서, 가장 안 좋은 점은??
정말 어떤 누리꾼의 댓글마냥, 자유당 독재 시절 같은 암담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충분히 오바다.
정말 안좋은 점이라면 무엇보다도 딱 하나다.
진정으로 이 땅에서 도덕성 불감증의 시대(? 혹은 시기)가 도래하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 앞에서 고개를 들 면목이 없다는 것일테지..
FTA가 어쩌고, 부익부 빈익빈이 어쩌고 하는 것은 결국에 경제적 개념에 관한 것 뿐이다. 어찌되었거나 가장 시급한 것은 이 물질과 숫자 등의 계량화를 그만두고, 정신적 가치와 윤리 도덕을 회복하는 것이다. (과연 가능할지에 대해선 묻지마라, 이건 어떤 젊은 개인의 진단일 뿐이니깐..)

(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파악과 그에 대한 경제적 대안은 <88만원 세대>를 참고하기 바란다. 굉장히 날카롭고도, 정확한 분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러나 그 간극이 사실은 가장 걱정할 부분일테다. 요즘 대부분 젊은이들은 정신적 가치나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들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숫자로 치환하는데에 정신이 없다. 뉴스랍시고 나오는 것이 새만금 간척지가 600조원의 부가가치를 가지고 있다던지, 벌써부터 MB효과라면서 부동산 경기가 풀리며 집값상승에 대한 기대(?)를 환영하고 있다. 집값 상승에 대해서 하루아침에 뒤바뀐 평가를 보면 거참 말도 안나온다. 망할 보수언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이명박 당선은 우리에게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엄밀하게 진보적인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는 현실이 가장 슬픈 것이다. 그만큼 유권자들 스스로가 보수적 성향을 여지없이 내비친 것이며, 그들 스스로가 서민이면서 자신의 서민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부자들에게 투표해버린 말도 안되는 현실에서 더이상 슬퍼하지 말자. 일단 현실의 인식은 개인으로 자기 자신에서 슬퍼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히스테리를 부리지 말 것. 이명박이 당선되었다고 해서, 조금 덜 보수적인 시민들이 '이제 이민가야 하는 건가?'하는 말을 농반진반으로 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물론 그 개인에게 이민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해도 뭐라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명박이 된 것은 현실 정치를 바라봄에 있어서 슬퍼하기보다는 환영해야할 일임은 분명하다!

첫번째로, 이명박이 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범여권의 단결을 통해 정동영이 된다는 현실적 추측이 생긴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이명박 당선 이상의 커다란 폭탄임을 예측해야 한다. 대표적인 386세대들의 집결체인 대통합 민주신당은 그들이 언제나 개혁 민주세력이라는 정당성으로 떳떳하게 행세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간단히 말해 이제 더이상 민주화세력의 정당성은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만한 어떠한 매력포인트도 없다. 그들은 90년대에 들어서서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이 모든 제반에서 새로운 세력으로써, 수혈의 차원에서, 기득권을 급속히 쟁취했다. 그리고 그 기득권은 10여년 동안 더욱 공고해졌고, 앞으로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는 다시 말해 이어지는 뒷세대들의 진출을 막고 있고, 지들끼리 해먹는다는 말이 가장 쉽게 이 상황을 묘사하는 말일 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미FTA를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세력들이 바로 노무현계의 정치인들이고, 이 지점에 있어서는 극우 한나라당 역시 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가 획득한 이름이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라는 표현이 아니었던가? 이 말 조차도 사실 너무 어이없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정동영이 당선된다고 가정하면, 노무현 정부의 주요 정책에 대하여 정통성(?)을 잇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이럴 경우, 그들이 서민을 위하는 척 하는, 그리고 적어도 정치적인 정당성에 오인되는 선한 이미지나 정책적 정당성이 국민의 눈을 흐리는 데 계속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무현 정부 5년의 본질적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은 채 그 진행되는 끔찍한 사태를 앉아서 계속 당해야 한다는 거다. 여기서 가장 슬픈 것은 국민들의 히스테리다. 이 히스테리 중심엔 '국민소득 *만불'이라는 문구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2만불이건 3만불이건, 그 돈은 모두 국가적인 소득에는 포함되는 것이지만, 국민 개개인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돈이다. 그러나 이것이 히스테리인 이유는 그 돌아오지 않는 돈을 두고서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마치 자신이 부자가 된다고, 국가가 부강해진다고,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하는 착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히스테리는 정동영이 대통령이 되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든 차이가 없다.

두번째로,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을 그래도 환영해야 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경제, 사회, 정치적) 모순들이 급속하게 가속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악화가 더 빨리 구축되는데 이걸 왜 환영하냐고? 미친거 아니냐고? 간단히 말하면, 미친게 아니라 정말로 이 모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환영할 만한 일인 셈이다. 더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다. 역사는 가장 큰 틀에서 언제나 양화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당장 5년은 나락으로 치달을 지 모르지만, 이 단위를 한 세대(30년)단위로 보고, 세기 단위의 장기적 관점으로 간면, 앞으로 5년은 양화로 변하기 위한 잠시 뒷걸음질인 셈이다. 그리고 그 뒷걸음질이 정동영 보다 이명박의 당선이 좀 원시적이고, 단순하고, 극악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뒷걸음질에서 걸음의 방향을 바꾸는 데 더 낫다는 점이다.


한편,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댓가는 끔찍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뒷걸음질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히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된다. 그것에 대해서는 슬퍼해야 할 것이지만, 결국 우리가 잘못 뽑은 셈이니 어쩌랴 슬퍼하기 보다 담담하게 댓가를 치러나가야 할 것이다. 당장에 나오고 있는 경부운하 2011년 완공 목표의 계획, 그리고 그것이 착공이 시작되고 진척을 보이기 시작하면, 거기서 파낸 흙을 갖고서 새만금의 복토작업에 쓴답시고,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장기적으로 거기서 치러야 할 댓가가 엄청날 것이다. 경부운하는 이미 검토된 바에서 실용성 자체에 의구심을 갖고 있고, 그것을 차치하고서 가장 타당하게 반대해야할 이유가 우리가 마실 물을 운하로 사용함으로써, 당연히 물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환경의 오염이 예견된다. 혹시라도 이 상황에서 수돗물 불소화가 또 다시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서 생수회사의 배는 불려질테지..  잠시 이야기가 샜다. 다시 돌아와서 그리고 새만금을 그대로 계획대로 복토하고 간척지로서 끝내 마무리 짓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자연유산을 내버리는 셈이 된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커다란 갯벌이고, 동시에 그것은 아름다운 생태계의 표본이다. 또한 자연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어부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것이 단순히 간척해서 경제가치 600조라고 한다면, 사실 묻고 싶다. 어느 기간이며, 얼마만큼 기간동안에 발생할 경제 가치이고, 그것이 누구에게 돌아갈 경제 가치인지.. 정말로 제대로 검토한다면, 그 기간단위를 늘려서 볼 생각은 없는지? 장기적으로 새만금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생태공원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갯벌과 삶의 터전으로서 보존해가는 것이 더 큰 경제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에 정책을 세우고 이행하는 주체들이 근시안적으로 보고, 행동하는 데게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인 셈이다. 게다가 그들이 강력한 공권력을 앞세운 채 말도 안되는 논리로 자성의 목소리들을 탄압하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뻔히 보이는 것은 우리가 결국 치러야 할 댓가는 엄청나게 클 것이라는 예상이다.


끝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내 가져야 할 것은 객관이고, 냉정함이다. 여전히 근대화(뭔가 굉장히 학자적인 입장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진 단어가 아니다. 그냥 냉정하게 봐도 그렇다)를 이루지 못한 우리 사회는 정말 정념의 사회다. 그것이 가진 긍정적 영향도 분명히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건전하게 바뀌고, 생산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는 데에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 또한 정서적 따뜻함을 빙자한 판단의 혼란이다. 결국 이번에 우리는 도덕성과 관계없이 CEO로서 제조업 중심의 경제발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끝내 이것은 후세 길이 남을  역사적  실수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정녕 CEO로서 우리의 경제를 살릴 것이 아니라,  친 재벌적이고,  미국적 방식의  신자유주의 경제 속에 우리 모두를 무한경쟁의 개미지옥으로 몰아넣어서 결국 모두가 자멸하거나 (그것 조차 사실 쉽진 않을 테지만) IMF같은 국가적 경제 위기가 다시 한 번 찾아올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이제 더이상 당신들은 금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 더이상 당신들의 경제력을 팔아서 재벌들의 빚을 갚아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사실 이것도 결국엔 국민적 히스테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국가의 빚을, 재벌의 부도 사태를 자신들의 빚으로 착각한 정녕 어리석고 착한 백성들이 나서서 그들을 살려준 셈이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5년을 통과할 때는 조금이라도 냉정하게 판단하자. 그리고 힘들다고 슬퍼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다. 정확하게 판단하고 어떻게 움직일지를 생각하면 된다. 비록 우리가 치러야 할 댓가가 커서 그것에 대해서 슬퍼할 수 있지만, 보다 더 후회해야할 것은 언제나 힘든 현실이나 그 순간의 양상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선택임을 잘 생각해야 한다.


뱀발.
박정희때는 '그분'이라는 표현으로서 그를 지칭했다.
전두환때는 '각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노태우때는 '노태우 대통령'이라고 오히려 노말한 단어를 썼다.
김영삼, 김대중은 언제나 YS, DJ였다.
노무현때는 '놈현'이다...
이명박은 당선 전부터 'MB'라고 부른다. (혹시 보수 언론에서만?.. 다 살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왜 이렇게 부르는 걸까? 한 번 생각해보자.
(그냥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11월 4일. 영상자료원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프로그램.
글쎄, 일부러는 아니었는데... 다니다보니 독립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사실은 내 안에서 이미 뭔가 '다른' 것들을 원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지도.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속에 남는 이상한 이물감들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든다.
글도 못쓰고, 이러한 잡스런 글조차 다시 고쳐쓰는 버릇이 없는 나에게는 글쎄올시다.
이러한 글이 나에겐 일종의 "즉흥연기"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적 문제를 뱉어내고 남는 것은 차가운 이성의 사유일 것이다.
영화적 윤리? 윤리의 영화??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쟁점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스터이미지가 없어서.. 일단 옛날거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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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하여 - 어부로 살고 싶다]
2006|Documentary|DV|Color|75min
감독 이강길



1. 활동가로서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로서의 활동인가?

이 영화에서 화자의 태도는 굉장히 뜨겁다. 선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끓어넘치기 직전에 냄비 만큼의 온도를 갖고 있다.
누군가의 통곡하는 모습을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누구를 향해서, 무엇때문에 저토록 섧게 울고 있는가? 의문을 갖게 한 후 그것에 대한 답을 계속 유보한다. 그 답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다.
이후 물이 막혀서 말라가는 갯벌의 모습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마치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비슷한 체험을 가져온다. 그리고 말라가서 갯벌에서 기어져 나오는 동죽, 생합(조개류)들. 그것의 모습은 일순간 우리가 자연에게 어떠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인간으로 포커스를 옮겨온다. 계화도의 아침을 보여주면서, 분주하게 일을 준비하는 주민들을 따라서 우리는 계화도, 새만금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부로 살고싶다>는 3부작 연작의 제 3부격인지만, 각각은 독립된 주제를 갖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안을 관통하는 어부들의 삶과 인간다움에 대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토록 조용했던 계화도는 이제 물로 나가는 어부들과 갯벌로 채집을 나서는 사람들로 나뉘어져서 묘사된다. 그러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조제의 물막이 공사를 보여준다. 어찌보면 단순한 진영나누기? 이야기는 쉽게 펼쳐진다. 이른바 공사하는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계화도 주민들로 이분해서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대책위원회가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제도측을 오가면서 대화창구를 마련하고 작은 갈등들이 펼쳐진다. 물막이 공사가 점점 마무리를 향하고, 대책농성을 하던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이제 점점 힘든 싸움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여기서 이어지는 큰 문제는 주민들 내부에서의 갈등인 셈이다. 보상을 제대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과, 원칙적인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 그리고 마지막 공사를 앞두고서 해상시위가 이루어지고 거기서 언론들 앞에서 나서 인터뷰를 한 대책위원장은 결국 주민들의 의사를 모두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은근슬쩍 보상에 대한 말만을 언급하면서 내부적 갈등은 심화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장 뜨거운 화자가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는 감독은 가장 이질적인 형태로서 영화에 개입해서 들어온다. 느닷없이 영화를 만든이가 이야기에 참여해 올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선 느낌이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보면 낯섬보다도 델 것 같은 뜨거움이다. 하지만 끝내 영화안에서 인터뷰 장면을 돌려서 대책위원장의 거짓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인간적인 윤리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언제나 최전선에 있다. 각종 시위장면, 혹은 농성장에서 갈등의 가장 깊은 간극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담아내고, 이른바 자신이 있는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 자체가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편에 강하게 달라붙어 있다. 정치적인 활동!
그리고 이후 점점 남성들 사이에서 지쳐가는 싸움의 흐름은 여성들에게로 중심이 옮겨간다. 실리보다도 언제나 명분을 정확히 내세운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반박할 논제가 없다. 산자부의 사람들도 그녀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고작 '추운데 고생하시지 말고 이쪽으로 들어오셔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담당자들도 나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내부적인 분열과 이른바 중요한 순간에서 지지의 힘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결국 새만금 방조제는 마지막 트럭을 쏟아붓고야 만다. 그리고 펼쳐지는 태극기들. 이젠 태극기가 오염된 듯 하다.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새만금 간척 사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앞두고, 방조제가 완성된 그들의 기쁨이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어찌되었든 그들에게 갯벌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안에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발'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고, 기득권들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시 된 개발은 결국 또다시 태극기를 '전유'한다. 그 누구의 태극기인가? 효순이 미선이가 죽어가는 동안에 휘날렸던 붉은악마들의 태극기와 같은 태극기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가 하더니, 영화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류기화'씨의 죽음. 게다가 그 죽음마저 동죽들의 운명과 별다를것이 없다. 잠깐씩의 해수유통을 위해서 설치한 수문에서 어느날 갑자기 쏟아진 물에 휩쓸려 맞이한 죽음. 여기서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감독은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태도를 등장하는 이들과 삶을 합치시키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이루어낸 성과가 내부의 작은 균열들, 그리고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다시 새만금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 영화는 분명 활동가의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1차적으로 정서적인 문제에서는 성공적인 이야기전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좀 더 영악하게 활동으로 이어지는 문제는 다르게 생각해봐야 한다.


2. 객관화해서 더 들어가야할 영화

이 영화는 사실 앞서말한 화자의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는 영화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오히려 감동을 받되, 이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잘 떠오르지 않을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정서중심의 영화만들기가 흐릴 수밖에 없는 객관적 판단의 영역이다. 물론 감독이 무려 7년의 시간을 새만금에서 살아오면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영역의 사람들을 두고서 어떻게든 그 사람들을 누구는 나쁘고, 누구만 착하고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치하받아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누었던 QnA에서 하는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고, 이제 이 영화를 갖고서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것이 단순히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런이러한 상황이니 우리와 함께 해달라는 손내밈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 시선과 방식은 충분히 순진하고, 순박하다. 글쎄 21세기의 다큐멘터리적 선동(?)은 조금은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가슴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감독은 아직도 가슴이 뜨겁고, 심지어 영악하지조차 못하다. 그의 뜨거운 가슴은 영화 안에서 내레이션의 활용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내레이션'은 화자를 등장시켜서 풀어가는 직접적 설명이다. 이 영화에서는 더더욱 내레이션이 없으면 앞뒤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선택한 내레이션인가? 분명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레이션을 썼을지도 모른다. 즉, 정서적 호소! 게다가 내레이션이란 감독의 입이면서, 이야기를 안내해주는 길잡이이다. 즉, 전지적인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영화 안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관객들은 화자가 제시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는 다시 요즘 시대의 관객들에게 (더더욱 이 다큐멘터리를 찾아올 관객들에게) 억지의 강요라는 측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화자의 목소리는 민중가요 가수인 연영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장 적합한 권위가 너무나 적합해서 그에 대한 어던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만한 여지가 없을 수 있다. 이는 촬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사실 언제나 관객의 시선과 동일시 할만한 장면들이다. 특별한 중개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에서 단독쇼트들로 인터뷰가 이루어지면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간극이 발생한다. 화면은 그러한 단독쇼트와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내레이션은 강력한 권위를 갖고서 영화적인 내용, 인물들과 관객들의 거리를 가까이 붙이려 한다. 다시 말해 어쩌면 내레이션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거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이 영화를 그러한 거리감을 두고서 관객들의 현장성을 높이는 위치에 카메라가 있다. 이 상태에서 내레이션을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점하려 할 수 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어디서 이들을 보아야 하는지 찾아가는 사유를 할 여지가 생긴다. 이 때 영화는 새롭게 관객을 보좌할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스로 사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로써 이 영화는 본래 하고자 하는 목표('연대 투쟁'이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한것일까?)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감독은 좀 더 이 상황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취재는 당연히 그들의 정서적 거리를 좁혔고, 당연히 더 진솔해졌으며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찾아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좀 더 차가운 이성을 발휘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영화를 잘 만들었냐 못 만들었냐의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목적에 좀 더 부합하냐 안하냐를 고려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 명의 관객으로써 영화를 본 나 역시 새만금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하고, 영화과 감독 역시 이 문제를 더욱 잘 전달하고 앞으로 해결 혹은 투쟁해가는 데 새로이 생각해볼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차가운 이성이 영악한 감독을 만들고, 더욱 강력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구조는 영악해(?) 보인다. 전반적인 양식에서 가장 잘 선택한 것이 전체적인 구조라고 보인다. 수미쌍관으로 한 사건을 배치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수분이 모자라서 갯벌밖으로 입을 벌려서 빗물을 받아먹으며 말라죽어가는 동죽의 운명이 그레질을 하다가 휩쓸려서 돌아가신 류기화씨의 운명까지 확장하면서 그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슬픔이 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를 떠나, 진정 영화적으로 그 논리와 내적 상징이 일관되게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에 타당한 설득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타당한 설득과 정서적 감동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은 과히 쉽지 않은 일이며, 연출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하겠다. 영악한 영화만들기가 중요하다거나,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기획적인 태도로 출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과 머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이 연출자의 숙명일 것이다.


3. 맺으며

분명, '새만금'이 이강길 감독을 찾아간 것이라 생각한다. 7년의 시간을 온전히 들여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그것에 대한 가치는 단순히 글 몇줄로 표현해서는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그를 더더욱 응원하는 마음에서 이제는 이강길 감독이 '새만금'을 새로이 찾아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지만, 아직 새만금은 일부의 수문을 통해서 해수조절이 조금씩 되고 있고,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주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생죽들이 나온다고 한다. 그토록 생명은 질긴 것이다. 그의 말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그 생죽들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해서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만금 개발 사업은 온전히 한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의 존폐가 달린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그 안에 담긴 개발 지상주의, 효용만을 생각하는 자본의 횡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새만금은 이 시대의 모든 병폐를 한데 모으고 있는 아이콘일 뿐이다. 그 안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문제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제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 시점이다. 영화는 정말 고맙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공하고 있다. 오죽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커서 판사같은거 꼭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겠는가? 또한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삼성비자금 문제에서 검찰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한다. 제발 잘 알아듣자.



PS. <광고>
이 영화는 11월 21일부터 시작하는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해 있다. 꼭 보길 바라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 글이 광고의 효과를 가지기를 기대하면서........

이강길 감독 블로그
http://blog.jinbo.net/camerae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