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보다는 스티븐킹과 프랭크 다라본트의 3번째 만남이라는 것에 훨씬 기대를 했고, 결국엔 극장을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난 그게 이번주 개봉인줄은 몰랐다. (개봉일 따위가 무어랴.. 왠만해선 영화에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요즘은 개봉일이 언제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영화를 그냥 보는 편이다. 무취향!)

고등학교 2학년이었나... 천호동의 한일시네마라고 당시에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나름의 2관짜리 멀티플렉스였고,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서 극장에서 본 영화가 바로 <쇼생크 탈출>이었다. 어렸을 당시에 그 영화는 왠지 강한 인상을 주었고, 심지어 삶이 지옥같았던 군 생활에 나의 수첩에는 그 영화의 주요한 대사이자, 카피인 "Fear can hold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라는 문장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렇게 만났던 다라본트 감독이다.

SOMETHING in the Mist!!!!

SOMETHING in this Film!!!!!!!!!!!!!!

영화의 줄거리는 하등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다. 영화 포스터 그림을 그리는 데이빗은 어느날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에 집이 난장판이 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들과 같이 생필품을 사러 읍내에 나온다. 그전날밤의 사고로 인해 읍내의 마트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있다. 그런 가운데 동네의 한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면서 마트로 뛰어들어온다.
"SOMETHING in the Mist!!"
순식간에 덮쳐오는 안개를 두고서 사람들을 자연히 마트안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견제하고 싸우고, 죽여나가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결말은 과히 충격적이다. 이 결말을 놓고서 Film2.0의 프리뷰는
원작과는 확연히 다른 결말을 택하고 있는 영화의 결정은 상당한 의아함을 남긴다. 소설이 열린 결말을 지향하며 희망도 절망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현재의 암울함을 끈적하게 이어나가고 있는 데 반해, 영화는 훨씬 더 충격적인 결말을 택한다. 그러나 파국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결정에 대해 쉽게 납득할 만한 근거도 마련되고 있지 않거니와, 이어지는 상황 종결은 관점에 따라서는 헛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라고 적고 있다.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좀 더 재미나고 의미있게 보는 법은 헛웃음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둔다. 극장에 가서 꼭 볼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플롯상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분위기를 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유를 어떻게 범주화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거대한 공포를 근간으로 하여 중요한 인물들을 (자본주의의 전시장이자, 전쟁터인) 마트로 몰아넣는다. 아니 엄밀하게 보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떠한 공동체 혹은 집단, 직장 또는 반대로 물리적인 건물, 광장, 공원 등에서 어떤 부분을 딱 택해서 수십명을 뽑아내더라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영화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곳이 다른 곳이 아닌 '마트'라는 곳이다. 그곳은 언제나 풍요롭지만, 한편으로 상품들은 언제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수많은 캠벨 수프 캔들이 간택되어지기 위해서 항상 제일 앞에 나오려 하고, 그것은 결국 영화를 다보고 났을 때, 그 안에 수많은 인간들과 다를 바없다. 아니 그 인간들이란 결국 하나의 캠벨 수프 캔과 다를 바가 없다. 어찌되었든 영화는 마트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균열이 드러난다.  그것은  여러가지 양상을 가진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계급적 갈등,  외지인과  현지인들사이의 지역적 갈등,  젊은이와 나이든이 사이의 세대적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인과 비종교인(혹은 광적이지 않은 종교인)사이의 원형적 갈등(이는 분명 종교적 갈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어찌되었건 주인공 데이빗을 근간으로 그 Something을 확인한 사람들은 공포감을 갖게 되고 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대처하려고 한다. 이 가운데에 주된 갈등이 원형적 공포를 주술적으로 풀어내려 하는 카모디 부인(마샤 게이 하든)을 중심으로 풀려나간다. 이 때 부터는 영화는 외부의 공포를 내재화 시켜서 사람을 선동 혹은 다스리려 하는 보복의 기독교같은 중세적 커뮤니티와 이성적 사유를 중심으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는 근대적 커뮤니티 사이의 전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했을 때는 오히려 영화가 시대에 너무 낙후되어 보이지 않느냐라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이다. 21세기는 여전히 중세와 근대가 계속적으로 진행중이다. 심지어 기득권을 위해서 언제나 공포 혹은 두려움을 '발행'하는 행위들이 서슴치 않고 일어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보고 있으면 그렇다.
그러나 결국에 영화는 한쪽을 선택해서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내러티브적 한계성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데이빗을 위시한 무리들이 과연 이 곳을 벗어나서 살아날 수 있느냐 라는 부분이다. 즉, 다시 말해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마무리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영화의 2/3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갈등의 전개양상에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마트를 벗어나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과연 가장 바깥의 세계 또는 신의 눈에서 그들은 어디로 향할 수 있을 것인가? 기름이 다 될때까지 달려보자고 해서 나갔고, 혹시나 그들을 덮칠 두려운 생물체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끝내 챙겨온 권총의 그 트리거는 어떻게 쓰일 것인가? 이 결말은 정말로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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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든 '마녀'같은 카모디 부인(마샤 게이 하든 분)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중심점은 말 그대로 이 시대를 은유하고 재현해내는 지점이다. 한 집단에 커다란 숙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두고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다시 그것이 어떤식으로 커뮤니티를 분화시키고 그들은 어떠한 갈등양상을 전개하며, 해결해가는가를 잘 들여다 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단선적이지 않고 다층적임을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마트를 하나의 국가 혹은 집단에 위치시키고, 카모디 부인을 굉장히 보수적인 집단에 대입하고, 데이빗을 조금 진보적인 성향으로 사람으로 위치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다. (물론 이 하나의 범주화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미국 사회의 현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현실에 이 영화를 병치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소소한 대표성들을 찾는 것 또한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상품들간의 경쟁은 다시 마트안에서 인간들 간의 경쟁으로 대치되고 은유된다. 또한 그 분화된 집단 혹은 조직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결말이 뻔히 보이기 까지 하다.(이 부분에서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 '경쟁'을 강조하는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엔 커다란 "SOMETHING"이 존재하는 마트 바깥 = 개미지옥 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고, 거기서 살아남는 방식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쳐밀어넣는 것이 아님은 분명할 진대, 카모디 부인은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상황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제물을 찾아나설 뿐이다. 마치 기업의 구조조정, 혹은 한국 사회에서 비리가 터졌을 때 그 기관의 장이 사퇴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데이빗을 중심으로 한 집단의 이성은 역시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데에 아주 좋은 수단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가야 하는가를 합의를 통해 도출해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까지는 이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끝내 결말에 가서 배반을 당한다. 글쎄 감독은 무슨 생각인걸까? 결국에 이성 혹은 감성에 절대적 힘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인가?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헛헛해 하거나, 심지어 분노를 하거나 혹은 악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은게 미리 내리는 결론이다.
결국 영화에서 가장 멀리 벗어났을 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수단으로써의 이성과 절대 버리지 말고, 지켜야할 가치로서의 감정을 같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설의 결말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멘트라고 한다. 그것은 '희망'이라는 추상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것을 영화적으로 변주해 낸 결말이지, 이것을 두고서 영화와 소설이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좀 미흡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별점 : ★★★★★

뱀발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잡생각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크리처들은 어디서 왔을까? 사실 다른 영화들을 만들면서 그려진 수많은 스케치들을 모아서 여러 사람들에게 가장 무섭거나 징그러운 것들을 골라보라고 해서 선택한 것들을 아닐까 하는 잡생각.
왜 인간들이 두려워 하는 괴물 혹은 외계 생명체들은 갑각류와 비슷한 걸까. 혹은 곤충과 비슷한걸까? 인간은 키틴질이 아닌 soft한 피부를 갖고 살기 때문에 단단한 갑옷 같은 피부를 가진 생명체에 대해서 원형적 공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일리언, 에일리언 마스터, 프레데터, 프릭스, 스타쉽 트루퍼스 등등)
영화에는 다양한 크기의 생명체가 나온다. 마치 거미를 형상화한 녀석들. 그 작은 것들과 영화 말미에 나오는 공룡보다도 거대할 것 같은 절대적 크기의 거물. 그런가 하면 최초로 등장한 연체류의 촉수와 벌침을 합쳐놓은 생명체 등등등.
한편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에게는 이름이 있을까? 뭐 영화를 만들면서 부르는 이름은 있겠지만, 영화상에는 누구도 그것을 불러주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알 수 없다. 언뜻 극장에서 보았던 D-war의 크리처 중의 하나인 '불코'가 떠올랐다. 그건 뭐하러 이름을 붙이고, 굳이 불러주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외형적 디자인 같은데에서 어떤 맥락들이 있을까?

마샤 게이 하든의 연기는 정말 끝내준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 역시 그녀의 종으로써 움직여야 할 기분이 든다. 그녀가 가진 분위기는 맹목적인 느낌이 있다. 그녀는 잭슨 폴락의 전기 영화인 <Pollock>에서 폴락의 연인이자 정신적 지주로써 등장했고, <미스틱 리버>, <밀러스 크로싱> 등의 독특한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배우이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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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뭔가 여태껏 봐왔던 영화들을 보는 것과 다른 지점이 나타난다. 지난 주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알렉산더 소쿠로프/ 특별전의 마지막날 마지막회에 이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게 된 것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서사에 여전히 길들어져있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번 특별전에서 4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작년에 멜번영화제에서 본 <태양>을 포함해서 5편의 영화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의 영화는 여전히 나에게 생경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서 뭔가를 적어봤자, 그것이 소쿠로프의 스타일에 관해서라기 보다는 이 영화 한 편에 대한 짧은 감상과 생각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힌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요즘은 자꾸 그 고통을 마주하고 싶어진다. 변태가 되어가고 있다. ㅡ.ㅡ)

이 영화의 단적인 특징(?)이라면 영화 전편이 1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탄생하고, 멜리에스가 우연히 편집의 원리를 발견한 순간 이래로, 장편영화가 온전히 1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히치콕의 <로프>는 논외로 치자. 눈속임에 의한 것이니까...) 그것을 해낸 사람이다. 해냈다기보다는 상상했다고 해야 할까?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선택한 영화. 1쇼트 영화는 디지털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전히 필름은 이 영화를 배신한다. (상영 프린트의 매 권이 바뀔때마다 튄다. 디지털 상영만이 이 영화를 온전히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필름은 디지털로 완성한 영화적 현실을 배반한다.


1. 카메라를 타고 떠나는 하나의 경험, 엑설런트 어드벤쳐!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두 명의 화자를 두고서 펼쳐지는 이야기이고, 한 사람은 카메라의 앞에, 또 한 사람은 전적으로 카메라 뒤에 놓여서 자칫 영화가 흐트러질 수 있는 것을 끌고 가는데 조력자의 역할을 할 뿐,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제시해준다면 더 재미날 듯). 내러티브를 벗어나서 이 영화는 사실 하나의 체험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은 거대한 항해! 영화는 카메라라는 배를 타고서 떠나는 여행이다. 카메라 앞의 화자가 저 멀리 무엇이 있는지를 내다보고, 알려주며 안내하는 자(뭐라고 부르더라...)라면 카메라 뒤의 화자는 키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이른바 <러시아 방주>라는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거다. 그리고 미술관 안의 공간을 누비고, 역사도 넘나들며 미술과 음악에 관한 관광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내러티브 보다는 영화 자체가 하나의 여행 혹은 체험이라는 차원에서 다가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적으로 역사를 넘나들고 만나서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을 뿐, 이는 정말로 신나는 엑설런트 어드벤쳐!! 인 셈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카메라 뒤의 긴장.
내가 영화쟁이라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드는 긴장감이 있었다. 절대적으로 머릿속으로 계속 찾아드는 물음표가 있었다. 지금 저 카메라 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저 카메라를 이끌고 가는 배우는 연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저 사람은 카메라에서 때때로 벗어나고 있는데, 카메라를 잡고 있는 촬영감독, 또 다르게 쫓아갈 감독, 그리고 여러 파트의 스탭들. 사실 배우들은 각각 나뉘어진 공간에 따라서 카메라가 등장하는 순간에 타이밍을 맞추어서 연기를 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찍고 있는 스탭들은 카메라가 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멈출때까지(다시 말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쉼없이 일을 해야 한다. 이는 다시 스탭들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거꾸로 말해 오히려 스탭들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체험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 다시 카메라 앞으로.....
그런가 하면 수천명의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카메라에 반응(!)한다. (물론 합을 어느정도 맞추긴 했겠지만) 특히 수천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마지막 무도회 장면은 카메라가 배우를 따라가는 동안에 지나치게 되는 수백명의 배우들이 적절하게 카메라를 비켜서고 지나치고, 카메라는 또 그들을 잘 따라가고 있다. 이쯤 되면, 영화는 카메라를 중심으로 앞과 뒤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도대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뭐 혹자는 북한의 매스게임처럼 하면 가능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무도회가 끝나고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엄청난 인파와 그 가운데를 빠져나오는 카메라는 가히 근두운을 탄 손오공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식의 촬영은 하나의 표현 수단일 뿐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아니다'고 소쿠로프는 말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식의 촬영이 목표가 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도대체가 100분의 영화를 1쇼트로 완성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한다면, 가서 당장에 따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표현수단이라고 한 것은 나쁘지 않은 답이라고 본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영화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가치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안에 담긴 내용을 따지는 것은 하찮지는 않겠지만 부수적이라고 생각한다.(실은 내용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시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번 고려해보겠지...)



딱히 정리된 글이 아니라서 언제나 골치 아프다. 하지만 꼭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으리라....


뱀발.
만약 내가 이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고 상상했을 때, 난 이 영화를 처음에 시작할 때 뭐라고 소리치고, 마칠때는 뭐라고 해야할 지 궁금했다. 쇼트를 찍는 것이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것이기도 하고.... 액션, 컷..  시작, 여기까지.. 뭐 구호가 중요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시작과 마무리가 굉장히 달라보이는 느낌이 있었단 말이지.... 그리고 카메라를 내내 따라가는 동안에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아니면 어떻게 따라가고 있었을까? 시나리오 상 끄트머리에 다가갔을 때,  NG가 나면 어떡하나?... 망연자실하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얼마나 난감할까.. 별의별 잡생각이 다 들었다.

11월 4일. 영상자료원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프로그램.
글쎄, 일부러는 아니었는데... 다니다보니 독립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사실은 내 안에서 이미 뭔가 '다른' 것들을 원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지도.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속에 남는 이상한 이물감들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든다.
글도 못쓰고, 이러한 잡스런 글조차 다시 고쳐쓰는 버릇이 없는 나에게는 글쎄올시다.
이러한 글이 나에겐 일종의 "즉흥연기"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적 문제를 뱉어내고 남는 것은 차가운 이성의 사유일 것이다.
영화적 윤리? 윤리의 영화??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쟁점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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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이미지가 없어서.. 일단 옛날거라도.. ^^



01234

[살기 위하여 - 어부로 살고 싶다]
2006|Documentary|DV|Color|75min
감독 이강길



1. 활동가로서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로서의 활동인가?

이 영화에서 화자의 태도는 굉장히 뜨겁다. 선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끓어넘치기 직전에 냄비 만큼의 온도를 갖고 있다.
누군가의 통곡하는 모습을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누구를 향해서, 무엇때문에 저토록 섧게 울고 있는가? 의문을 갖게 한 후 그것에 대한 답을 계속 유보한다. 그 답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다.
이후 물이 막혀서 말라가는 갯벌의 모습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마치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비슷한 체험을 가져온다. 그리고 말라가서 갯벌에서 기어져 나오는 동죽, 생합(조개류)들. 그것의 모습은 일순간 우리가 자연에게 어떠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인간으로 포커스를 옮겨온다. 계화도의 아침을 보여주면서, 분주하게 일을 준비하는 주민들을 따라서 우리는 계화도, 새만금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부로 살고싶다>는 3부작 연작의 제 3부격인지만, 각각은 독립된 주제를 갖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안을 관통하는 어부들의 삶과 인간다움에 대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토록 조용했던 계화도는 이제 물로 나가는 어부들과 갯벌로 채집을 나서는 사람들로 나뉘어져서 묘사된다. 그러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조제의 물막이 공사를 보여준다. 어찌보면 단순한 진영나누기? 이야기는 쉽게 펼쳐진다. 이른바 공사하는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계화도 주민들로 이분해서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대책위원회가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제도측을 오가면서 대화창구를 마련하고 작은 갈등들이 펼쳐진다. 물막이 공사가 점점 마무리를 향하고, 대책농성을 하던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이제 점점 힘든 싸움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여기서 이어지는 큰 문제는 주민들 내부에서의 갈등인 셈이다. 보상을 제대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과, 원칙적인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 그리고 마지막 공사를 앞두고서 해상시위가 이루어지고 거기서 언론들 앞에서 나서 인터뷰를 한 대책위원장은 결국 주민들의 의사를 모두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은근슬쩍 보상에 대한 말만을 언급하면서 내부적 갈등은 심화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장 뜨거운 화자가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는 감독은 가장 이질적인 형태로서 영화에 개입해서 들어온다. 느닷없이 영화를 만든이가 이야기에 참여해 올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선 느낌이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보면 낯섬보다도 델 것 같은 뜨거움이다. 하지만 끝내 영화안에서 인터뷰 장면을 돌려서 대책위원장의 거짓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인간적인 윤리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언제나 최전선에 있다. 각종 시위장면, 혹은 농성장에서 갈등의 가장 깊은 간극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담아내고, 이른바 자신이 있는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 자체가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편에 강하게 달라붙어 있다. 정치적인 활동!
그리고 이후 점점 남성들 사이에서 지쳐가는 싸움의 흐름은 여성들에게로 중심이 옮겨간다. 실리보다도 언제나 명분을 정확히 내세운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반박할 논제가 없다. 산자부의 사람들도 그녀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고작 '추운데 고생하시지 말고 이쪽으로 들어오셔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담당자들도 나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내부적인 분열과 이른바 중요한 순간에서 지지의 힘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결국 새만금 방조제는 마지막 트럭을 쏟아붓고야 만다. 그리고 펼쳐지는 태극기들. 이젠 태극기가 오염된 듯 하다.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새만금 간척 사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앞두고, 방조제가 완성된 그들의 기쁨이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어찌되었든 그들에게 갯벌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안에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발'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고, 기득권들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시 된 개발은 결국 또다시 태극기를 '전유'한다. 그 누구의 태극기인가? 효순이 미선이가 죽어가는 동안에 휘날렸던 붉은악마들의 태극기와 같은 태극기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가 하더니, 영화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류기화'씨의 죽음. 게다가 그 죽음마저 동죽들의 운명과 별다를것이 없다. 잠깐씩의 해수유통을 위해서 설치한 수문에서 어느날 갑자기 쏟아진 물에 휩쓸려 맞이한 죽음. 여기서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감독은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태도를 등장하는 이들과 삶을 합치시키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이루어낸 성과가 내부의 작은 균열들, 그리고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다시 새만금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 영화는 분명 활동가의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1차적으로 정서적인 문제에서는 성공적인 이야기전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좀 더 영악하게 활동으로 이어지는 문제는 다르게 생각해봐야 한다.


2. 객관화해서 더 들어가야할 영화

이 영화는 사실 앞서말한 화자의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는 영화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오히려 감동을 받되, 이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잘 떠오르지 않을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정서중심의 영화만들기가 흐릴 수밖에 없는 객관적 판단의 영역이다. 물론 감독이 무려 7년의 시간을 새만금에서 살아오면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영역의 사람들을 두고서 어떻게든 그 사람들을 누구는 나쁘고, 누구만 착하고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치하받아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누었던 QnA에서 하는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고, 이제 이 영화를 갖고서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것이 단순히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런이러한 상황이니 우리와 함께 해달라는 손내밈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 시선과 방식은 충분히 순진하고, 순박하다. 글쎄 21세기의 다큐멘터리적 선동(?)은 조금은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가슴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감독은 아직도 가슴이 뜨겁고, 심지어 영악하지조차 못하다. 그의 뜨거운 가슴은 영화 안에서 내레이션의 활용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내레이션'은 화자를 등장시켜서 풀어가는 직접적 설명이다. 이 영화에서는 더더욱 내레이션이 없으면 앞뒤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선택한 내레이션인가? 분명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레이션을 썼을지도 모른다. 즉, 정서적 호소! 게다가 내레이션이란 감독의 입이면서, 이야기를 안내해주는 길잡이이다. 즉, 전지적인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영화 안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관객들은 화자가 제시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는 다시 요즘 시대의 관객들에게 (더더욱 이 다큐멘터리를 찾아올 관객들에게) 억지의 강요라는 측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화자의 목소리는 민중가요 가수인 연영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장 적합한 권위가 너무나 적합해서 그에 대한 어던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만한 여지가 없을 수 있다. 이는 촬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사실 언제나 관객의 시선과 동일시 할만한 장면들이다. 특별한 중개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에서 단독쇼트들로 인터뷰가 이루어지면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간극이 발생한다. 화면은 그러한 단독쇼트와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내레이션은 강력한 권위를 갖고서 영화적인 내용, 인물들과 관객들의 거리를 가까이 붙이려 한다. 다시 말해 어쩌면 내레이션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거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이 영화를 그러한 거리감을 두고서 관객들의 현장성을 높이는 위치에 카메라가 있다. 이 상태에서 내레이션을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점하려 할 수 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어디서 이들을 보아야 하는지 찾아가는 사유를 할 여지가 생긴다. 이 때 영화는 새롭게 관객을 보좌할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스로 사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로써 이 영화는 본래 하고자 하는 목표('연대 투쟁'이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한것일까?)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감독은 좀 더 이 상황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취재는 당연히 그들의 정서적 거리를 좁혔고, 당연히 더 진솔해졌으며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찾아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좀 더 차가운 이성을 발휘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영화를 잘 만들었냐 못 만들었냐의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목적에 좀 더 부합하냐 안하냐를 고려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 명의 관객으로써 영화를 본 나 역시 새만금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하고, 영화과 감독 역시 이 문제를 더욱 잘 전달하고 앞으로 해결 혹은 투쟁해가는 데 새로이 생각해볼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차가운 이성이 영악한 감독을 만들고, 더욱 강력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구조는 영악해(?) 보인다. 전반적인 양식에서 가장 잘 선택한 것이 전체적인 구조라고 보인다. 수미쌍관으로 한 사건을 배치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수분이 모자라서 갯벌밖으로 입을 벌려서 빗물을 받아먹으며 말라죽어가는 동죽의 운명이 그레질을 하다가 휩쓸려서 돌아가신 류기화씨의 운명까지 확장하면서 그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슬픔이 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를 떠나, 진정 영화적으로 그 논리와 내적 상징이 일관되게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에 타당한 설득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타당한 설득과 정서적 감동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은 과히 쉽지 않은 일이며, 연출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하겠다. 영악한 영화만들기가 중요하다거나,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기획적인 태도로 출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과 머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이 연출자의 숙명일 것이다.


3. 맺으며

분명, '새만금'이 이강길 감독을 찾아간 것이라 생각한다. 7년의 시간을 온전히 들여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그것에 대한 가치는 단순히 글 몇줄로 표현해서는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그를 더더욱 응원하는 마음에서 이제는 이강길 감독이 '새만금'을 새로이 찾아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지만, 아직 새만금은 일부의 수문을 통해서 해수조절이 조금씩 되고 있고,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주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생죽들이 나온다고 한다. 그토록 생명은 질긴 것이다. 그의 말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그 생죽들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해서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만금 개발 사업은 온전히 한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의 존폐가 달린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그 안에 담긴 개발 지상주의, 효용만을 생각하는 자본의 횡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새만금은 이 시대의 모든 병폐를 한데 모으고 있는 아이콘일 뿐이다. 그 안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문제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제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 시점이다. 영화는 정말 고맙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공하고 있다. 오죽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커서 판사같은거 꼭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겠는가? 또한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삼성비자금 문제에서 검찰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한다. 제발 잘 알아듣자.



PS. <광고>
이 영화는 11월 21일부터 시작하는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해 있다. 꼭 보길 바라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 글이 광고의 효과를 가지기를 기대하면서........

이강길 감독 블로그
http://blog.jinbo.net/cameraeye

사용자 삽입 이미지

Abbey Road 표지를 떠올리게 한 스틸컷



10월 30일 미로스페이스에서 있었던 독립 장편영화 쇼케이스를 다녀왔다.

제목은 <마지막 밥상>. 이 영화는 감독의 이름도 몰랐고, 단지 위에 올린 사진을 어디선가 보았으며,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하는 비틀즈의 Abbey Road의 앨범 표지를 떠올리게 해서 뇌리게 강하게 남은 제목의 영화였다. 알고보니 20기 선배가 촬영을 했더군.
그리고 10월초 해피투게더 독립영화를 보고 뒷풀이를 하다가 옮긴 자리에서 노경태 감독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그의 차기작 시나리오까지 받아 읽어봤던 터라.. 이 영화를 꼭 보리라 했었다.


1. 실험영화같은 방식(?)으로, 또는 파토스를 제거하는, 드라마를 세우다.
실험영화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지하고, 본 것 조차 없는 터라 뭐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단지 (상영회에서 나눠준 자료에 따른) 노경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르면 그는 계속적으로 단편,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이고, 당연히 그러한 방식에서 이어지는 일관성 혹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꺼내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일단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참고해야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용어 사용을 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정서에 호소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인물들의 이름 조차 알려주지 않고, 심지어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지만)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두 단위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날 관객중에서는 할머니와 손자의 근친상간이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이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그 관객을 실소하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 그 관객을 욕할 수는 없는 거다. 영화는 정말로 상영이 되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감독의 의도 찾기 놀이는 말그대로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부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어있고, 배우들은 박제화한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서에의 호소? 그런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말라고 한다.
영화는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스크린에서 돌아가는 이미지들만 봐야 한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는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 고전적인 방식은 당연하게도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의 이입을 일으켜서 관객의 파토스를 자극하고 눈물과 웃음을 짜낸다음 오게되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방식이다. 어찌보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하고 일부 시도한 "지적 영화"(intelletual cinema)에 더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실험 영화가 고전적인 드라마를 벗어난 영화의 양식과 형식에 더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라는 것을 포함할 때 더더욱 이 영화는 실험영화같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이토록 폭력적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폭력을 바탕으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정보와 상황들을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파토스가 생길 수가 없다. 극도의 이성, 지적인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그리고 행위들을 보여주면서 조금씩조금씩 관객의 뇌는 쇼트 사이의 설명을 상상하고 아버지의 삶을, 아들의 에이즈를, 딸의 노력을, 엄마의 슬픔을, 할머니의 존속을 이해햐려 든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들이 얽혀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이 드라마가 된다. 파토스를 제거해서 이성적 사유만을 해야하는데 그들 사이의 드라마가 머리 속에 박히게 된다.
이 쯤되면 이 영화가 독자적인 느낌을 알게 된다.

2. 연출자의 의도대로 박제화한 '웅변조의 카메라', 휘저어댄 거품의 편집
이 영화는 수퍼16mm로 촬영해서 35mm필름으로 블로업된 포맷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영사시 문제가 발생했다. 35mm 비스타비젼을 영사실의 실수로 화면의 상단과 왼쪽이 잘린 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nA세션에서 질문해서 확인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헤드룸이 잘려나가 답답함 상태의 화면으로 영화를 본 셈이다. 어찌되었건 그것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더 준 셈이고, 하나의 미학을 더 잃은 셈이다. (제발 영사실의 실수는 이제 그만!!!!! -______________-;;;;; )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움직임이라면 주밍이 2~3번 나올 뿐이고, 거의 왠만한 앵글은 깊이감을 부각하지 않는 평면적인 상태이며, 또 대부분이 1scene 1cut으로 찍혀져 있다. 아닌 장면들도 있지만, 이 원칙이 보이는 상태에서 예외적인 것들을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그리고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보통이 LS이상으로 나온다. 이는 사실 연출자가 굉장히 카메라를 '보이게' 찍는 방식이다. 카메라가 고전적인 방식을 벗어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카메라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왜 그렇게 두고 있는지를 거의 항변하다시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웅변조의 카메라!!! 다시 말해 이제는 연출자가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를 읽어볼 필요가 생기는 셈이다.
노경태 감독은 연출의도를 "이 영화는 아이러니와 단절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지구의 오염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trivialism, surrealism and minimalism의 렌즈를 통해 나만의 코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줄 띄고) 모호한 액팅, 초현실적인 미쟝센과 탈색된 칼라는 현대 인간관계의 모순과 어색함, 그리고 세기말적인 암울한 현대사회를 표현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이러니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어로 나오는 사조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언급하긴 어려울 것 같고, 위에 설명한 카메라의 방식들이 분명 노경태 감독의 방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로 '하찮고... 현실이 아닌 것 같고..... 매우 작은.....' 단서들에서 출발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화적인 공간이 탄생한다. 감옥들의 방이 그렇고 지하철이 그렇다. 지하도도 그렇다. 면접보는 공간도 그렇고, 거대한 교각 밑이 그렇다. 어항속이 그렇고... 그곳을 다니는 인물들의 옷들이 그렇다. 분장이 그렇다. 세상에 흙을 뒤집어 쓰고 줄줄이 등장해서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지구인들을 깨우는 외계인을 보았는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처음 보고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지라도....
그런가 하면 역시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속에 등장한 이상한 장면들, 이상한 인물들이다. 전혀 스토리와 상관없이 떠도는 분절된 씬들이 등장한다.  터널을 뚫는  현장 시찰의 공무원들, 엄한 곳을 파는 전화공들, 발악하는 가스통남자와 카페트녀, 주차장자리를 놓고 싸우는 아가씨와 아줌마, 점점 검은물이 들어가는 밥그릇들 등등이 이야기가 좀 아리까리할 즈음에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요 5명의 인물들간의 고개돌리기 쇼트들. 이것들이 유기적(서사적)이 않고, 자의적(시네마틱)인 상태로 영화를 세우려는 감독의 휘핑크림식 편집이다. 크림을 휘핑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자의적이고, 잘 안섞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휘핑은 반복하고 힘조절을 하고 하면 할 수록 쓸데 없는 기포는 점점 빠져나가면서 양질의 크림을 탄생시킨다. 이 영화의 편집이 마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편집 방식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궁금했던 지점은 영화가 촬영이 끝나고 나서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재편집 될 때 이는 다시 작가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모습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분리이화 되는 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거다. (반쯤은 예상했지만) 노경태 감독은 사실 시나리오상의 이야기와 거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시나리오가 나오면 영화는 다 나온거라고 했던 히치콕의 방식인 셈이다. 그 방식을 동의하든 못하든 간에 그 오케스트레이션의 방식을 통해서 씬을 이어붙이고, 쇼트를 구성하는 편집은 (실제로 누가 편집을 했든 간에) 편집자(로서의 기능과 역할)보다는 (작가로서의) 연출자를 드러낸 결과인 셈이다.


3.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배달되는 영화적 파토스!
끝내 영화의 끄트머리에 가서 어떻게 된 구성의 가족들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미 정서적인 파토스를 거세해 보면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그 가족구성원의 정보가 이렇게 저렇게다라는 사실이, 영화를 대하게 되는 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스토리 정보가 영화를 좌지우지 하고,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미 머리가 좌석이 딱 붙어서 엔딩 음악에 놀래서 벌떡 깨는 사태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가족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면서 그들의 회합을 화성으로 떠나는 어느 간이역에서 마무리짓는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간이역에 만나서 화성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냐 찍지 않았냐는 것은 정서적인 영화찍기와 만들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어찌되었던 이 영화는 방식과 태도의 지점을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갖고서 움직여왔고, 감독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관철하고 싶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일단 당신이 엔딩음악에 겨우 깨어난 관객이 아니라면, 선택하면 된다. 감독의 이야기를 작게 주억거리며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사실 버틴다고 하는 순간 영화적 이야기는 다 알아들은 셈일텐데... ^^) 양자 택일의 이분법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정서적으로 동화할 감정의 표현도 없고, 드라마틱한 갈등도 없고, 따라가야할 주인공도 모르채 영화를 다 보았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눈물을 짜내거나, 가슴이 움직일 드라마틱한 파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묘한 인상, 이들이 어찌되었거나 하나의 개인들이고 각자의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으로 영화적인 파토스를 생성한다. 나만 그런건가? 당신도 보면 좀 그럴거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당신에게 격정적이지도 않고, 아리까리하기만 한 영화적 인상을 남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엄밀하게 관객과의 소통이란 친절하냐 불친절하냐의 측면보다는 어떤 방식의 소통을 요구하느냐로 시작해야 한다. 마치 TV처럼 주저리 주저리 대사를 쉬지 않고 내뱉어내는 설명조의 이야기는 엄밀하게 일방적 전달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의 영화는 TV 드라마와 별 차이점을 지니지도 못할 뿐더러, 이 지점에서 얘기한다면 <마지막 밥상>은 불친절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지적 영화"의 측면과 실험적인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다가가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의미를 형성하고 영화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장면들에서 정보가 부족한 것은 감독의 실수라고 받아들일 자세 조차 필요하다. 그의 첫 장편영화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짚어내야 한다. 노경태 감독을 위해서....)


5. 맺으며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다른 영화가 가능한 것도 같다. 하지만, 객석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배급의 기회 조차 못 갖는 것은 이미 무대조차 가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만든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가 하면 노경태 감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른 영화가 가능한지는 몰라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에너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며 살아온 나는 언제나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었고, 왠지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소심함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차리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 그의 영화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꺼져가던 불씨에 산소 한 움큼을 던져준 셈이다.
 

영화, 그 자체를 찾는 여정.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작성자 : 정경록
- 날짜 : 10/26

1. ‘상실’을 이야기하다.
- 영화를 찾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독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상길(안길강 분)은 주구장창 영화를 찾고 있다. 독립적으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첫 시퀀스는 그 현실적인 어려움 안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드는 것(찾는 것,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그가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속초를 향하게 된다. ‘무정차’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무정차는 없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 안에서 운명적(!)인 여자를 만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후, 여자를 따라서 홀연히 여자의 동생찾기에 합류하는 상길. 여기까지 오면, 영화의 주제는 잘 드러난다. 상길의 사촌형과 숙모는 이산가족으로써,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여자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자 한다. 물론 상길은 자신의 영화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여자를 따라서 강원도의 탄광촌들을 다니던 상길은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물론 관객도). 사실 이 상황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태도와 진지함에 (혹은 뻔뻔함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제 영화는 단순히 내용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상실을 회복하려는 모습에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 영화를 욕망하다.
여자의 이름이 ‘영화’인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다. 내용 혹은 상황으로 상길이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그저 있는 이야기들 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바깥으로 보면, ‘감독은 영화를 욕망한다’는 철학적(?) 명제를 구현한 셈이 된다. 게다가 그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옛 탄광촌의 건물이다. 폐허 안에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찾기를 원하는 감독. 이 쯤 되면 사실 은유가 은유가 아니고, 이야기가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관객은 이 영화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지 물음표가 찍힌다. 감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 여자(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나서다.
결국 여자의 동생찾기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는 개발이나 자본에 의해 자신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탄광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을 오가는 동안에 상길은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속초에서의 자신의 기억 역시 탄광촌들과 다를바 없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개발과 자연의 사이, ‘거주호와 철거호’ 사이, 부산과 속초 사이, 속초와 탄광촌의 사이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 찾으려고 하는 노력만, 과정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된다. 정말로 개인지 늑대인지... 집을 나간 우리집 개인지, 자신의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는 야생의 늑대인지 구분할 수 조차 없다. 상길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다시 자신의 영화를 찾으려 편집실로 연락하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데뷔작)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2. 영화를 받치고 있는 이상한 징후들? 혹은 상징들?
이 영화는 내연의 이야기와 외연의 쇼트(혹은 구조, 또는 기호체계)들이 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상한 인상들을 남기고 있다. 먼저 가장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술집의 아저씨. 그 아저씨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횟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아저씨는 무언가를 초탈했거나 허무한 표정을 한 채로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상길의 일행의 건배에 박자를 맞추어서 혼자서 건배를 한다. 단독 쇼트와 롱샷 안에서의 포커스를 할애하면서 까지 영화는 그 인물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이 사람은 영화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아지. 속초에 도착해서 묵은 민박. 그 민박집에는 너무나도 귀엽게 ‘개밥’스러운 개밥을 먹는 하얀색의 강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살이 토실토실 오르기를 기대하는 주인이 있다. 이 영화에서 정녕 강아지라고 주장할 법한 하얀 강아지이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 함께 떠난 여정 중에 도계에서 만나게 되는 검은 강아지가 있다. (이 쇼트들은 카메라가 비추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시선과는 무관하며, 관객만이 알게 되는 전지적인 쇼트들이다.) 그러나 검은 강아지는 개가 아니라 ‘늑대’이다. 주인이 없고, 혼자서 버려진 쓰레기들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담고 있다.
폐허의 공간. 강원도에서 만나는 태백, 사북, 도계 등의 공간은 한동안 석탄 붐을 따라서 발전했지만, 광산들이 모두 폐광 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져버린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거기서 상길(감독)은 영화와 교합(!)한다. 마치 김기찬의 사진들(<서울 풍경>이라는 사진집)에 나오는 공간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꿈같다.

3. 감독론
전수일 감독을 논하는 데 있어서 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스토리텔러?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스타일리스트?인지는 전후작들을 더 살펴보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만을 놓고 그가 어떤 감독인지를 조심스럽게 논해본다면, 아무래도 그는 성긴 이야기 구조와 약한 드라마위에 독특한 징후들을 심어 놓는 데에서 영화를 세워나가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징후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계속적인 잔상을 남겨놓음으로 해서 어떤 영화적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이번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는 드라마와 시네마 사이에서의 고민점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길의 여행은 마치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여행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는 그래도 영화의 메인 플롯을 이루면서 마지막 시퀀스를 가능하게끔 했다. 결국에 숙모가 돌아가시고, 그가 다시 부산에서 속초를 향하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눈덮인 강원도의 한 골짜기에서 영화를 끝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것일까? 오히려 커다란 구조에서 영화를 강원도 여행을 둘러싸고서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한편의 완결된 형식의 구조를 갖고서, 그의 고민과 환상특급을 구현하는 쪽을 선택했다면 어떨까? 그것이 구조의 측면에서 <개와 늑대>를 형성해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를 놓고서 ‘만약’이라는 단서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설명불가능한 징후들을 형성하고 그것의 분위기를 더 이끌어내는 것이 구조와 특정 쇼트들을 기반으로 더욱 영화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수일 감독은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적인 이름, 제목, 쇼트들에서 매우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말그대로 이 영화를 완성한 시점에서 그의 결론과 일치할 것이다. 모호한 예술성을 근간으로 끝내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려고 한 점에서 그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