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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된다!

다들 많이 들어 본 얘기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혹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태도에 따라서 이 문장은
체념적으로 들리기도, 강렬하게 들리기도, 가치중립적인 느낌으로 들리기도 한다.

뻔하게도 역사는 단순히 한 민족, 국가 안에서 되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간을 옮기고, 또 거기서 시간을 옮겨서 다시 되풀이된다.
일단 이유는 차치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앞뒤 정황을 얘기해보자면...

<존 레논 컨피덴셜>.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틀즈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존 레논의 독보적 행보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단순히 '반전운동'을 했다는 행적으로 나름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레논은 낯선 존재이다. 언제나 남의 나라의 위인들은 '일화'로써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비틀즈의 입장에서는 60년대 말,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멤버들간의 불화 및 음악 노선의 변화로 이미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오노 요코가 있다. 그리고 존 레논은 일단 요코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도약을 한다. 68년도를 거치면서 전 세계는 이미 들썩들썩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베트남전은 발발했다. 20세기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 사회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존 레논을 낳았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냉전의 대리전으로써 진행된 베트남전 시기에 요코와 레논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 사이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단 하나 '평화'다.
이미 비틀즈 시기에서 거침없는 발언을 하곤 했던 레논. 세상은 연예인 조차 가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요코와 신혼여행을 아예 '침대 시위'로 변모시킨다. 수년간 대중의 우상으로써 군림한 레논은 그에게 가해지는 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를 적극 이용해서 세상에 거침없이 '평화를 택하라'고 소리친다. 그들의 침대 시위는 정녕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미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찾아온 미디어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며,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다름이 아니라, 레논과 요코가 전 세계 11개 도시에 "War is over"라는 짧고 굵은 메시지를 닮은 포스터를 붙였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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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메시지를 붙였다.
자세히 보면(아니 대충 봐도) "if you want it /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라고 적힌 이 문구.
TV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는 그 포스터를 붙이는 작업의 돈은 어디서 나와서 쓰냐고 묻는다. 레논은 당당하게 '지금은 우리의 주머니(pocket)에서 나온다'라고 대답한다.
어떤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레논과 요코는 자신들의 돈을 털어서 11개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저 메시지를 뿌리고 있었다. 저 메시지를 읽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이 바로 "John & Yoko"가 원하던 당신(YOU)이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미국 내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극도의 패권주의자였던 닉슨과 그의 공화당. 한편 존과 요코는 공화당의 전당대회를 따라 다니면서, 그 곁에서 평화콘서트를 주최한다. 한편, FBI국장이던 에드가 후버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한다. 흑인들의 급진당이었던 블랙팬더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인권 운동을 주창한다. 그러는 가운데 마틴 루터킹은 암살을 당한다. 이러한 장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72년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존과 요코는 절대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계속한다. 백악관 주변에서 반전평화론자들이 촛불시위를 펼치고, 닉슨은 촛불시위를 축구경기 구경하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지저분한 방법으로 존과 요코를 추방하려 한다. 체류 비자를 연장해주지 않음으로써 강제 추방을 하려고 하지만, 존과 요코는 이에 대해서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수년이 걸리는 사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고, 존과 요코는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한다.
이후 영화는 투쟁에 승리한 존과 요코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잠시 이어간다. 결국 80년 12월 9일 데이비드 채프먼에 의해 권총 암살을 당하는 걸로 생을 마감하는 존 레논.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영화를 보면서 섬찟한 것은 이 역사가 고스란히 2008년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닉슨은 이명박, 에드가 후버는 어청수, 베트남전은 쇠고기 정국, 미국의 보수기독교는 한국의 보수기독교, 반전행동의 촛불은 시청앞 촛불, 관련한 수배자들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은 2008년 한국에는 '존과 요코'가 없다.
앙꼬없는 찐빵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불만이 아니라 일종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존은 <Happy Xmas (war is over)>, <Give peace a chance>, <Power to the people>, <Imagine>, <Love> 등의 노래를 만들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고, 민중들 역시 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더욱 힘을 모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리에겐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노래가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대칭항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윤민석 이라는 민중가요 작곡가가 만들었다. 이 노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다름을 얘기하는 것이다. 존의 노래들은 메시지도 강렬하지만, 존 스스로가 원래 대중가수였고, 그의 의식이 발전하여 예술가가 되었고, 다시 사회참여로 이어진 경우인 거다. 그가 가지는 파급력은 단순한 호응과 집결을 넘어서, 예술적 승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힘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레논의 노래를 부르면서 정치적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의 힘에 감복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정말로 "If you want it"라는 말을 보고 어떻게 원하지 않겠는가? 전쟁이 정말로 끝나기를 원한다면, 노래를 부르면서 옆사람의 손을 잡고, 군인들의 총부리에 꽃을 꽂으면서 '사랑'으로 감싸안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존과 요코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어떤 분야의 누군가가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또는 준비한다고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나라의 문화가 결국에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여 '존과 요코'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일 뿐이다. 좀 더 다르게 얘기해봐도 그래봤자 수많은 '예술가'들의 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안에서 어떤 영웅을 만들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잘못 택한 길이 될 거라 믿는다.

존은 스스로가 이렇게 노래한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
from <Imagine>
간단히 말하면, 함께 하자, 연대하자 쯤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나도 친구이고 평등한 관계로서 인간의 본연한 마음으로 만나서 함께 하자는 거다. 패권 따위일랑은, 나만이 잘살겠다는 욕심일랑은 버리고 같이 살자고 말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말그대로 당신이 원하면...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된다.

서글픔만을 따져서 본다면, 분명 우리는 아직 '존과 요코'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산 '존과 요코'를 만들거나 기다릴 것인가라면 그건 아닌것 같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일단 이 영화를 보고, 존과 요코의 노래를 듣고 생각해보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서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하는 거다. 진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해야할 일은
저 위의 사진...
마지막 줄에 쓰인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 옆에 당신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다.


<Give peace a chance>
처음에 나오는 장면은 존과 요코가 침대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호텔방에서 콘서트를 하는 장면이다.
뒤에 'Hair Peace', 'Bed Peace'라고 쓰인 문구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자신의 자료화면을 내보낼때 'PEACE'라는 문구를 꼭 내보라고 했다.


<Happy Xmas (War is over)>
존과 요코의 메시지의 마지막에 우리의 이름들을 적어놓고 전세계를 누비는 투어를 시작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피스보트가 출발한다면, 나의 이름을 같이 적어주기를.. 그 피스보트에 붙일 메시지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꼭 선물하겠다.


<Love>
존과 요코의 사랑인 듯 하지만,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래서 강렬하다.
우리의 이야기다.



<Power to the people>
민중에게, 시민에게 권력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촛불을 꺼트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나가자구요.
대한민국의 '존 레논'은 어떤 사람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일단 당신의 마음에 있구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서로서로 보여주고 나눠주고, 더욱더 키워나가면 그 곳에 '존과 요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슷한 사람도 나오리라 믿습니다. 순진한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ps.
또 다른 혁명영웅이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한마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존의 노래 <Imagine>의 가사와 놀랍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다.

뭐랄까 체와 레논은 만난적이 있을까? 어찌되었건 천상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만났겠지.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ps2.
영화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 칼 번스타인은 <힐러리의 삶>의 저자이며, 닉슨을 하야 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대우자동차 CF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통령의 음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인물이다.
그외에 노암 촘스키, 타릭 알리, 월터 크롱카이트 등도 인터뷰이로 나온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영화도 보고, 더 찾아보는 기쁨을 누리기를..


이 글은 최근 다니고 있는 카페 더 블루스의 커피미팅 후기임을 미리 밝히며..
(싸이 클럽에 썼던 가벼운 소감을 그냥 긁어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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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팅 후기는.. 다들 영화만 보고 스르륵 가시는 바람에.. ㅜ.ㅜ
소심한 저로서는 말도 잘 못걸고 그러는 터라..
(정말로 소심한거에요.. 낯가림 없는 듯.. 있는 거에요. ㅡㅡa)

영화 시작전, 정말 생크림같이 곱게 부푼 카푸치노로 속을 데워주시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정면 보기"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좌석인지라..

뭐 언젠가는 재미난 뒷풀이도 할 날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카페 뤼미에르>라는 영화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작품이구요.
어제 영화 초반 크레딧을 기억해보면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면 기념작품'이라는 자막이 있었죠.
말 그대로 입니다.

오즈 야스지로라면,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감독중의 한 명입니다.
어찌되었든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영화답게 처음에 나오는 제작사 크레딧도 옛날 걸로 붙여놨지요
(이것 역시 기억하시면 좀 옛날그림 풍의 후지산 그림밑에 松竹映畵라고 쓰인 걸 보셨을 겁니다. '쇼치쿠 영화사'의 로고입니다.
물론 옛날 거에요. 일부러 옛날걸 붙인 듯...^^ 오즈 야스지로가 쇼치쿠에 소속되어 작품활동을 했구요. 이 영화도 쇼치쿠에서 만들었어요)

허우 샤오시엔 역시 현재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감독입니다.
1947 년생일거에요. 저의 아버지뻘 세대인데요. 대만 출신이고, 에드워드 양(양덕창)과 더불어 80년대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이끈 감독이구요. 그 이후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대단한 감독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최근작 <빨간 풍선>은 프랑스에서 제작하여 스폰지에서도 2월에 개봉할 예정이랍니다.

간단한 내막소개였구요.
처음 보시는 분들은 조금 의아할 영화들입니다.
저 역시 그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끝도 없는 지루함에 미칠것 같았죠.
하 지만,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여태껏 봐왔던 영화들 (드라마, 스토리가 강하고 볼 것 가득한 영화들)이 양념을 가득히 해서 막 담근 남도식 김장김치라면, 그의 영화는 대충 살짝 간을 해서 물이 가득하게 만든 평양식 백김치 같다면 비유가 될까요?
간단히 말하면 그냥 다른 맛일 뿐입니다. 김장 김치와 백김치간에 어느것이 더 우월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 하겠죠?

저로서도 실은 <까페 뤼미에르>를 3번째 본 겁니다.
처음엔 끝도 없이 잤구요.(그의 영화를 자꾸 보아도, 여전히 처음에는 자꾸 잡니다. 남도김치에 익숙하면 백김치가 맛이 없거든요.)
2번째는 본 게 사실 처음 본거나 다름 없구요. 어제가 3번째인데... 엄밀히 2번째라고 할 수 있을 듯.

보는 와중에 혼자서 키득거려서 방해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뭐랄까 '감자조림'만 나오면.. 그렇게 재밌을수가 없어요.
요코와 엄마(계모라고 하지만, 실제 계모들이 그런정도 아닐까요? 신데렐라의 계모나 팥쥐엄마는 오히려 잘 없을 듯), 요코와 아버지 사이의 답답한 듯, 정말 우리와 비슷한 모습들을 보다보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애정가득한 시선이 가게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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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과도 같은 장면, 이 한 장면을 위해 13일을 찍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 지하철 장면, 하지메(아사노 타다노부)가 녹음을 하고 있는 장면이 건너편의 지하철에서 보이다가 카메라가 그걸 따라 이동해서 보면, 이쪽 지하철 안에 요코가 외로이 서있는 장면. 그 장면을 제일로 좋아했어요.
그 자체로 영화가 주제를 함축하고 있고, 거의 마법같은 장면이라서요.
그런데 어제 보면서는 요코가 아버지 집에서 자다가 밤에 기어나와서 야식을 챙겨먹고, 엄마가 따라나와서 곁에 앉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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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니 이 장면이 더 좋다.


밥 먹는 와중에 엄마에게 '나 임신했어'라고 하는 장면. 그 전체 씬을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감자조림을 좋아하는 요코의 마음을 잘 몰라서, 혹은 준비를 못해서 썰렁한 모녀관계. 그런가 하면 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
야식먹는 딸의 곁을 지켜보는 엄마.
낮 에는 안먹고, 밤에 일어나서 야식을 먹으려는 행동들. 피가 통했나 안통했냐의 느낌도 있지만, 따로 나와살던 자식이 오랜만에 집에 가면 참 이상한 느낌이 있잖아요. 이게 우리집인지 아닌지... 맞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이 영화 안에 그런 게 잘 드러나 있어요.

요코와 하지메간의 관계도 마찬가지구요.
둘 사이에 어떤 로맨스를 기대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로맨스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굉장히 열정적이거나, 서로간에 관계설정에 열을 올리는 데이트가 아니라서 그렇지.
둘 간에는 어떤 신뢰같은 게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도시의 소음과 소리들을 저장하는 하지메의 모습이 왠지 친근하거든요.
소음 자체는 싫어하지만, 도시의 소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왠지 아득함이 있어요.
만약에 하지메 처럼 누군가 소음을 녹음해서 계속 저장해둔다면, 그 소음은 언젠가 소음이 아니라 특별한 소리가 될 거에요.
얼마전 김포공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김포공항을 들어가니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았거든요. 왠지 80년대의 느낌이 가득한 곳.
그런 것 처럼 하지메가 녹음한 소리들은 그런 시간성과 공간성을 담아내겠죠.
이는 다시 허우 샤오시엔 감독만이 가장 잘 찍는다는 '철도장면'들과도 연결되요.
그의 영화에는 빠짐없이 '철도', '기차' 등이 등장합니다. 그의 철도장면들은 이상스럽게 정서적으로 충만해요.
감히 도전해보고 싶지만, 너무 아득한 경지에 있는 장면들이죠.

뭐.. 두서없이 몇 마디를 적어본 거에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잘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ps. 어제 보면서 느끼는 건데, 허우 샤오시엔의 화면에서 '등'을 찍는 장면이 많아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도 인물들간에 관계가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사실 보통 영화에서는 등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거든요.


예고편보다는 스티븐킹과 프랭크 다라본트의 3번째 만남이라는 것에 훨씬 기대를 했고, 결국엔 극장을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난 그게 이번주 개봉인줄은 몰랐다. (개봉일 따위가 무어랴.. 왠만해선 영화에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요즘은 개봉일이 언제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영화를 그냥 보는 편이다. 무취향!)

고등학교 2학년이었나... 천호동의 한일시네마라고 당시에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나름의 2관짜리 멀티플렉스였고,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서 극장에서 본 영화가 바로 <쇼생크 탈출>이었다. 어렸을 당시에 그 영화는 왠지 강한 인상을 주었고, 심지어 삶이 지옥같았던 군 생활에 나의 수첩에는 그 영화의 주요한 대사이자, 카피인 "Fear can hold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라는 문장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렇게 만났던 다라본트 감독이다.

SOMETHING in the Mist!!!!

SOMETHING in this Film!!!!!!!!!!!!!!

영화의 줄거리는 하등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다. 영화 포스터 그림을 그리는 데이빗은 어느날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에 집이 난장판이 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들과 같이 생필품을 사러 읍내에 나온다. 그전날밤의 사고로 인해 읍내의 마트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있다. 그런 가운데 동네의 한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면서 마트로 뛰어들어온다.
"SOMETHING in the Mist!!"
순식간에 덮쳐오는 안개를 두고서 사람들을 자연히 마트안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견제하고 싸우고, 죽여나가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결말은 과히 충격적이다. 이 결말을 놓고서 Film2.0의 프리뷰는
원작과는 확연히 다른 결말을 택하고 있는 영화의 결정은 상당한 의아함을 남긴다. 소설이 열린 결말을 지향하며 희망도 절망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현재의 암울함을 끈적하게 이어나가고 있는 데 반해, 영화는 훨씬 더 충격적인 결말을 택한다. 그러나 파국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결정에 대해 쉽게 납득할 만한 근거도 마련되고 있지 않거니와, 이어지는 상황 종결은 관점에 따라서는 헛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라고 적고 있다.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좀 더 재미나고 의미있게 보는 법은 헛웃음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둔다. 극장에 가서 꼭 볼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플롯상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분위기를 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유를 어떻게 범주화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거대한 공포를 근간으로 하여 중요한 인물들을 (자본주의의 전시장이자, 전쟁터인) 마트로 몰아넣는다. 아니 엄밀하게 보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떠한 공동체 혹은 집단, 직장 또는 반대로 물리적인 건물, 광장, 공원 등에서 어떤 부분을 딱 택해서 수십명을 뽑아내더라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영화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곳이 다른 곳이 아닌 '마트'라는 곳이다. 그곳은 언제나 풍요롭지만, 한편으로 상품들은 언제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수많은 캠벨 수프 캔들이 간택되어지기 위해서 항상 제일 앞에 나오려 하고, 그것은 결국 영화를 다보고 났을 때, 그 안에 수많은 인간들과 다를 바없다. 아니 그 인간들이란 결국 하나의 캠벨 수프 캔과 다를 바가 없다. 어찌되었든 영화는 마트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균열이 드러난다.  그것은  여러가지 양상을 가진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계급적 갈등,  외지인과  현지인들사이의 지역적 갈등,  젊은이와 나이든이 사이의 세대적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인과 비종교인(혹은 광적이지 않은 종교인)사이의 원형적 갈등(이는 분명 종교적 갈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어찌되었건 주인공 데이빗을 근간으로 그 Something을 확인한 사람들은 공포감을 갖게 되고 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대처하려고 한다. 이 가운데에 주된 갈등이 원형적 공포를 주술적으로 풀어내려 하는 카모디 부인(마샤 게이 하든)을 중심으로 풀려나간다. 이 때 부터는 영화는 외부의 공포를 내재화 시켜서 사람을 선동 혹은 다스리려 하는 보복의 기독교같은 중세적 커뮤니티와 이성적 사유를 중심으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는 근대적 커뮤니티 사이의 전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했을 때는 오히려 영화가 시대에 너무 낙후되어 보이지 않느냐라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이다. 21세기는 여전히 중세와 근대가 계속적으로 진행중이다. 심지어 기득권을 위해서 언제나 공포 혹은 두려움을 '발행'하는 행위들이 서슴치 않고 일어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보고 있으면 그렇다.
그러나 결국에 영화는 한쪽을 선택해서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내러티브적 한계성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데이빗을 위시한 무리들이 과연 이 곳을 벗어나서 살아날 수 있느냐 라는 부분이다. 즉, 다시 말해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마무리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영화의 2/3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갈등의 전개양상에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마트를 벗어나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과연 가장 바깥의 세계 또는 신의 눈에서 그들은 어디로 향할 수 있을 것인가? 기름이 다 될때까지 달려보자고 해서 나갔고, 혹시나 그들을 덮칠 두려운 생물체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끝내 챙겨온 권총의 그 트리거는 어떻게 쓰일 것인가? 이 결말은 정말로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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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든 '마녀'같은 카모디 부인(마샤 게이 하든 분)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중심점은 말 그대로 이 시대를 은유하고 재현해내는 지점이다. 한 집단에 커다란 숙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두고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다시 그것이 어떤식으로 커뮤니티를 분화시키고 그들은 어떠한 갈등양상을 전개하며, 해결해가는가를 잘 들여다 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단선적이지 않고 다층적임을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마트를 하나의 국가 혹은 집단에 위치시키고, 카모디 부인을 굉장히 보수적인 집단에 대입하고, 데이빗을 조금 진보적인 성향으로 사람으로 위치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다. (물론 이 하나의 범주화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미국 사회의 현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현실에 이 영화를 병치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소소한 대표성들을 찾는 것 또한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상품들간의 경쟁은 다시 마트안에서 인간들 간의 경쟁으로 대치되고 은유된다. 또한 그 분화된 집단 혹은 조직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결말이 뻔히 보이기 까지 하다.(이 부분에서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 '경쟁'을 강조하는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엔 커다란 "SOMETHING"이 존재하는 마트 바깥 = 개미지옥 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고, 거기서 살아남는 방식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쳐밀어넣는 것이 아님은 분명할 진대, 카모디 부인은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상황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제물을 찾아나설 뿐이다. 마치 기업의 구조조정, 혹은 한국 사회에서 비리가 터졌을 때 그 기관의 장이 사퇴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데이빗을 중심으로 한 집단의 이성은 역시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데에 아주 좋은 수단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가야 하는가를 합의를 통해 도출해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까지는 이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끝내 결말에 가서 배반을 당한다. 글쎄 감독은 무슨 생각인걸까? 결국에 이성 혹은 감성에 절대적 힘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인가?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헛헛해 하거나, 심지어 분노를 하거나 혹은 악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은게 미리 내리는 결론이다.
결국 영화에서 가장 멀리 벗어났을 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수단으로써의 이성과 절대 버리지 말고, 지켜야할 가치로서의 감정을 같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설의 결말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멘트라고 한다. 그것은 '희망'이라는 추상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것을 영화적으로 변주해 낸 결말이지, 이것을 두고서 영화와 소설이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좀 미흡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별점 : ★★★★★

뱀발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잡생각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크리처들은 어디서 왔을까? 사실 다른 영화들을 만들면서 그려진 수많은 스케치들을 모아서 여러 사람들에게 가장 무섭거나 징그러운 것들을 골라보라고 해서 선택한 것들을 아닐까 하는 잡생각.
왜 인간들이 두려워 하는 괴물 혹은 외계 생명체들은 갑각류와 비슷한 걸까. 혹은 곤충과 비슷한걸까? 인간은 키틴질이 아닌 soft한 피부를 갖고 살기 때문에 단단한 갑옷 같은 피부를 가진 생명체에 대해서 원형적 공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일리언, 에일리언 마스터, 프레데터, 프릭스, 스타쉽 트루퍼스 등등)
영화에는 다양한 크기의 생명체가 나온다. 마치 거미를 형상화한 녀석들. 그 작은 것들과 영화 말미에 나오는 공룡보다도 거대할 것 같은 절대적 크기의 거물. 그런가 하면 최초로 등장한 연체류의 촉수와 벌침을 합쳐놓은 생명체 등등등.
한편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에게는 이름이 있을까? 뭐 영화를 만들면서 부르는 이름은 있겠지만, 영화상에는 누구도 그것을 불러주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알 수 없다. 언뜻 극장에서 보았던 D-war의 크리처 중의 하나인 '불코'가 떠올랐다. 그건 뭐하러 이름을 붙이고, 굳이 불러주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외형적 디자인 같은데에서 어떤 맥락들이 있을까?

마샤 게이 하든의 연기는 정말 끝내준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 역시 그녀의 종으로써 움직여야 할 기분이 든다. 그녀가 가진 분위기는 맹목적인 느낌이 있다. 그녀는 잭슨 폴락의 전기 영화인 <Pollock>에서 폴락의 연인이자 정신적 지주로써 등장했고, <미스틱 리버>, <밀러스 크로싱> 등의 독특한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배우이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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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뭔가 여태껏 봐왔던 영화들을 보는 것과 다른 지점이 나타난다. 지난 주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알렉산더 소쿠로프/ 특별전의 마지막날 마지막회에 이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게 된 것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서사에 여전히 길들어져있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번 특별전에서 4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작년에 멜번영화제에서 본 <태양>을 포함해서 5편의 영화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의 영화는 여전히 나에게 생경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서 뭔가를 적어봤자, 그것이 소쿠로프의 스타일에 관해서라기 보다는 이 영화 한 편에 대한 짧은 감상과 생각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힌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요즘은 자꾸 그 고통을 마주하고 싶어진다. 변태가 되어가고 있다. ㅡ.ㅡ)

이 영화의 단적인 특징(?)이라면 영화 전편이 1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탄생하고, 멜리에스가 우연히 편집의 원리를 발견한 순간 이래로, 장편영화가 온전히 1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히치콕의 <로프>는 논외로 치자. 눈속임에 의한 것이니까...) 그것을 해낸 사람이다. 해냈다기보다는 상상했다고 해야 할까?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선택한 영화. 1쇼트 영화는 디지털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전히 필름은 이 영화를 배신한다. (상영 프린트의 매 권이 바뀔때마다 튄다. 디지털 상영만이 이 영화를 온전히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필름은 디지털로 완성한 영화적 현실을 배반한다.


1. 카메라를 타고 떠나는 하나의 경험, 엑설런트 어드벤쳐!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두 명의 화자를 두고서 펼쳐지는 이야기이고, 한 사람은 카메라의 앞에, 또 한 사람은 전적으로 카메라 뒤에 놓여서 자칫 영화가 흐트러질 수 있는 것을 끌고 가는데 조력자의 역할을 할 뿐,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제시해준다면 더 재미날 듯). 내러티브를 벗어나서 이 영화는 사실 하나의 체험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은 거대한 항해! 영화는 카메라라는 배를 타고서 떠나는 여행이다. 카메라 앞의 화자가 저 멀리 무엇이 있는지를 내다보고, 알려주며 안내하는 자(뭐라고 부르더라...)라면 카메라 뒤의 화자는 키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이른바 <러시아 방주>라는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거다. 그리고 미술관 안의 공간을 누비고, 역사도 넘나들며 미술과 음악에 관한 관광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내러티브 보다는 영화 자체가 하나의 여행 혹은 체험이라는 차원에서 다가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적으로 역사를 넘나들고 만나서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을 뿐, 이는 정말로 신나는 엑설런트 어드벤쳐!! 인 셈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카메라 뒤의 긴장.
내가 영화쟁이라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드는 긴장감이 있었다. 절대적으로 머릿속으로 계속 찾아드는 물음표가 있었다. 지금 저 카메라 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저 카메라를 이끌고 가는 배우는 연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저 사람은 카메라에서 때때로 벗어나고 있는데, 카메라를 잡고 있는 촬영감독, 또 다르게 쫓아갈 감독, 그리고 여러 파트의 스탭들. 사실 배우들은 각각 나뉘어진 공간에 따라서 카메라가 등장하는 순간에 타이밍을 맞추어서 연기를 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찍고 있는 스탭들은 카메라가 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멈출때까지(다시 말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쉼없이 일을 해야 한다. 이는 다시 스탭들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거꾸로 말해 오히려 스탭들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체험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 다시 카메라 앞으로.....
그런가 하면 수천명의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카메라에 반응(!)한다. (물론 합을 어느정도 맞추긴 했겠지만) 특히 수천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마지막 무도회 장면은 카메라가 배우를 따라가는 동안에 지나치게 되는 수백명의 배우들이 적절하게 카메라를 비켜서고 지나치고, 카메라는 또 그들을 잘 따라가고 있다. 이쯤 되면, 영화는 카메라를 중심으로 앞과 뒤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도대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뭐 혹자는 북한의 매스게임처럼 하면 가능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무도회가 끝나고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엄청난 인파와 그 가운데를 빠져나오는 카메라는 가히 근두운을 탄 손오공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식의 촬영은 하나의 표현 수단일 뿐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아니다'고 소쿠로프는 말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식의 촬영이 목표가 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도대체가 100분의 영화를 1쇼트로 완성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한다면, 가서 당장에 따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표현수단이라고 한 것은 나쁘지 않은 답이라고 본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영화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가치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안에 담긴 내용을 따지는 것은 하찮지는 않겠지만 부수적이라고 생각한다.(실은 내용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시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번 고려해보겠지...)



딱히 정리된 글이 아니라서 언제나 골치 아프다. 하지만 꼭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으리라....


뱀발.
만약 내가 이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고 상상했을 때, 난 이 영화를 처음에 시작할 때 뭐라고 소리치고, 마칠때는 뭐라고 해야할 지 궁금했다. 쇼트를 찍는 것이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것이기도 하고.... 액션, 컷..  시작, 여기까지.. 뭐 구호가 중요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시작과 마무리가 굉장히 달라보이는 느낌이 있었단 말이지.... 그리고 카메라를 내내 따라가는 동안에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아니면 어떻게 따라가고 있었을까? 시나리오 상 끄트머리에 다가갔을 때,  NG가 나면 어떡하나?... 망연자실하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얼마나 난감할까.. 별의별 잡생각이 다 들었다.
012

오늘은 미등록된 포스터들을 정리하는 와중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났다.

포스터를 정리하는 일이지만, 난 왠지 포스터를 찾았다기 보다는 '만났다'고 표현하고 싶다. 마치 영화를 만나는 것처럼..
게다가 에드워드 양(양덕창)은 뭐랄까?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젊음을 유지했던 감독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무 우습게도, 너무 부끄럽게도... 혹은 너무 안타깝게도.. 나는 영화광이 아닌 영화쟁이로써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하나 그리고 둘]이 내가 본 첫 작품이었다. 몇년 전에 Film2.0의 부록으로 나눠줄때 옳다구나 DVD 한 장 더 늘리는 데 급급했던 나의 허영이 그의 작품을 만나게 해준 계기였으니 더이상 말해봤자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기억에 그렇게 받은 DVD조차 한 달은 그냥 꽂아두었던 듯 싶다. 어찌되었건, 부피 채우기는 항상 나의 허영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켰다가 이내 곧 부끄러움을 주는 까닭이 겨우겨우 꺼내서 본 영화다. 당연히도 미루고미루는 와중에 두려움 (혹은 변명?) 중 하나는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일단 시작하고나서는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왠지 거리를 둔 카메라가 그다지 다이나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지만, NJ와 틴틴, 양양의 애정 플롯들이 평행하게 교차하는 순간에 나는 완전히 놀라버렸다. 아마도 난 그 때 처음으로 영화가 영화답다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그의 영화는 현실을 지극하게도 잘 담고 있었다. 더도 덜도 아니게.....

그리고 2005년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대만 뉴웨이브전에서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았고, 그제서야 벼르고 벼르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났다. 4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에 역시나 쫄아서 들어갔지만, 단 한번도 졸지않고 좌왁 빨려들어가서 보았다. 마지막에 정녕 그녀를 찌르던 장첸의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영화는 대만의 근현대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것은 남한의 모습과도 너무 흡사했다.

그리고 참석하진 못했지만.. 올해는 양덕창을 기리면서, 부산영화제에서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대부분은 보았지만 그의 진정한 데뷔작인 [해탄적일천]을 부산이 아닌 서울, 서강 데뷔작 영화제에서 볼 기회가 있었고... 당연히도 달려가서 보았다. 역시나 그의 힘은 뭐랄까.. 자신히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한 확고한 방향성. 그리고 그것을 복잡하지 않고, 젠체 하지 않는 평범한 방식, 그러나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개인과 사회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도 않으면서 잘 담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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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포스터


이제 더이상 그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장편이 8편밖에 되지 않은 많지 않은 필모그래피에서, 그의 영화들이 언제나 우리에게 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더욱 자주 갖고 싶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의 포스터를 만나서, 기뻤지만... 흥분하진 않았다. 무언가 아스라한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떠올리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