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PINA 3D를 보았다.
난 피나 바우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이름만 아는 수준, 그리고 무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배경지식이 없다.
그러나 빔 벤더스가 연출했다는 이 영화는, '3D'라는 수식어가 영화 앞에 붙기 시작한 이래 내게 가장 관심이 가는 영화였다.

기본적으로 그동안에 몇 편의 3D 영화를 보면서 (고전적인 기술 말고, 이른바 '아바타' 이후), 난 절대로 3D라는 기술이 왜 영화에 들어와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굉장한 피로감. 보고 있으면 어느 새 눈이 아파온다.
두번째, 인지에 관한 문제, 우리가 정말로 '입체적'으로 사물을 인지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물론 사물의 크기에 따라서 거리감을 가지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정말로 '입체'인가 라는 문제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2D)에는 '원근법'이 보편화되었고, 이는 사람이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가까운(!) 표현법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서는 이 원근법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회화이후, 카메라가 발명되었고, 이 카메라의 렌즈는 결국 다시 원근법의 원리에 의해서 렌즈가 '하나'로 채택된다. 인류는 태초부터 눈을 2개 달고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은 아마도 '인지'(perception)의 문제다. 원근법을 이용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보는가를 정의한다. 실제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재현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인지'하느냐 하는 감각을 재현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진기에 렌즈를 하나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보편화되어있다. 즉, 사진 기술의 모든 공학에 '시간'의 차원을 입힌 '영화' 역시 하나의 렌즈로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그 자신의 예술성을 담보하기 위해 '서사'를 도입하고, 영화는 '이야기' 중심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물론 영화의 역사 이래 여전히 치고 나오는 질문은 바로 '형식'에 관한 것이며, 무엇이 영화를 스스로 영화답게 하는가? 어떤 것이 영화적인가? 라는 질문 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아바타'를 보면서, 어떻게 이 영화를 보아야할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난 일단 이 영화가 재미가 없었다. 내용적으로!!! 뭐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입과 손이 동시에 아픈 일이고... 어찌되었건 '3D' 블록버스터. 제임스 카메론. 이라는 수식어들에서 중요하게 다뤄줘야 할 것은 결국 3D라는 기술이었다. 다시금 정성일의 글을 불러온다.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59556 또한 이 글 안에서 언급하는 다른 글. ‘최후의 승리까지 한뼘 더 필요해’ <씨네21> 736호

이 두 개의 글을 읽는 것은 나름 3D라는 기술에 대한 어떤 질문 제시로서 괜찮다. 그러나 각자의 답 혹은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리라. 나는 PINA를 보면서 비로서 질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에 몇 편 보지 않은 3D영화에서 왜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오히려 피곤해만 했었는지.... 일단 PINA의 특징을 몇 가지 거칠게 열거하자면,

- PINA는 다큐멘터리이지만, 일종의 공연 기록영상으로써, 내용적인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가 있지 않다. 공연 자체가 중요한 내용이다.
- 이 내용은 그 자체로 형식이 된다. 공연을 찍는다는 것!
-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거의 없다. 일단 무용수들이 무대에서 뛰고, 그들은 계속 움직이면서 자신들의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 대부분의 FS이거나 와이드샷이 많다.
- 3D를 구현하면서, 일반 2D 영화같은 심도(혹은 입체감)를 발견할 수는 없다. 전, 중, 후경에 있는 무용수들은 대부분 초점이 맞으며, 화면에서 튀어나와(!) 보인다. 그래서 눈이 바쁘다. 이것은 보통 공연을 보는 것과 비슷한 점일 수 있다.

결국 2D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포커싱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포커스의 이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장면을 비스듬하게 찍어도 모든 사람을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이건 그럼 딥포커스인가? 일단 임시적으로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딥포커스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그래서 무슨 상관이냐고? 이렇게 찍히고, 영사되는 화면에서 물음은 자연스레 나온다. 3D영화들은 애시당초 3D를 감안하고 찍는다는 전제에서, 그렇다면 그 영화들은 아직 3D 시설이 없는 곳에서 본다고 했을 때 그 차이란 무엇인가? 뭔가 좀 도드라져 보인다는 단순한 대답은 여기서 그만. 그런 말을 할 사람들과는 더이상 얘기할 시간이 없다. 3D(로 찍혀진) 영화를 2D로 본다면, 그것은 과연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인가? 그 수식어에 진짜 질문이 없는 수많은 헐리우드 3D영화가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냥 (3D) 영! 화! 이지. 3D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을 피곤하게만 할 뿐이고. 그 피로감에 대한 보상으로 약간은 도드라진 '신기함'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지를 인식하는 '인지'에 대한 눈속임 뿐.

다시 PINA얘기로 돌아오자. 내가 받은 느낌을 이렇게 표현해본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으로 돌아온 세계는 이미지에 원근법을 적용시키면서 인간이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PINA에서는 새로운 지점을 제안한다. 중, 후경 들에 존재하는 풍경과 다른 인물들, 움직임들의 포커스가 맞고, 고스란히 '존재'한다. 이는 마치 르네상스의 캔버스 위에 고대, 중세의 신화적 존재가 입혀진 듯하다.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들은 오히려 2D위에 2D처럼 기록했다. 한국의 민화들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작가의 자의성(혹은 또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중요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그려진 피사체들이 주를 이뤘고, 거의 대부분의 피사체가 초점이 맞아 있었다. 피사체들은 말 그대로 '존재'했다. PINA는 그렇게 3D를 구현해낸다. 빔 벤더스는 새로운 질문을 야기할 토양을 마련한 셈이다. 

이제 영화에서 3D란 얄팍한 신기함을 넘어, 그 자체로 형식이며, 새로운 붓이 될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제 포커싱에 의한 감정적 거리 혹은 인지적 거리를 만들어내는 고전적 서사의 영화가 아닌, 그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존적 피사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이제 '3D'영화 시대의 한 발판으로 보인다.
이는 다시 영화가 스스로 영화다움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라는 시선, 르네상스의 원근법에 종속당해서 그대로 재현되는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문학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2시간동안 우리를 붙들어두었던 영화는 이제서야 스스로 종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셈이다.
인간의 인지와는 관계없이 이제 영화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드디어 개봉했다.
언제나 돌아오는 명절 시즌에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잔뜩 고스톱판으로 얼굴을 붉혔다가, 돈을 모조리 딴 사람이 들고 나서는 판돈의 모음으로 극장은 넘쳐난다.
당연하게도 돈을 딴 사람은 온갖 생색과 자부심으로, 잃은 사람은 얻어보는 영화로 대충 만족하며 마무리하는 명절의 극장 풍경이다.
그 풍경에 이번에 특이하게(?) 끼어든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나 컨셉에 대한 설명은 간단히 생략한다. 포털에서 제목만 입력해도 바로 나온다. 굳이 이 블로그에서 수고하면서 읽을 필요는 없다.


영화의 출발, 그러나 실망스러운 이야기.

'민자영'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영화는 이 질문에서 시작했을 것 같다. 우리는 "을미사변" 혹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면서 재조립해왔다.
그러나 영화는 '명성황후'가 아닌 '민자영'이라는 한 "여성"의 사랑을 다루고자 한다. 
말그대로 그녀의 이름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이 영화는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기획의) 출발은 좋았다.
동명의 원작인 야설록의 소설을 원전으로 영화는 각색되었는데, (나 역시 원작은 읽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한다) 
영화 안에서의 이야기는 일단 굉장히 실망스럽다.

예비 중전과 사공의 사랑이야기라는데, 다른 모든이들도 공감하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언제 어떻게 사랑에 빠져드는가 하는 지점이다.
영화는 대놓고 첫 장면을 잘못 풀고 있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무명'(혹은 요한)의 어린 시절을 잠시 보여준다. 무명이라는 인물이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서학을 믿게 되고, 그것이 발각되어서 엄마는 목이 달아나고, 그것을 막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흑백장면으로 오프닝을 처리했다. 사실은 뒤를 보지 않고도 이 장면은 굉장히 뜨악했다. 이 장면을 보고 나면, 아무래도 이 아이는 뻔히 '무명'(즉, 조승우)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가진 배경인, '천주교'가 과연 이야기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일까 하는 점이다. 
그렇게 씬이 지나고 나면, 개화기의 어떤 풍광들을 계속 비추다가, 잠시의 역사적 배경 설명, 그리고 등장하는 민자영의 모습이다. 
자영은 중전 간택을 앞두고, 혼자서 무언가를 해내는, 그리고 기대감을 갖고 있는 신여성의 모습을 보이고, 이내 혼자서 바닷가를 다녀오는 '신식 행동'을 보인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사공 무명. 
둘은 하루 동안의 긴 데이트를 한다. 자영에겐 아주 중요한 추억과 기억이 자리한 바닷가. 그러나 그 중요한 추억과 기억은 무엇인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대사로 '들려줄' 뿐이다. 그런가 하면 그 긴 하루의 시간과, 아무도 없는 배라는 공간, 탁 트였지만, 역시 둘만 남은 아름다움 바닷가에서 무명과 자영은 서로 뜬금없는 대화만을 하며, 직접적으로 사랑에 빠질만한 행동도 하지 않고, 카메라는 더더욱 어떤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앞으로 멜로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최소한의 선행조건일 텐데, 영화는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 

그리고 무명은 혼자서, 자영에게 '이미 빠져들어서' 사례로 댕기를 달라는 둥, 오바를 한다. (이건 명백히 오바다.) 그런 오바가 펼쳐지는 가운데, 자영을 습격하려는 자객들이 나타나고, 뱃사공에 불과했던 무명은 갑자기 무림 고수의 풍모를 보여준다. 그리곤 자영을 구해낸다. 여기서도 관객들은 좀 의아함을 가지게 된다. 영화의 초반부이기 때문에 어떤 무협 서사의 관습인 양, 절대 무림 고수가 초양에 묻혀지내고 있었다라는 설정을 억지로 넘겨받을 수도 있지만, 명백히 어색함은 남는다. 게다가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어려서 천주교를 따르던 천주학쟁이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천주교와 무림고수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다.)

참아준다. 여기도 참겠다. 이후, 무명은 자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언제 느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추석날 전부치던 '며느리'도 모른다.) 그리고 평생 목숨을 바쳐 자영을 지키겠다는 오바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자영은 나중에 궁궐에서 자신을 왜 그리 지키려 하느냐고 무명에게 묻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가관이다. 무명은 '어려서 죽임을 당한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아픔이 남아있어서, 자영만은 꼭 지키겠다'고 대답한다. 이 대목, 역시 좀 코미디다. 굳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작법을 논하진 않겠다. 이 말 자체가 좀 이해가 되는가? 엄마를 지키지 못해서, (그래서 무예를 익혔다고도 스스로 상상했다. 나 열심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게 자영이다. 좀 있는 체 하면서 정리하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지키지 못해서, 연인에 대한 사랑을 지키겠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언뜻 '사랑'이라는 항목을 보면 성립가능한 문장 같지만,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잘 생각해보면 한강물 더럽힌 걸 못내 잊지 못해서, 대동강물을 깨끗하게 지켜내겠다는 말이다. 즉, 오류의 문장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가장 심각한 반칙을 일으키고 만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더 이상 영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어떡하나? 이후에 남은 러닝타임은 1시간도 더 남았다.

좀 더 매끈한 이야기적 출발을 하려면, 영화의 첫장면은 무명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 자영의 어린 시절이 나와야 했었다. 그것도 자영과 아버지 사이의 그 잊지못할 기억이 영화의 첫장면으로 등장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무명의 어린시절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바닷가에서 이러저러한 데이트 하면서, 결정적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넣어주기만 하면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을 지키는 데 무슨 말이 필요하나? 엄마를 지키지 못했다 어쨌다는 둥?? 제대로 빠지기만 한다면, 사랑을 지키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영화의 이야기는 정말 uncanny하다.


견딜 수 없는 CG의 도배, Uncanny Valley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후, 엄한 방향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려 한다. 그 첫 시도는 바로 대원군의 호위무사인 뇌전과 무명의 대결.
밤에 홀로 배위에 누워 있는 무명에게 뇌전은 '조각배'를 타고 나타난다. 이 장면 조차 관객들은 피식 하는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서로 현란한 액션을 선보이면서 대결한다. (꽤 긴 장면인 이 시퀀스는 딱 1줄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누가 봐도 명백한 CG는 관객들을 당황케 한다. 너무 어깨에 힘을 준 영화속 캐릭터들은 관객의 마음을 저쪽으로 차버린채 지들끼리 현란한 칼싸움을 벌인다.
누가 봐도 명백한 CG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CG가 주는 느낌에 대해서 영화를 만든 이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했다.

Uncanny Valley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본래 로봇공학에서 나오는 용어이다. 그래프를 잠시 설명하자면, 가로축은 '인간과 닮은 정도'이고 세로축은 '(보는이들 혹은 인간들이 느끼는) 친근함'을 뜻한다.
그리고 uncanny는 1 초인적인, 초자연적인, 이상한, 비정상적인   2 섬뜩한, 으스스한  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Uncanny valley라는 용어는 사람들이 만화 캐릭터와 같이 희화화된 캐릭터는 귀엽게 느끼고 친근감을 느끼는 반면에 그 캐릭터가 점점 사람에 가깝게 만들어 질수록 실제 사람과 캐릭터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게 되고 그 차이로부터 불편함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현상을 뜻한다. 이 개념은 일본의 로봇학자 Masahiro Mori 교수가 1970년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로봇과 같은 “진짜” 인간이 아닌 개체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론이다. 즉 Barely human 과 Full human 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로봇에 대한 호감도는 로봇의 생김새가 인간과 비슷해 질수록 증가하다가 로봇의 생김새가 인간과 어중간하게 비슷해 지는 지점에서 급속히 떨어지고(거의 좀비 또는 시체의 수준까지) 이후 로봇이 인간과 더 비슷하게 되면 다시 증가한다고 한다. 그 변화폭은 로봇이 움직이게 되면 크게 증가한다.

참고로 아래 로봇의 사진들을 올린다.

1차 산업용 로봇. 딱 기계라는 느낌을 준다.

군사용 로봇.

인간과 닮은 로봇이라는 뜻의 휴머노이드. 2족보행을 한다.

휴머노이드의 인간과 유사성을 재현하겠다며, 아인슈타인의 머리를 붙였다. 이제부턴 역겨움이 시작된다.




영화에서 이 씬은 위의 이론이 명백하게 들어맞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누가봐도 CG이면서, 3D로 렌더링되어서 싸우는 뇌전과 무명은 우리가 쉽게 보지는 못한 장면을 재현해내서 '멋있다'라는 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짜라는 느낌과 함께, 왠지 이상한 역겨움을 가져온다. (아쉽게도 영화의 한 스틸이나, 동영상 장면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영화는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욕이 앞서서, 배우들의 얼굴이 몰핑된 클로즈업까지 보여주는 기괴함을 감행한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아휴~하는 소리를 토해낸다. 
물론 여태껏 이런 장면을 보여준 영화가 최초는 아니다. 올해만 해도, <국가대표>에서 스키점프를 하는 선수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로 재현 불가능한 장면을 3D의 CG로 처리해서 새로운 쾌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박쥐>에서 날아다니는 송강호와 김옥빈의 모습을 비슷한 느낌의 CG로 보여준 적이 있다. 
물론 예로 든 2편의 영화들이 uncanny valley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들이 탄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두 영화들이 정말로 현실에서 실사촬영을 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살짝 CG를 활용하는 선에서 그치기 때문에 용인하면서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의 CG는 도가 너무 지나치다. 이야기도 따라주지 않고, 분위기도 받쳐주지 않는데, 무협 액션씬의 쾌감을 무리하게 재현하겠다는 욕심을 전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3D렌더링을 내내 돌리고 말았다. 그래서 영화는 계속해서 uncanny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나아가 관객들은 영화에 대해서 무성의하다는 생각까지 가질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실사로 찍어주면서 정말로 무림고수들의 정통한 대결을 보이다가, 특별한 기술을 위해서 쓰는 CG였다면 조금은 용납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싸우는 배경은 또 어찌나 오바인가.)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이런 실수는 대원군의 군대 동원 장면에서 또 한 번 재현된다.

또 하나 나비의 CG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제목(엄밀히는 원작의 제목)을 지어놓고, 뭔가 '나비'가 등장해야 겠다는 강박에 시달린 나머지, 쓸데 없는 CG 나비를 등장시키고 있다. 영화에서 나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괜히 쓸데없이 날아다니느라 바쁜 불쌍한 캐릭터, 나비!
(이 나비 CG를 보면서 떠올랐던 것은 오우삼의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비둘기이다. 그는 홍콩에서 활동할 당시, 실제 비둘기를 동워해서 가장 멋드러진 비둘기 장면을 찍어내곤 했다. 그러나 헐리우드에 가서 만든 영화들, 예를 들면 [페이스 오프], [미션 임파서블 2] 등에서는 CG로 만든 비둘기가 등장한다. 난 이 장면들에서 격세지감과 함께 이상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건드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이 드는 "민자영"이라는 개인.

그런가 하면, '민자영'이라는 캐릭터 역시 시대의 비극과 개인의 삶이 제대로 병치되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이는 영화적 이야기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데서 기인하는 게 크지만, 그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벌어지는 명성황후 민자영의 사랑은 왠지 그녀를 거꾸로 이상한 인물로 비춰지게끔 만든다.
그다지 민족주의자가 아닌 나에게도 이러한 인상인데, 혹시라도 열정적인 민족주의자가 이 영화를 본다면, 다분히도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걸어올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은 내가 한번 오바 해보는 거다.) 한 명의 신여성으로서 신식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고, 열강들 사이에서 살아남고, 독립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명성황후과 사랑놀음에 정신이 팔린 민자영이라는 캐릭터는 하나의 인물로 잘 섞이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영화 내에서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지, 역사안에서 명성황후 민자영에 대한 논평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잘 못 건드려서 영화 속의 캐릭터는 다 분리되고 파편되어서, 앞뒤가 안맞는 행동을 하느라고 정신팔린 인물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명성황후"라는 인물은 역사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드라마와 뮤지컬, 심지어 뮤직비디오 등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장면을 숱하게 봐왔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신화화 되어있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진은 또 다른 명성황후 시해장면을 찍기 위해 고뇌했을 것이다. 물론 이야기가 일단 그녀의 인간적, 개인적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 성격은 출발부터 달라지는 감은 있지만, 시해장면의 마지막은 또 어이없이 예상대로 진행되고 만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 '너희들이 두렵지 않다'는 상투적인 대사는 국민적 정서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던 듯 하다. 이런것들을 다 빼버린다면, 관객들의 거부감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그래서 나오는 대사는 "나는 조선의 국모 민자영이다"라는 대사였다. 이 대사에서 나오는 '국모'와 '민자영'은 영화가 명백하게 실패하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두 가지 정체성을 같이 가져갈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그러나 영화 초반부부터 실패해버린 무명과 자영의 사랑의 감정을 대비 지점에서 이 대사 '국모 민자영'은 왠지 잘 붙지 않는다. 뭔가 어색한 기분을 정녕 지울 수 없다.


아쉬움과 실수의 영화, 나아가 실소를 하게 만드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토록 총체적인 어색함과 어눌함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결국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등을 좌석에서 떼어놓았다. '자영~'이라는 이름을 자꾸 불러대는 무명, 그리고 어떤 관객도 사랑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데 군란의 난리 때 도망가서 동굴에서 펼치는 사랑의 키스신(황순원의 소나기인가?), 그리고 은근 삼각관계를 병치시켜서, 질투심을 유발하면서, 자신의 승리를 누리기 위해 무명을 침소밖에 세워두고 자영과 정사를 벌이는 고종 등의 장면을 보고 있으면 계속 웃음이 나오기만 했다.
이 영화는 추석날 가족들끼리 벌인 고스톱에서의 승부를 무마하는 오락 영화가 되기는 커녕, 돈을 딴 사람이 잃은 사람이나 모두 본전 생각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고, 그들 모두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을 여실하게 재현하고 말았다. 정녕 uncanny valley에 빠져버린 uncanny story, uncanny movie인 셈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수많은 영화가 있고,
결국 아무리 영화를 좋아해도 그 모든 영화를 보고 사는 것은 바닷가에서 쓰나미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다 보면, 마치 비교체험 극과 극, 혹은 영화대 영화 같은 데에 쓰일 법한 이야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혹은 버스에서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보다가, 어떤 두 나무의 공통점을... 그리고 차이점을... 찾아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룰 영화는 바로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10억] (조민호, 2008)과 [생존게임] (El Metodo, The Method, 마르셀로 피네이로, 2005) 라는 영화들이다. (찾아보니 [생존게임]의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무릇 사는게 경쟁이고, 그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소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나 문학 등의 예술과 문화 매체에서 그러한 이야기들을 자꾸 또 보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작가가 생각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어떠한가, 또는 그만의 결말 혹은 세상과 인간을 다루는 시선에 있다고 보겠다. 영화를 그저 재미로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예술작품이란 난 여전히 시대 혹은 현실과 언제를 불화를 일으킬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10억].

[정글쥬스], [강적] 등의 선이 굵은 남성영화를 찍어온 조민호 감독. 그가 10억이라는 상금을 놓고 여러 사람이 벌이는 서바이벌 게임에 관한 영화를 내놓는다고 했을 때,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호주에 다녀온 경험이 있고, 그 와중에서도 서호주의 풍광은 직접 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대치는 약간 있었다. 한국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살고 있는 8명의 젊은이들. 그들이 낯선 육지내 무인도 같은 서호주의 혹독한 땅덩이 에서 상금을 타기 위해 벌이는 경쟁.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이 인터넷으로 상영이 된다는 자극적인 소재. 설정 자체는 아주 재미난 상업영화로서의 요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거꾸로 가본다.
자 이런 소재를 갖고, 당신이 감독 혹은 작가라면 무슨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이 질문을 갖고서 영화를 보기를 바란다. 영화는 언제나 따라가다 보면 관객이 속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게임의 공정성은 끝내 도마위에 잘 오르지도 않는다. 관객은 언제나 매저키스트적인 쾌감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렇다 하여, 작가가 무미건조한 사디스트만 된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영화적 쾌감은 반감 되고 만다. 어떤 복선이 필요하고, 장치가 필요하고 하는 식의 영화적 작법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겠다. 어찌되었거나, 8명의 젊은이가 등장하니까 이 사회 안에서 서로 마주침없이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된거다. 그랬을 때 그들은 서로가 어떤 부딪침을 가지게 될까? 여기서 '어떤' 이란 단적으로 "except 10억"이다. 영화의 제목은 10억이고, 서바이벌 게임이지만, 그들 사이의 갈등이 단지 10억이라는 돈밖에 없다면, 결국 그 영화는 제목만 보고도 다 본 셈이 아니겠는가? (호주라는 나라의 생경한 풍광이 있다고?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풍광은 호주말고도 많다.)

영화는 중간즈음에 이르러 애를 쓴다. 박희순의 사무실을 때려부수는 과정에서 박해일이 발견하는 사건 정리 파일이다. 내심 개인적으로 영화는 이제부터 본격적이겠구나 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 파일은 박해일 혼자서 숨겨버리는 걸로 끝나버린다. 아... 이제 영화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아무리 세상에 돈때문에 살고 죽고, 서로 물어뜯고 죽이고 하지만, 그걸 단순화 시키는 것은 인간적인 이야기를 포기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고시생, 증권맨, 독립PD, 해병대 출신, 운동선수, 모델지망생 등등의 각자의 삶을 꾸리는 젊은이들, 모두가 '돈'만 있으면 자신의 꿈이 다 이루어 지는것일까? 돈 말고도 다른 부분은 충분히 많다. (뭐 그렇다고 식상한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겠지? 아무튼!!!)
여기서 캐릭터들이 진짜로 충돌하고 있다는 지점은 없다. 각자의 삶들에서 다른 사람의 삶이 부럽다거나, 혹은 밉다거나 하는 부분이 있나? 아마도 10억이라는 타이틀을 쫓기에 급급한 나머지 마지막에도 뻔한 반전(?)으로 마무리 되어버리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누구 하나 살아남은 인물(이거 밝히면 스포일러인가? 그럼 말지 뭐.)이 10억이 든 돈가방을 들고, 종로 한복판으로 유유하게 걸어들어가는 거다. 결국 어떻게 살든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냥 그렇게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사는 게 장땡이라고 말하는 걸까?
영화에서 엔딩장면은 언제나 중요하다. 아마도 감독의 모든 생각을 집약해놓는 장면이고, 그가 생각하는 가치들이 모두 여기로 귀결한다고 본다. 나로써는 엔딩장면을 찍기 위해서 결국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 앞의 이야기들을 주구장창 찍어대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는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좀 뜨악한 느낌이 든다.
자극적인 소재, 호주의 풍광 말고는 도대체 무얼 찍은 거라고 해야할까? 10억의 상금이라는 외연을 너무 크게 잡아놓은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을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다시 왜 호주에서 찍어야 했을까? 그 8명의 젊은이들은 굳이 호주까지 불려가서 Die Hard 해야하는 이유가 무얼까? 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게 된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든,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는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수업시간에 그토록 따갑게 들으면서 그것들을 외워왔다. 좀 어이없는 얘기지만, 그토록 그것을 외우게 하고 시험문제에 내고, 풀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야기에서 그 배경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이야기를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10억]의 호주는 꼭 호주이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곳이 어디 중국의 사막이면 어떻고, 아프리카의 사막이면 어떻고, 아니라면 차라리 한국 어디 구석에 있는 무인도면 어떻겠는가. 한국의 무인도는 작아서 힘들다면, 무인도 몇개를 오가는 이야기면 어떤가.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곳이 구글 어스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들이 만난 정신적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적 세계에서 어디에 위치하느냐라는 문제가 아닐까?
(영화를 본지 시간이 좀 지났고, 최근에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게 뜸하다 보니 글이 좀 중구난방에 핵심이 없어 보일수도 있겠다.)

그런가 하면 [생존 게임]
그보다 먼저 [최종면접].

이 영화는 원래는 스페인의 희곡이 원작이다. 희곡의 제목은 [그뢴홀름 방법론]. 스페인의 극작가 조르디 갈세란의 작품이다. 당연히 먼저 스페인에서 상연되었고, 그 희곡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상연된 연극이 [최종면접]이다.
(어찌어찌 알게 된 과정이었는데, 교수님의 부탁을 받아 지인이 이 희곡을 직접 스페인에서 구해와서 한국에서 번역되어 연극화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 과정을 듣게 되면서 찾아본 영화가 바로 [생존게임]이다.)
연극에 대해서는 각종 검색엔진에서 "최종면접", 혹은 "그뢴홀름" 이라는 단어로 검색해보면 알 수 있으니 찾아보시길... 나름 인기가 있어 여러차례 앙코르 공연이 되고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본인도 꼭 찾아서 보러 갈 예정!
(게다가 연극에 대해서는 문외한 인지라....쩝)

다시 [생존 게임].

영화의 원제는 [El Metodo]. 영어로는 The Method. 즉, 방법, 혹은 방법론이겠다. 희곡의 원제목은 [El Metodo Gronholm] (알파벳위에 점자들이 있는데, 이 자판으로는 어떻게 치는 지 모름)
이 제목은 직접적이지만 나름 은유적이기도 하다. 세상을 압축해놓은 느낌. 마치 윈도우 로고를 구겨서 구글 크롬 로고를 만든 느낌이다.
영화에서는 7명의 면접자가 등장한다. DEKIA라는 어떤 회사의 고위간부를 뽑는 과정이고,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트촬영일까 라고 생각하면서 봤지만, 왠지 아닌것도 같고... 컷어웨이를 보면 로케이션 촬영같기도 하다.)
즉, 저예산이라는 말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7명의 후보자를 불러놓고 면접을 보는데, 실제 면접관은 나타나지 않고, 한 방에 가두어진 이 7명의 후보에게 지령이 떨어진다. 맨 처음 7명 모두가 후보자는 아니며, 이 중에 한 명 면접관이 있으니 그를 찾아내라는 것이 첫 출발이다. (이쯤되면 마피아 게임?) 그리고 여러 후보들은 (겉으로는) 민주적인 절차들을 통해서 한 명씩 탈락시켜 나간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서 인신공격도 하게 되고, 과거를 들춰내고, 능력보다는 인간적인 약점들을 공격해가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아예 출발부터 흥미진진하다. 각자의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일자리)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상대를 간파, 공격하고 자신을 보호해나가는지를 여실하게 드러낸다. 즉, 외연도 크지만, 내부도 아주 흥미진진한 양상을 펼치게 된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과거에 연인이었던 커플이 오늘의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또 다른 양상을 예고한다.
여기서 리뷰는 조금 수박의 겉만 핥을 예정이다. 역시나 영화를 본지 1주일이 지나서 세세하게 기억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이런 류의 영화는 어떤 논쟁의 장면보다는 크게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번역 희곡은 블랙유머적인 측면을 두드러지게 내보였다고 해서 따로이 기대가 되는데,
영화는 유머라는 멋진 방법보다는 정공법으로 돌파한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틈을 찾아내려고 하고, 서로간에 그 틈을 공격하는데 정신이 없다. 그런 가운데 각종 범죄자들에게 쓰는 딜레마도 활용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단순히 인간 대 인간의 문제 위에 남녀간의 차이를 슬그머니 병치시키면서 또 다른 긴장감을 선사한다.
이야기적으로는 충분히 훨씬 뛰어나고, 재미난 이야기이지만, 영화적으로도 굉장한 수준은 아니다. 한 면접장에서 극한의 방법론을 통해 인간사이의 균열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카메라가 아주 뛰어나게 잡아내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필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좀 느슨하게 괜찮은 구조를  갖고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뉴스 장면들이 나오고, 면접장을 향하는 인물의 준비과정을 보여준다. 하필 이날은 스페인에서 신자유주의와 세계은행, IMF 등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는 날이고, 하루 종일 그 시위는 과격하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라디오를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가서는 거리가 난장판이 되어있다.
긴 이야기는 빼고, 엔딩장면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자. 최종적으로 합격한 사람은 안전하면서도 후광이 넘치는 회사건물에 남는다. 한편 마지막 면접에서 떨어진 이는 시위 후에 만신창이가 된 거리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언뜻 이게 별게 있으랴 싶지만, 이는 [10억]과 비교해보면 더욱 뛰어난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최종 경쟁에서 갈라진 자를 둘러싼 풍광은 이토록 다르다. 튼튼한 건물과 만신창이 거리. 결국 마지막 경쟁에서 진 자는 다시 혈투의 거리로 내몰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거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그걸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아주 성기게 표현되어있지만, 결국 인간이 선택해야할 가치를 마지막 부분에서 병치시킨다. 연대해서 무화시킬 것인가. 그냥 경쟁을 끝내서 나 하나만 살아남을 것인가.
그! 리! 고! (이것은 좀 확실한 방점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한 방법론이 여성과 남성을 통해서 각자가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 최종적인 선택을 달리함으로써, 아주 약하게 여성과 남성의 생각하는 방식이 다름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 난 왠지 평소 내가 존경하다시피하는 여성들의 생각방식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10억]과 [생존게임]
뭐랄까, 이 두 영화는 아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있다면, 단지 내가 이 두 영화를 비교적 근접한 시기에 연달아 보았다는 것이며, 그 안에서 다루어야할 세계가 너무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럴땐 정말 '영화가 찾아온다'는 표현을 안 쓸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바이벌의 직접적인 내세움인 거대한 자연과 무인도라는 설정의 [10억], 반대로 가장 은유적이고도 반대의 지점인 이 세계를 마음껏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층빌딩안의 면접장소라는 설정의 [생존게임]은 같은 세계를 가장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인 셈이다.
같은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두 영화의 포스터에서 비슷한 점이 드러난다.
결국 이것은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점에도 두 영화 모두 배우들을 골고루 포스터에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10억]은 사막(자연)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생존게임]의 경우는 말쑥한 정장을 입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어느 것이 더욱 영화적으로 세련되었는가. 그리고 세련됨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이야기가 더 관객들을 환기시킬 것인가는 알아서 해석하기 바란다. 취향은 모두 다를 테니...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편을 모두 보고 곰곰히 곱씹어보기를 바란다.


ps. 인서트
영화에서 인서트들이 정말 죽이는 효과를 낼 때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식상하거나 별게 아닌 것처럼 나올 때도 있다.
[10억]에서 캥거루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좀 뭐랄까 직유적인 표현인데다가, 그것이 주는 감흥이 상당히 약하다. 호주니깐 캥거루를 찍었거나, 캥거루가 아니면 호주라는 나라의 특징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걸까? 마치 중국가면 팬더를 꼭 찍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근데 이 인서트를 보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바로 [콜래트럴]에서 등장하는 LA 한복판의 코요테. 일단 이 인서트는 정말로 끝내주는 장면이라고 미리 일러둔다. 보통 자연의 야생동물이 주는 클리셰가 바로 캥거루 같은 거라면, 이 코요테는 정말 거꾸로 의인화한 야생동물이라고 하겠다. 고독한 킬러가 택시를 타고 타깃을 하나씩 하나씩 죽여야만 하는 과정에서 이 차가운 도시 한복판에 슬그머니 돌아다니는 코요테는 이미지 자체로도 이질적이지만, 주인공 킬러(탐 크루즈 분)의 고독감을 그대로 반영한 장면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마이클 만 만큼 고독감을 잘 표현하는 감독이 있을까?)
한편, [생존게임]에는 휴식시간에 나오는 사운드 및 빌딩 바깥에서 건물안의 사람들을 잡는 컷어웨이가 있다. 아주 탁월하다고 까지는 않더라도 아주 괜찮은 장면중에 하나다. 빌딩밖에서는 한참 시위가 이루어지면서 굉장히 시끄러운 가운데, 빌딩안 면접장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안의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그들 스스로가 이미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마냥 바깥을 내려다 보지만, 카메라는 거대 건물의 유리창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그들을 본다. 저예산 영화라서 그 장면을 보여주기는 어려워서 사운드로 표현한 듯한 냄새가 나지만, 어찌되었거나 그 여건 안에서 좋은 선택으로써 표현한 장면이다.

ps2. 엉뚱하게 단정하기.
찾아보니 조르디 갈세란은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 문과대학을 다녔던 이력이 있다. 이런 희곡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에게 '바르셀로나'라는 디딤땅이 있어서가 아닐까? 물론 비약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런 희곡을 쓰고, 그가 갖고 있을 세상에 대한 어떤 가치관을 상상하면 왠지 먼나라의 좋은 선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긴다.

ps3. 비좁은 공간에서 풀어가는 영화.
먼저 역시나 나름 최근에 본 괜찮은 영화로서 [맨 프롬 어스]. 이 역시 굉장한 수작.
[12명의 성난 사람들] (시드니 루멧, 957)이 아마도 꽤 오래된 수작이 아닐까 싶다. 흑인 소년의 살해 혐의를 놓고서 세상에 가득한 부조리와 이데올로기를 격파해나가는 수작이다. 이 영화는 다시 미국, 일본, 러시아에서 리메이크 되었다.
미국 리메이크판은 윌리엄 프리드킨(프렌치 커넥션과 엑소시스트의 그!)이 같은 제목으로 1997년에 TV영화로,
러시아 리메이크판은 2007년 [12명의 배심원]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리메이크판은 [12명의 마음약한 일본인]으로 1991년에 만들어졌다.

시드니 루멧영화와 일본판은 보았고, 미국, 러시아판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일본판 완전 웃기다.


포스터 컨셉역시 영화컨셉과 잘 어울린다!!!


일단 오랜만에 영화글을 블로그에 쓸 수 있게 해준 영화라서 고맙다고 선언!

무려 2004년, 즉 5년전의 영화를 다시 꺼내보게 만든 신정원 감독에게 또 한 번 감사.

<챠우>의 소문을 듣다가, 이 감독의 전작이자 데뷔작이 <시실리 2km>라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영상자료원을 찾으......려고 했으나,
너무 서둘렀던가.
소식을 듣고 돌아가던 버스에서 발목부상을 당하고,
겨우겨우 며칠이 지나 거동이 좀 괜찮아지고 나서 찾은 영상자료원 자료실.

바로 <시실리2km>를 꺼내달라고 요청하고 보기 시작.

영화는 초반부터 시끌벅적 이상한 분위기를 담아낸다.
각종 줄거리들은 각설하고,
혹 필요하다면, 요기로 가보라.

1. 펑키 호러?
영화에 붙은 수식어다.
펑키는 또 뭐고 호러는 또 뭐람?
따지지 말고 입닥치고 보고 나면 대충 무슨 감인지 알 수 있다.
아주 폐부를 찌르는 감각은 없다 하더라도, 장르영화에서 장르를 적절하게 뒤섞어 내는 이 솜씨는 가히 절대 칭찬받을만 하다.
언제부턴가 한국 영화판에서 이상한 낚시성 카피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쯤의 카피는 사실 영화를 만든 이들의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호러와 코미디는 가장 안섞이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웃음"의 감정과 "공포"의 정서는 누가봐도 물과 기름이 아니겠는가? 이 둘을 섞으려면 특별한 용매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용매가 잘 작동하는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법. 극장에서 사실 가장 삐딱한 관객이라면, 아마도 정말 무서운 공포영화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무서워하고, 시작되는 연인들이 작정하고 무서워하러 갔는데, 곁에서 키득키득 웃으면서 '사랑의 성장'을 방해하는 사람들. 그들은 일반관객의 적임에는 틀림없지만, 영화의 다양성을 생각하면 절대 필수적인 관객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관객들이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영화이고, 사랑의 성장을 바라던 사람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이 <시실리 2km>가 아닐까?

이런 장르가 사실 한국에서는 흔하진 않을 것이다. <시실리 2km>를 위시하여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도 당시에는 '코믹잔혹극'이라는 카피로 상영을 했다. 다른 영화들이 더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필시 이 2편이 아주 성공적인 관객몰이(?) 혹은 관객설득(!)에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의 원류(?, 라기 보다는 같은 흐름)에 있는 한 편의 영화를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이블데드 3>!!!

어렸을 적 한동안 공포영화를 열심히 찾아보다가 찾아낸 <이블데드>시리즈의 (현재까지의) 완결작.
이 영화는 정말로 뒤통수였다. 당시에는 보면서 완전 끔찍하고 뭐 이따위 영화가 다 있어라고 생각했지만,
다 크고 지나서 영화를 좀 더 좋아하게 되면서 이 영화의 과감한(!) 실험정신과 샘 레이미의 엉뚱함에 반해버린 영화다.
게다가 1,2편의 그 공포스러움을 기대하고 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절대 이 영화는 시리즈의 연작이기 보다는 단독적인 한 편의 영화로 재평가해야만 한다.

'펑키 호러'라는 단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야 말로 뭔가 무서운 듯 하지만, 웃음이 난무하는 골때리는 영화인 셈. 당시에 흥행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아~ 샘 레이미는 정말로 앞서가는 감독이었던가.

2. B급 정서.
한동안 'B급'이라는 용어가 많이 통용되었던 적이 있다. 물론 B급 영화가 나올때마다 다시 소환당해서 입담을 나눌 수 밖에 없는 단어이긴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이른바 영화광이라는 사람치고 자신만이 최고로 꼽는 영화들 중에 기괴한 영화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광도 아니며, 이상하게도 나의 베스트에 B급영화는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 스스로도 괴로울 따름이다. 좋아하면서 완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이 나의 문제라면 문제.)
우리나라에도 B급영화를 좋아하고, 만드는 수많은 감독들과 영화광들이 존재한다. 거의 10년전의 키노(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언젠가를 둘러보면, B급영화에 대한 사랑을 논하고자, 박찬욱, 오승욱, 김지운, 임필성 등이 각자의 B급영화 예찬론을 펼친 기사도 있다. (기사제목 : 우리는 어떻게 망설임 을 멈추고 B무비를 사랑하게 되었나?)
예전에 트로마 스튜디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B무비에 대해서 쓴 글도 있지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왜 감독들은 B급영화에 열광하고, B급 정신을 추종할까?
또 다른면에서 왜 B급영화는 이토록 창궐하는가?
한편, 한국영화들에서는 유독 B급 영화들이 장사가 되지 않으며, 그런 드라마 역시 잘 제작이 되지 않는다. 작년에 굉장히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와 그것의 원작인 <노다메 칸타빌레>를 비교해보자. 두 드라마는 각각의 나라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두 드라마를 모두 본 사람들도 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드라마는 사실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정말로 핍박받고, 슬프고, 억압된 사람들의 성공적인 오케스트라 꾸리기에 집중하는 것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커다란 줄기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두 드라마를 모두 본 사람들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리곤 한다. 나로서는 두 드라마를 모두 즐겁게 보았지만, 개인적인 선호도는 <노다메 칸타빌레>에 더 크게 작용한다. 이것은 결국에 드라마가 갖고 있는 정서의 문제인데, <베토벤>의 경우, 인물의 갈등들이 굉장히 첨예하고, 각자의 인물들이 자신의 갈등에 너무 집중하면서 정석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는 반면, <노다메>의 경우, 인물들이 대부분 정상적이지 않고, 언제나 천방지축에 튀어다니며, 자신의 현실이나 갈등을 크게 혹은 심각하게 따지지 않는다. 굉장히 단순한 목표들을 설정하고 단순하게 반응하는 직선적인 캐릭터들이 난무한다. B급정서는 바로 이러한 점이다.

절대로 감정에 동화되지 않을 것!
절대로 현실에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

이것이 이른바 B급 정서의 핵심이다.
<시실리 2km>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봐라. 가장 우습게 등장하는 58년 개띠 조폭. 그에게 '상황파악'이라는 기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못을 박으라고 시켰는데, 망치가 없으면, 그것이 가장 해결해야할 숙제일 뿐이지, 형님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캐릭터다. 초반에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권오중'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토록 맞고, 못이 이마에 박혔다면, 죽어도 일찌감치 죽어야 한다. 하지만 B무비에는 그런 사실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정신과 캐릭터들이 진정으로 영화의 장르를 섞는데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가장 끝내주는 장면은 영화가 호러에서 멜로로 넘어서는 장면이다. 호러에서 멜로? 언뜻 상상이 가능할까? 이것이야 말로 일반 관객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관객들에게는 명장면이 새롭게 탄생한다. 쫓기는 임창정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들어서 폐교의 전화기. 그것을 방해하는 임은경 처녀귀신. 여기는 절대적으로 공포 영화의 관습을 철저하게 지켜가면서 분위기를 타고 간다. 그러나 영화가 뒤바뀌는 정점은 바로 '여기서 나가라'고 하는 처녀귀신의 대사에서 결정난다. 어느 영화에서 귀신이 '여기서 나가, 내구역'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보통 공포영화에서는 있는 위엄, 없는 위협을 다 내보이면서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라는 식의 대사를 남발할 뿐이다. 그리고 임은경의 대사에 대해서 임창정은 '아침까지만 있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으잉??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이제 영화는 공포가 아니라 인간과 귀신 사이에 친밀감을 높이는 상황으로 바뀌어 간다. (정말 이런 캐릭터는 우리나라에서 임창정이라는 걸출한 배우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B급 캐릭터의 진수는 임창정의 독식이 아닐까?)


3. 지역 토호의 사회적 맥락.

<시실리>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새로운 맥락을 보여준다. 사실은 새롭다기 보다 감춰두었던 비기를 그제서야 발휘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싶다. 그 단서는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다. (스틸을 찾을 수가 없어서 아쉽다.) 그 장면은 '시실리 2km'라는 팻말이 등장하는 컷인데, '시실리' 팻말 밑에는 '천사의 집 4km'라는 팻말도 있다. (천사의 집인데 죽음의 '4'km 팻말. 다분히 보이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아무리 농기구에 단련된 사람들이고, 숫자가 많다한들 여자가 3명이나 포함된 집단에서 엄청난 연장(!)을 휘둘러대는 조폭 4명을 "제낄"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탐욕'이 그만큼 크다는 것으로 하나의 설득을 얻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에 의해서 또한 타당성을 얻는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과 탐욕이 만나서 제끼는 이야기에 대한 개연성을 더욱 확보해준다. 이 부분에 이르면 윤태호의 만화 <이끼>가 떠오른다. (지금 강우석 감독이 영화화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토호들은 이토록 강건하다. 토호는 단순한 토호도 아니며, 그것은 일종의 아성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중세 유럽과 같은 봉건제가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그 토호들은 이 땅에 자리잡은 유사이래로 분명히 지속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그러한 은유는 <시실리>에서는 가장 밑의 맥락에 깔려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분명 이것에 대한 통찰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만화 <이끼>에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그 마을에는 이상한 비밀이 있으며, 그들만의 커뮤니티는 너무나 돈독하여 이방인을 허락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단순한 주종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주는 예수같은 존재로써 비춰지는 우두머리라면, 그 결속력에다가 엄청난 냉기로 동결건조 시켜버린 결합력이 덧붙여진다.

<시실리 2km>는 장르영화의 규범을 마음껏 전복하는 즐거운 또 다른 반장르영화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꿰뚫어 가장 우회적으로 표현한 예술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한편, 만화 <이끼>는 이러한 사회적 속성들을 끔찍한 음모와 비밀을 파헤쳐가는 정공법의 이야기로서 양편의 극단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챠우>를 보기 위해서 찾은 신정원 감독의 데뷔작인 <시실리 2km>는 사실 여전히 진행중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차기작인 <챠우>에서도 자신만의 솜씨를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한 영화다. 곧 찾아볼 <챠우>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하다.
그러는 한편, 같은 이야기를 또 다른 방법, 정공법으로 파헤쳐간 <이끼>, 그리고 그것의 영화판인 강우석 감독의 <이끼> 역시 기다려진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질 때, 분명 우리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흐름이란, 일부러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유통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놀라운 것은 마치 역사의 필연마냥, 어떤 흐름들이 보일 때다.
물론 그것은 너무 미묘하고도 아주 큰 한강 같아서, 그 안에 흐르는 작은 조류들을 마치 중요한 흐름인 것 처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말로 '바다'로 흘러가는 '강'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다. 숲안에 있으면 숲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만, 숲이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이 결국 어떤 흐름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문화는 분명 어떤 '복고(復古)'의 흐름이 있다고 말하려던 참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문화평론가의 식견은 없으므로 몇몇 영화들을 중심으로 생각해볼까 한다.)

최근 몇개월간의 영화들.
최근에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과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가 개봉을 했다. 이른바 60~70년대 한국에서 큰 유행을 만들었던 만주웨스턴과 액션영화들을 불러온 영화다. 한편, 곧 개봉을 앞둔 <고고70>, <모던보이>등도 각각 70년대, 30~40년대의 시대배경을 갖고 있다. 간단히 말해 복고풍 영화다. 그리고 현재 개봉중인 <맘마 미아>. 여기엔 어떤 향수가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복고풍. 왜 우리는 복고풍에 열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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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맘마 미아>를 보고나서 흥겨웠던 것은 너무 당연하게도, ABBA의 노래덕분이다. 영화를 보면서 평점을 주자면, 영화로서 평점은 과히 높히 주기 어렵다. 별5개중 3개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메릴 스트립의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보는 재미를 기점으로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돋보였던 장면은 'Super Trouper'를 부르면서 작은 공연을 하는 다이나모스의 장면이었다. 줄리 월터스, 크리스틴 바란스키와 반짝이 나팔의상을 입고 두껍고, 투박한 굽의 하이힐, 그리고 메릴 스트립의 눈가에 그려진 스모키 메이크업에 율동에 가까운 안무를 펼치면서 디너쇼를 펼치는 장면에서 나는 뭔가 탁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이 영화는 이렇게 즐겨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 반짝거리면서 바깥단으로 뻗어나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나팔의상을 보고 있으니, 왠지 저것이 정말 70년대의 문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내가 영화를 보다보니, 아 저것이 바로 나의 부모님 세대가 향유했던 문화라는 것이구나.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 엄마, 아버지를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메릴 스트립은 우리 엄마와 동갑이다. ㅡ.ㅡa)
영화를 주론 보는 계층은 20~30대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아바를 즐기는 것은 동시대의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향수와 역사속에서 기록 등을 통해서다. 물론 음악자체를 즐기는 부분도 있을 테지만, 우리가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왠지 그 안에서 우리 부모들이 젊었을 때, 즉, 젊은 엄마, 젊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맘마 미아>속의 이야기는 뭔가 그런 지점을 잘 살려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시작은 그렇게 간다. 자신의 결혼을 앞두고,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한 딸.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찾고자, 무조건 3명의 후보를 모두 결혼식에 초대를 해버린다.(물론 엄마가 보낸 것처럼.) 그리고 결혼식 준비 와중에서 엄마 역시 자신의 옛 남자들을 모두 만나게 되고, 엄마는 순식간에 젊었을 적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금요일이면 놀기 위해 클럽을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댄싱 퀸'이 되고, 친구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 'Super Trouper'가 된다. 젊었을 적의 엄마가 되살아난 셈이다. 고스란히 나이만 더 먹은 세 명의 아빠, 세 명의 엄마가 젊은 모습으로 애정행각과 삶을 즐긴다. 이게 우리들의 부모를 만나는 방법이다.
(한편, A TEENS라는 스웨덴 그룹이 있다. 아바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젊은 친구들, 멤버구성도 비슷하고, 정말로 아바의 자식들이 부모의 노래를 재현하는 느낌이랄까?)

엄마, 아버지를 위한 영화표를 2장 더 샀음은 너무 당연한 거다. 비록 당시의 나의 부모님은 아바를 즐기지도, 음악을 즐기지도 못한 개발경제하의 순진한 일꾼 가족에 불과했지만..... 왠지 멀리서나마 길거리에서 들었을 아바의 음악을 다시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복고풍이 나에겐 이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영화 <맘마 미아>에 나오는 다이나모스의 "Super Troupers"
(여담이지만, 크리스틴 바란스키는 왠지 제이미 리 커티스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
(또 하나, 메릴 스트립의 스모키 메이크업, 정말 멋지지 않은가? 우리의 엄마들에게 저렇게 멋진 모습을 연출해 드리고 싶다.)

이번엔 아바의 "Super Troupers"


80년대말~90년대초의 한국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듯. 앵글봐라, 옆모습 하나도 없다.
'슈밥바'인지 '트루펍버'인지.. 코러스 완전 신난다. 아싸!

또, 아래는 A TEENS의 "Super Troupers"

이젠 그들조차 TEENager는 아닌 듯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