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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ey Road 표지를 떠올리게 한 스틸컷



10월 30일 미로스페이스에서 있었던 독립 장편영화 쇼케이스를 다녀왔다.

제목은 <마지막 밥상>. 이 영화는 감독의 이름도 몰랐고, 단지 위에 올린 사진을 어디선가 보았으며,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하는 비틀즈의 Abbey Road의 앨범 표지를 떠올리게 해서 뇌리게 강하게 남은 제목의 영화였다. 알고보니 20기 선배가 촬영을 했더군.
그리고 10월초 해피투게더 독립영화를 보고 뒷풀이를 하다가 옮긴 자리에서 노경태 감독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그의 차기작 시나리오까지 받아 읽어봤던 터라.. 이 영화를 꼭 보리라 했었다.


1. 실험영화같은 방식(?)으로, 또는 파토스를 제거하는, 드라마를 세우다.
실험영화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지하고, 본 것 조차 없는 터라 뭐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단지 (상영회에서 나눠준 자료에 따른) 노경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르면 그는 계속적으로 단편,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이고, 당연히 그러한 방식에서 이어지는 일관성 혹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꺼내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일단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참고해야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용어 사용을 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정서에 호소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인물들의 이름 조차 알려주지 않고, 심지어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지만)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두 단위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날 관객중에서는 할머니와 손자의 근친상간이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이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그 관객을 실소하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 그 관객을 욕할 수는 없는 거다. 영화는 정말로 상영이 되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감독의 의도 찾기 놀이는 말그대로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부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어있고, 배우들은 박제화한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서에의 호소? 그런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말라고 한다.
영화는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스크린에서 돌아가는 이미지들만 봐야 한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는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 고전적인 방식은 당연하게도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의 이입을 일으켜서 관객의 파토스를 자극하고 눈물과 웃음을 짜낸다음 오게되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방식이다. 어찌보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하고 일부 시도한 "지적 영화"(intelletual cinema)에 더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실험 영화가 고전적인 드라마를 벗어난 영화의 양식과 형식에 더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라는 것을 포함할 때 더더욱 이 영화는 실험영화같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이토록 폭력적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폭력을 바탕으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정보와 상황들을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파토스가 생길 수가 없다. 극도의 이성, 지적인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그리고 행위들을 보여주면서 조금씩조금씩 관객의 뇌는 쇼트 사이의 설명을 상상하고 아버지의 삶을, 아들의 에이즈를, 딸의 노력을, 엄마의 슬픔을, 할머니의 존속을 이해햐려 든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들이 얽혀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이 드라마가 된다. 파토스를 제거해서 이성적 사유만을 해야하는데 그들 사이의 드라마가 머리 속에 박히게 된다.
이 쯤되면 이 영화가 독자적인 느낌을 알게 된다.

2. 연출자의 의도대로 박제화한 '웅변조의 카메라', 휘저어댄 거품의 편집
이 영화는 수퍼16mm로 촬영해서 35mm필름으로 블로업된 포맷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영사시 문제가 발생했다. 35mm 비스타비젼을 영사실의 실수로 화면의 상단과 왼쪽이 잘린 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nA세션에서 질문해서 확인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헤드룸이 잘려나가 답답함 상태의 화면으로 영화를 본 셈이다. 어찌되었건 그것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더 준 셈이고, 하나의 미학을 더 잃은 셈이다. (제발 영사실의 실수는 이제 그만!!!!! -______________-;;;;; )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움직임이라면 주밍이 2~3번 나올 뿐이고, 거의 왠만한 앵글은 깊이감을 부각하지 않는 평면적인 상태이며, 또 대부분이 1scene 1cut으로 찍혀져 있다. 아닌 장면들도 있지만, 이 원칙이 보이는 상태에서 예외적인 것들을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그리고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보통이 LS이상으로 나온다. 이는 사실 연출자가 굉장히 카메라를 '보이게' 찍는 방식이다. 카메라가 고전적인 방식을 벗어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카메라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왜 그렇게 두고 있는지를 거의 항변하다시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웅변조의 카메라!!! 다시 말해 이제는 연출자가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를 읽어볼 필요가 생기는 셈이다.
노경태 감독은 연출의도를 "이 영화는 아이러니와 단절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지구의 오염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trivialism, surrealism and minimalism의 렌즈를 통해 나만의 코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줄 띄고) 모호한 액팅, 초현실적인 미쟝센과 탈색된 칼라는 현대 인간관계의 모순과 어색함, 그리고 세기말적인 암울한 현대사회를 표현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이러니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어로 나오는 사조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언급하긴 어려울 것 같고, 위에 설명한 카메라의 방식들이 분명 노경태 감독의 방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로 '하찮고... 현실이 아닌 것 같고..... 매우 작은.....' 단서들에서 출발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화적인 공간이 탄생한다. 감옥들의 방이 그렇고 지하철이 그렇다. 지하도도 그렇다. 면접보는 공간도 그렇고, 거대한 교각 밑이 그렇다. 어항속이 그렇고... 그곳을 다니는 인물들의 옷들이 그렇다. 분장이 그렇다. 세상에 흙을 뒤집어 쓰고 줄줄이 등장해서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지구인들을 깨우는 외계인을 보았는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처음 보고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지라도....
그런가 하면 역시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속에 등장한 이상한 장면들, 이상한 인물들이다. 전혀 스토리와 상관없이 떠도는 분절된 씬들이 등장한다.  터널을 뚫는  현장 시찰의 공무원들, 엄한 곳을 파는 전화공들, 발악하는 가스통남자와 카페트녀, 주차장자리를 놓고 싸우는 아가씨와 아줌마, 점점 검은물이 들어가는 밥그릇들 등등이 이야기가 좀 아리까리할 즈음에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요 5명의 인물들간의 고개돌리기 쇼트들. 이것들이 유기적(서사적)이 않고, 자의적(시네마틱)인 상태로 영화를 세우려는 감독의 휘핑크림식 편집이다. 크림을 휘핑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자의적이고, 잘 안섞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휘핑은 반복하고 힘조절을 하고 하면 할 수록 쓸데 없는 기포는 점점 빠져나가면서 양질의 크림을 탄생시킨다. 이 영화의 편집이 마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편집 방식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궁금했던 지점은 영화가 촬영이 끝나고 나서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재편집 될 때 이는 다시 작가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모습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분리이화 되는 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거다. (반쯤은 예상했지만) 노경태 감독은 사실 시나리오상의 이야기와 거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시나리오가 나오면 영화는 다 나온거라고 했던 히치콕의 방식인 셈이다. 그 방식을 동의하든 못하든 간에 그 오케스트레이션의 방식을 통해서 씬을 이어붙이고, 쇼트를 구성하는 편집은 (실제로 누가 편집을 했든 간에) 편집자(로서의 기능과 역할)보다는 (작가로서의) 연출자를 드러낸 결과인 셈이다.


3.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배달되는 영화적 파토스!
끝내 영화의 끄트머리에 가서 어떻게 된 구성의 가족들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미 정서적인 파토스를 거세해 보면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그 가족구성원의 정보가 이렇게 저렇게다라는 사실이, 영화를 대하게 되는 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스토리 정보가 영화를 좌지우지 하고,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미 머리가 좌석이 딱 붙어서 엔딩 음악에 놀래서 벌떡 깨는 사태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가족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면서 그들의 회합을 화성으로 떠나는 어느 간이역에서 마무리짓는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간이역에 만나서 화성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냐 찍지 않았냐는 것은 정서적인 영화찍기와 만들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어찌되었던 이 영화는 방식과 태도의 지점을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갖고서 움직여왔고, 감독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관철하고 싶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일단 당신이 엔딩음악에 겨우 깨어난 관객이 아니라면, 선택하면 된다. 감독의 이야기를 작게 주억거리며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사실 버틴다고 하는 순간 영화적 이야기는 다 알아들은 셈일텐데... ^^) 양자 택일의 이분법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정서적으로 동화할 감정의 표현도 없고, 드라마틱한 갈등도 없고, 따라가야할 주인공도 모르채 영화를 다 보았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눈물을 짜내거나, 가슴이 움직일 드라마틱한 파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묘한 인상, 이들이 어찌되었거나 하나의 개인들이고 각자의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으로 영화적인 파토스를 생성한다. 나만 그런건가? 당신도 보면 좀 그럴거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당신에게 격정적이지도 않고, 아리까리하기만 한 영화적 인상을 남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엄밀하게 관객과의 소통이란 친절하냐 불친절하냐의 측면보다는 어떤 방식의 소통을 요구하느냐로 시작해야 한다. 마치 TV처럼 주저리 주저리 대사를 쉬지 않고 내뱉어내는 설명조의 이야기는 엄밀하게 일방적 전달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의 영화는 TV 드라마와 별 차이점을 지니지도 못할 뿐더러, 이 지점에서 얘기한다면 <마지막 밥상>은 불친절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지적 영화"의 측면과 실험적인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다가가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의미를 형성하고 영화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장면들에서 정보가 부족한 것은 감독의 실수라고 받아들일 자세 조차 필요하다. 그의 첫 장편영화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짚어내야 한다. 노경태 감독을 위해서....)


5. 맺으며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다른 영화가 가능한 것도 같다. 하지만, 객석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배급의 기회 조차 못 갖는 것은 이미 무대조차 가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만든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가 하면 노경태 감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른 영화가 가능한지는 몰라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에너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며 살아온 나는 언제나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었고, 왠지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소심함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차리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 그의 영화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꺼져가던 불씨에 산소 한 움큼을 던져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