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핸드밀, 원두 보관통.

지름 神 2007. 11. 7. 00:29 Posted by 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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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조명과 함께 나선 귀여운 몬스터들..


커피 장비의 마지막 화룡점정!~!!

핸드밀이 드디어 도착!!

기념삼아 원두 보관할 유리병도 하나 샀다.

원래 유리병(캐니스터)이 하나 있긴 한데.. 왠지 밀봉이 잘 안되는 듯 해서...

핸드밀은..

칼리타 것을 살까 하다가..

칼리타의 가장 싼 KH-3인데.. 원두 넣는 데가 개방이 되어있어서

원두를 갈 때 이리저리 튄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뚜껑있는 걸로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이것저것 찾다가..

브랜드는 딱히 없는 걸 하나 찾아냈다. 가격도 훨씬 더 저렴.
(특별한 이름이 없지만, 각종 쇼핑몰에서 '핸드밀'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모델이다)

직접 갈아보니 어찌나 재미난지.. 쿠쿠쿠.

실제로 훨씬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 같다!!!

오오오~~~ 신난다!!!



괜시리 신나서.. 향초도 켜고..

나의 몬스터 인형들도 출동시켜서 사진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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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영상자료원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프로그램.
글쎄, 일부러는 아니었는데... 다니다보니 독립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사실은 내 안에서 이미 뭔가 '다른' 것들을 원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지도.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속에 남는 이상한 이물감들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든다.
글도 못쓰고, 이러한 잡스런 글조차 다시 고쳐쓰는 버릇이 없는 나에게는 글쎄올시다.
이러한 글이 나에겐 일종의 "즉흥연기"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적 문제를 뱉어내고 남는 것은 차가운 이성의 사유일 것이다.
영화적 윤리? 윤리의 영화??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쟁점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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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이미지가 없어서.. 일단 옛날거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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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하여 - 어부로 살고 싶다]
2006|Documentary|DV|Color|75min
감독 이강길



1. 활동가로서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로서의 활동인가?

이 영화에서 화자의 태도는 굉장히 뜨겁다. 선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끓어넘치기 직전에 냄비 만큼의 온도를 갖고 있다.
누군가의 통곡하는 모습을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누구를 향해서, 무엇때문에 저토록 섧게 울고 있는가? 의문을 갖게 한 후 그것에 대한 답을 계속 유보한다. 그 답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다.
이후 물이 막혀서 말라가는 갯벌의 모습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마치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비슷한 체험을 가져온다. 그리고 말라가서 갯벌에서 기어져 나오는 동죽, 생합(조개류)들. 그것의 모습은 일순간 우리가 자연에게 어떠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인간으로 포커스를 옮겨온다. 계화도의 아침을 보여주면서, 분주하게 일을 준비하는 주민들을 따라서 우리는 계화도, 새만금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부로 살고싶다>는 3부작 연작의 제 3부격인지만, 각각은 독립된 주제를 갖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안을 관통하는 어부들의 삶과 인간다움에 대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토록 조용했던 계화도는 이제 물로 나가는 어부들과 갯벌로 채집을 나서는 사람들로 나뉘어져서 묘사된다. 그러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조제의 물막이 공사를 보여준다. 어찌보면 단순한 진영나누기? 이야기는 쉽게 펼쳐진다. 이른바 공사하는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계화도 주민들로 이분해서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대책위원회가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제도측을 오가면서 대화창구를 마련하고 작은 갈등들이 펼쳐진다. 물막이 공사가 점점 마무리를 향하고, 대책농성을 하던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이제 점점 힘든 싸움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여기서 이어지는 큰 문제는 주민들 내부에서의 갈등인 셈이다. 보상을 제대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과, 원칙적인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 그리고 마지막 공사를 앞두고서 해상시위가 이루어지고 거기서 언론들 앞에서 나서 인터뷰를 한 대책위원장은 결국 주민들의 의사를 모두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은근슬쩍 보상에 대한 말만을 언급하면서 내부적 갈등은 심화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장 뜨거운 화자가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는 감독은 가장 이질적인 형태로서 영화에 개입해서 들어온다. 느닷없이 영화를 만든이가 이야기에 참여해 올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선 느낌이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보면 낯섬보다도 델 것 같은 뜨거움이다. 하지만 끝내 영화안에서 인터뷰 장면을 돌려서 대책위원장의 거짓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인간적인 윤리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언제나 최전선에 있다. 각종 시위장면, 혹은 농성장에서 갈등의 가장 깊은 간극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담아내고, 이른바 자신이 있는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 자체가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편에 강하게 달라붙어 있다. 정치적인 활동!
그리고 이후 점점 남성들 사이에서 지쳐가는 싸움의 흐름은 여성들에게로 중심이 옮겨간다. 실리보다도 언제나 명분을 정확히 내세운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반박할 논제가 없다. 산자부의 사람들도 그녀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고작 '추운데 고생하시지 말고 이쪽으로 들어오셔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담당자들도 나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내부적인 분열과 이른바 중요한 순간에서 지지의 힘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결국 새만금 방조제는 마지막 트럭을 쏟아붓고야 만다. 그리고 펼쳐지는 태극기들. 이젠 태극기가 오염된 듯 하다.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새만금 간척 사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앞두고, 방조제가 완성된 그들의 기쁨이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어찌되었든 그들에게 갯벌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안에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발'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고, 기득권들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시 된 개발은 결국 또다시 태극기를 '전유'한다. 그 누구의 태극기인가? 효순이 미선이가 죽어가는 동안에 휘날렸던 붉은악마들의 태극기와 같은 태극기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가 하더니, 영화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류기화'씨의 죽음. 게다가 그 죽음마저 동죽들의 운명과 별다를것이 없다. 잠깐씩의 해수유통을 위해서 설치한 수문에서 어느날 갑자기 쏟아진 물에 휩쓸려 맞이한 죽음. 여기서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감독은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태도를 등장하는 이들과 삶을 합치시키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이루어낸 성과가 내부의 작은 균열들, 그리고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다시 새만금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 영화는 분명 활동가의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1차적으로 정서적인 문제에서는 성공적인 이야기전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좀 더 영악하게 활동으로 이어지는 문제는 다르게 생각해봐야 한다.


2. 객관화해서 더 들어가야할 영화

이 영화는 사실 앞서말한 화자의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는 영화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오히려 감동을 받되, 이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잘 떠오르지 않을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정서중심의 영화만들기가 흐릴 수밖에 없는 객관적 판단의 영역이다. 물론 감독이 무려 7년의 시간을 새만금에서 살아오면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영역의 사람들을 두고서 어떻게든 그 사람들을 누구는 나쁘고, 누구만 착하고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치하받아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누었던 QnA에서 하는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고, 이제 이 영화를 갖고서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것이 단순히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런이러한 상황이니 우리와 함께 해달라는 손내밈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 시선과 방식은 충분히 순진하고, 순박하다. 글쎄 21세기의 다큐멘터리적 선동(?)은 조금은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가슴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감독은 아직도 가슴이 뜨겁고, 심지어 영악하지조차 못하다. 그의 뜨거운 가슴은 영화 안에서 내레이션의 활용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내레이션'은 화자를 등장시켜서 풀어가는 직접적 설명이다. 이 영화에서는 더더욱 내레이션이 없으면 앞뒤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선택한 내레이션인가? 분명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레이션을 썼을지도 모른다. 즉, 정서적 호소! 게다가 내레이션이란 감독의 입이면서, 이야기를 안내해주는 길잡이이다. 즉, 전지적인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영화 안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관객들은 화자가 제시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는 다시 요즘 시대의 관객들에게 (더더욱 이 다큐멘터리를 찾아올 관객들에게) 억지의 강요라는 측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화자의 목소리는 민중가요 가수인 연영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장 적합한 권위가 너무나 적합해서 그에 대한 어던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만한 여지가 없을 수 있다. 이는 촬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사실 언제나 관객의 시선과 동일시 할만한 장면들이다. 특별한 중개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에서 단독쇼트들로 인터뷰가 이루어지면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간극이 발생한다. 화면은 그러한 단독쇼트와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내레이션은 강력한 권위를 갖고서 영화적인 내용, 인물들과 관객들의 거리를 가까이 붙이려 한다. 다시 말해 어쩌면 내레이션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거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이 영화를 그러한 거리감을 두고서 관객들의 현장성을 높이는 위치에 카메라가 있다. 이 상태에서 내레이션을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점하려 할 수 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어디서 이들을 보아야 하는지 찾아가는 사유를 할 여지가 생긴다. 이 때 영화는 새롭게 관객을 보좌할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스로 사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로써 이 영화는 본래 하고자 하는 목표('연대 투쟁'이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한것일까?)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감독은 좀 더 이 상황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취재는 당연히 그들의 정서적 거리를 좁혔고, 당연히 더 진솔해졌으며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찾아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좀 더 차가운 이성을 발휘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영화를 잘 만들었냐 못 만들었냐의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목적에 좀 더 부합하냐 안하냐를 고려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 명의 관객으로써 영화를 본 나 역시 새만금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하고, 영화과 감독 역시 이 문제를 더욱 잘 전달하고 앞으로 해결 혹은 투쟁해가는 데 새로이 생각해볼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차가운 이성이 영악한 감독을 만들고, 더욱 강력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구조는 영악해(?) 보인다. 전반적인 양식에서 가장 잘 선택한 것이 전체적인 구조라고 보인다. 수미쌍관으로 한 사건을 배치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수분이 모자라서 갯벌밖으로 입을 벌려서 빗물을 받아먹으며 말라죽어가는 동죽의 운명이 그레질을 하다가 휩쓸려서 돌아가신 류기화씨의 운명까지 확장하면서 그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슬픔이 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를 떠나, 진정 영화적으로 그 논리와 내적 상징이 일관되게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에 타당한 설득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타당한 설득과 정서적 감동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은 과히 쉽지 않은 일이며, 연출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하겠다. 영악한 영화만들기가 중요하다거나,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기획적인 태도로 출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과 머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이 연출자의 숙명일 것이다.


3. 맺으며

분명, '새만금'이 이강길 감독을 찾아간 것이라 생각한다. 7년의 시간을 온전히 들여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그것에 대한 가치는 단순히 글 몇줄로 표현해서는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그를 더더욱 응원하는 마음에서 이제는 이강길 감독이 '새만금'을 새로이 찾아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지만, 아직 새만금은 일부의 수문을 통해서 해수조절이 조금씩 되고 있고,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주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생죽들이 나온다고 한다. 그토록 생명은 질긴 것이다. 그의 말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그 생죽들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해서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만금 개발 사업은 온전히 한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의 존폐가 달린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그 안에 담긴 개발 지상주의, 효용만을 생각하는 자본의 횡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새만금은 이 시대의 모든 병폐를 한데 모으고 있는 아이콘일 뿐이다. 그 안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문제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제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 시점이다. 영화는 정말 고맙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공하고 있다. 오죽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커서 판사같은거 꼭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겠는가? 또한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삼성비자금 문제에서 검찰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한다. 제발 잘 알아듣자.



PS. <광고>
이 영화는 11월 21일부터 시작하는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해 있다. 꼭 보길 바라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 글이 광고의 효과를 가지기를 기대하면서........

이강길 감독 블로그
http://blog.jinbo.net/cameraeye

Well I held you like a lover
Happy hands and your elbow in the appropriate place


And we ignored our others, happy plans
For that delicate look upon your face


Our bodies moved and hardened
Hurting parts of your garden
With no room for a pardon
In a place where no one knows what we have done


Do you come
Together ever with him?
And is he dark enough?
Enough to see your light?
And do you brush your teeth before you kiss?
Do you miss my smell?
And is he bold enough to take you on?
Do you feel like you belong?
And does he drive you wild?
Or just mildly free?
What about me?


Well you held me like a lover
Sweaty hands
And my foot in the appropriate place


And we use cushions to cover
Happy glands
In the mild issue of our disgrace


Our minds pressed and guarded
While our flesh disregarded
The lack of space for the light-hearted
In the boom that beats our drum


Well I know I make you cry
And I know sometimes you wanna die
But do you really feel alive without me?
If so, be free
If not, leave him for me
Before one of us has accidental babies
For we are in love


Do you come
Together ever with him?
Is he dark enough?
Enough to see your light?
Do you brush your teeth before you kiss?
Do you miss my smell?
And is he bold enough to take you on?
Do you feel like you belong?
And does he drive you wild?
Or just mildly free?


What about me?
What about me?


그냥..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당신을 붙잡았어.
딱 거기에 있는 것 같은 행복한 손과 당신의 팔꿈치.

그리고 우린 우리의 다른 친구들, 행복한 계획들을 잊어버렸어.
당신의 얼굴에 쏟아지는 섬세한 모습들 때문에...

우리의 몸뚱이들은 움직였고 단단해졌어.
당신 정원의 일부분들을 부수면서..
용서를 구할 여지도 없이..
아무도 우리가 했던 일을 모르는 그곳에서...

너는 올거니?
그와 함께 ?
그리고  그는 그렇게 암담하니?
너의 빛을 볼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넌 키스하기 전에 이빨을 닦니?

넌 나의 냄새가 그립니?
그는 너를 흥분시킬만큼 대담하니?
넌 그에게 속하고 싶어?
그는 너를 거칠게 몰아가고?
아니면 단지 부드럽게 자유롭게?
난 어떤 것 같아?

그냥..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당신은 나를 붙잡았어..
딱 거기에 있는 것 같은 땀난 양손과 나의 발.

그리고 우리는
결국 부끄러움 속에
우리의 생식선들을 가리기 위해
쿠션을 이용했어.

우리의 이성은 압박하고 수호했어.
우리의 북을 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살들이 근심걱정없는 이들을 위한 여유 부족을 무시하는 동안에

그래.. 내가 널 울렸다는 걸 알아.
그리고 때로는 네가 죽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너 정말로 나 없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ㅆ어?
그렇다면.. 그렇게 가
그렇지 않다면, 그를 떠나서 나에게 와.
우리중에 누군가가 예기치 못한 아이를 갖기 전에...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에 빠져 있으니까..

너는 올거니?
그와 함께 ?
그리고  그는 그렇게 암담하니?
너의 빛을 볼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넌 키스하기 전에 이빨을 닦니?


넌 나의 냄새가 그립니?
그는 너를 흥분시킬만큼 대담하니?
넌 그에게 속하고 싶어?
그는 너를 거칠게 몰아가고?
아니면 단지 부드럽게 자유롭게?
난 어떤 것 같아?

난 어떤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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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ey Road 표지를 떠올리게 한 스틸컷



10월 30일 미로스페이스에서 있었던 독립 장편영화 쇼케이스를 다녀왔다.

제목은 <마지막 밥상>. 이 영화는 감독의 이름도 몰랐고, 단지 위에 올린 사진을 어디선가 보았으며,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하는 비틀즈의 Abbey Road의 앨범 표지를 떠올리게 해서 뇌리게 강하게 남은 제목의 영화였다. 알고보니 20기 선배가 촬영을 했더군.
그리고 10월초 해피투게더 독립영화를 보고 뒷풀이를 하다가 옮긴 자리에서 노경태 감독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그의 차기작 시나리오까지 받아 읽어봤던 터라.. 이 영화를 꼭 보리라 했었다.


1. 실험영화같은 방식(?)으로, 또는 파토스를 제거하는, 드라마를 세우다.
실험영화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지하고, 본 것 조차 없는 터라 뭐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단지 (상영회에서 나눠준 자료에 따른) 노경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르면 그는 계속적으로 단편,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이고, 당연히 그러한 방식에서 이어지는 일관성 혹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꺼내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일단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참고해야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용어 사용을 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정서에 호소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인물들의 이름 조차 알려주지 않고, 심지어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지만)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두 단위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날 관객중에서는 할머니와 손자의 근친상간이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이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그 관객을 실소하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 그 관객을 욕할 수는 없는 거다. 영화는 정말로 상영이 되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감독의 의도 찾기 놀이는 말그대로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부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어있고, 배우들은 박제화한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서에의 호소? 그런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말라고 한다.
영화는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스크린에서 돌아가는 이미지들만 봐야 한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는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 고전적인 방식은 당연하게도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의 이입을 일으켜서 관객의 파토스를 자극하고 눈물과 웃음을 짜낸다음 오게되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방식이다. 어찌보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하고 일부 시도한 "지적 영화"(intelletual cinema)에 더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실험 영화가 고전적인 드라마를 벗어난 영화의 양식과 형식에 더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라는 것을 포함할 때 더더욱 이 영화는 실험영화같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이토록 폭력적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폭력을 바탕으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정보와 상황들을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파토스가 생길 수가 없다. 극도의 이성, 지적인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그리고 행위들을 보여주면서 조금씩조금씩 관객의 뇌는 쇼트 사이의 설명을 상상하고 아버지의 삶을, 아들의 에이즈를, 딸의 노력을, 엄마의 슬픔을, 할머니의 존속을 이해햐려 든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들이 얽혀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이 드라마가 된다. 파토스를 제거해서 이성적 사유만을 해야하는데 그들 사이의 드라마가 머리 속에 박히게 된다.
이 쯤되면 이 영화가 독자적인 느낌을 알게 된다.

2. 연출자의 의도대로 박제화한 '웅변조의 카메라', 휘저어댄 거품의 편집
이 영화는 수퍼16mm로 촬영해서 35mm필름으로 블로업된 포맷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영사시 문제가 발생했다. 35mm 비스타비젼을 영사실의 실수로 화면의 상단과 왼쪽이 잘린 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nA세션에서 질문해서 확인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헤드룸이 잘려나가 답답함 상태의 화면으로 영화를 본 셈이다. 어찌되었건 그것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더 준 셈이고, 하나의 미학을 더 잃은 셈이다. (제발 영사실의 실수는 이제 그만!!!!! -______________-;;;;; )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움직임이라면 주밍이 2~3번 나올 뿐이고, 거의 왠만한 앵글은 깊이감을 부각하지 않는 평면적인 상태이며, 또 대부분이 1scene 1cut으로 찍혀져 있다. 아닌 장면들도 있지만, 이 원칙이 보이는 상태에서 예외적인 것들을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그리고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보통이 LS이상으로 나온다. 이는 사실 연출자가 굉장히 카메라를 '보이게' 찍는 방식이다. 카메라가 고전적인 방식을 벗어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카메라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왜 그렇게 두고 있는지를 거의 항변하다시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웅변조의 카메라!!! 다시 말해 이제는 연출자가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를 읽어볼 필요가 생기는 셈이다.
노경태 감독은 연출의도를 "이 영화는 아이러니와 단절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지구의 오염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trivialism, surrealism and minimalism의 렌즈를 통해 나만의 코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줄 띄고) 모호한 액팅, 초현실적인 미쟝센과 탈색된 칼라는 현대 인간관계의 모순과 어색함, 그리고 세기말적인 암울한 현대사회를 표현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이러니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어로 나오는 사조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언급하긴 어려울 것 같고, 위에 설명한 카메라의 방식들이 분명 노경태 감독의 방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로 '하찮고... 현실이 아닌 것 같고..... 매우 작은.....' 단서들에서 출발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화적인 공간이 탄생한다. 감옥들의 방이 그렇고 지하철이 그렇다. 지하도도 그렇다. 면접보는 공간도 그렇고, 거대한 교각 밑이 그렇다. 어항속이 그렇고... 그곳을 다니는 인물들의 옷들이 그렇다. 분장이 그렇다. 세상에 흙을 뒤집어 쓰고 줄줄이 등장해서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지구인들을 깨우는 외계인을 보았는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처음 보고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지라도....
그런가 하면 역시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속에 등장한 이상한 장면들, 이상한 인물들이다. 전혀 스토리와 상관없이 떠도는 분절된 씬들이 등장한다.  터널을 뚫는  현장 시찰의 공무원들, 엄한 곳을 파는 전화공들, 발악하는 가스통남자와 카페트녀, 주차장자리를 놓고 싸우는 아가씨와 아줌마, 점점 검은물이 들어가는 밥그릇들 등등이 이야기가 좀 아리까리할 즈음에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요 5명의 인물들간의 고개돌리기 쇼트들. 이것들이 유기적(서사적)이 않고, 자의적(시네마틱)인 상태로 영화를 세우려는 감독의 휘핑크림식 편집이다. 크림을 휘핑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자의적이고, 잘 안섞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휘핑은 반복하고 힘조절을 하고 하면 할 수록 쓸데 없는 기포는 점점 빠져나가면서 양질의 크림을 탄생시킨다. 이 영화의 편집이 마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편집 방식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궁금했던 지점은 영화가 촬영이 끝나고 나서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재편집 될 때 이는 다시 작가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모습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분리이화 되는 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거다. (반쯤은 예상했지만) 노경태 감독은 사실 시나리오상의 이야기와 거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시나리오가 나오면 영화는 다 나온거라고 했던 히치콕의 방식인 셈이다. 그 방식을 동의하든 못하든 간에 그 오케스트레이션의 방식을 통해서 씬을 이어붙이고, 쇼트를 구성하는 편집은 (실제로 누가 편집을 했든 간에) 편집자(로서의 기능과 역할)보다는 (작가로서의) 연출자를 드러낸 결과인 셈이다.


3.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배달되는 영화적 파토스!
끝내 영화의 끄트머리에 가서 어떻게 된 구성의 가족들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미 정서적인 파토스를 거세해 보면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그 가족구성원의 정보가 이렇게 저렇게다라는 사실이, 영화를 대하게 되는 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스토리 정보가 영화를 좌지우지 하고,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미 머리가 좌석이 딱 붙어서 엔딩 음악에 놀래서 벌떡 깨는 사태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가족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면서 그들의 회합을 화성으로 떠나는 어느 간이역에서 마무리짓는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간이역에 만나서 화성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냐 찍지 않았냐는 것은 정서적인 영화찍기와 만들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어찌되었던 이 영화는 방식과 태도의 지점을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갖고서 움직여왔고, 감독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관철하고 싶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일단 당신이 엔딩음악에 겨우 깨어난 관객이 아니라면, 선택하면 된다. 감독의 이야기를 작게 주억거리며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사실 버틴다고 하는 순간 영화적 이야기는 다 알아들은 셈일텐데... ^^) 양자 택일의 이분법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정서적으로 동화할 감정의 표현도 없고, 드라마틱한 갈등도 없고, 따라가야할 주인공도 모르채 영화를 다 보았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눈물을 짜내거나, 가슴이 움직일 드라마틱한 파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묘한 인상, 이들이 어찌되었거나 하나의 개인들이고 각자의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으로 영화적인 파토스를 생성한다. 나만 그런건가? 당신도 보면 좀 그럴거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당신에게 격정적이지도 않고, 아리까리하기만 한 영화적 인상을 남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엄밀하게 관객과의 소통이란 친절하냐 불친절하냐의 측면보다는 어떤 방식의 소통을 요구하느냐로 시작해야 한다. 마치 TV처럼 주저리 주저리 대사를 쉬지 않고 내뱉어내는 설명조의 이야기는 엄밀하게 일방적 전달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의 영화는 TV 드라마와 별 차이점을 지니지도 못할 뿐더러, 이 지점에서 얘기한다면 <마지막 밥상>은 불친절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지적 영화"의 측면과 실험적인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다가가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의미를 형성하고 영화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장면들에서 정보가 부족한 것은 감독의 실수라고 받아들일 자세 조차 필요하다. 그의 첫 장편영화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짚어내야 한다. 노경태 감독을 위해서....)


5. 맺으며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다른 영화가 가능한 것도 같다. 하지만, 객석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배급의 기회 조차 못 갖는 것은 이미 무대조차 가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만든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가 하면 노경태 감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른 영화가 가능한지는 몰라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에너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며 살아온 나는 언제나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었고, 왠지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소심함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차리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 그의 영화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꺼져가던 불씨에 산소 한 움큼을 던져준 셈이다.
 
012

오늘은 미등록된 포스터들을 정리하는 와중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났다.

포스터를 정리하는 일이지만, 난 왠지 포스터를 찾았다기 보다는 '만났다'고 표현하고 싶다. 마치 영화를 만나는 것처럼..
게다가 에드워드 양(양덕창)은 뭐랄까?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젊음을 유지했던 감독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무 우습게도, 너무 부끄럽게도... 혹은 너무 안타깝게도.. 나는 영화광이 아닌 영화쟁이로써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하나 그리고 둘]이 내가 본 첫 작품이었다. 몇년 전에 Film2.0의 부록으로 나눠줄때 옳다구나 DVD 한 장 더 늘리는 데 급급했던 나의 허영이 그의 작품을 만나게 해준 계기였으니 더이상 말해봤자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기억에 그렇게 받은 DVD조차 한 달은 그냥 꽂아두었던 듯 싶다. 어찌되었건, 부피 채우기는 항상 나의 허영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켰다가 이내 곧 부끄러움을 주는 까닭이 겨우겨우 꺼내서 본 영화다. 당연히도 미루고미루는 와중에 두려움 (혹은 변명?) 중 하나는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일단 시작하고나서는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왠지 거리를 둔 카메라가 그다지 다이나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지만, NJ와 틴틴, 양양의 애정 플롯들이 평행하게 교차하는 순간에 나는 완전히 놀라버렸다. 아마도 난 그 때 처음으로 영화가 영화답다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그의 영화는 현실을 지극하게도 잘 담고 있었다. 더도 덜도 아니게.....

그리고 2005년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대만 뉴웨이브전에서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았고, 그제서야 벼르고 벼르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났다. 4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에 역시나 쫄아서 들어갔지만, 단 한번도 졸지않고 좌왁 빨려들어가서 보았다. 마지막에 정녕 그녀를 찌르던 장첸의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영화는 대만의 근현대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것은 남한의 모습과도 너무 흡사했다.

그리고 참석하진 못했지만.. 올해는 양덕창을 기리면서, 부산영화제에서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대부분은 보았지만 그의 진정한 데뷔작인 [해탄적일천]을 부산이 아닌 서울, 서강 데뷔작 영화제에서 볼 기회가 있었고... 당연히도 달려가서 보았다. 역시나 그의 힘은 뭐랄까.. 자신히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한 확고한 방향성. 그리고 그것을 복잡하지 않고, 젠체 하지 않는 평범한 방식, 그러나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개인과 사회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도 않으면서 잘 담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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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포스터


이제 더이상 그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장편이 8편밖에 되지 않은 많지 않은 필모그래피에서, 그의 영화들이 언제나 우리에게 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더욱 자주 갖고 싶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의 포스터를 만나서, 기뻤지만... 흥분하진 않았다. 무언가 아스라한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떠올리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