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Abbey Road 표지를 떠올리게 한 스틸컷



10월 30일 미로스페이스에서 있었던 독립 장편영화 쇼케이스를 다녀왔다.

제목은 <마지막 밥상>. 이 영화는 감독의 이름도 몰랐고, 단지 위에 올린 사진을 어디선가 보았으며,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하는 비틀즈의 Abbey Road의 앨범 표지를 떠올리게 해서 뇌리게 강하게 남은 제목의 영화였다. 알고보니 20기 선배가 촬영을 했더군.
그리고 10월초 해피투게더 독립영화를 보고 뒷풀이를 하다가 옮긴 자리에서 노경태 감독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그의 차기작 시나리오까지 받아 읽어봤던 터라.. 이 영화를 꼭 보리라 했었다.


1. 실험영화같은 방식(?)으로, 또는 파토스를 제거하는, 드라마를 세우다.
실험영화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지하고, 본 것 조차 없는 터라 뭐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단지 (상영회에서 나눠준 자료에 따른) 노경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르면 그는 계속적으로 단편,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이고, 당연히 그러한 방식에서 이어지는 일관성 혹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꺼내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일단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참고해야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용어 사용을 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정서에 호소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인물들의 이름 조차 알려주지 않고, 심지어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지만)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두 단위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날 관객중에서는 할머니와 손자의 근친상간이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이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그 관객을 실소하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 그 관객을 욕할 수는 없는 거다. 영화는 정말로 상영이 되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감독의 의도 찾기 놀이는 말그대로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부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어있고, 배우들은 박제화한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서에의 호소? 그런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말라고 한다.
영화는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스크린에서 돌아가는 이미지들만 봐야 한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는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 고전적인 방식은 당연하게도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의 이입을 일으켜서 관객의 파토스를 자극하고 눈물과 웃음을 짜낸다음 오게되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방식이다. 어찌보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하고 일부 시도한 "지적 영화"(intelletual cinema)에 더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실험 영화가 고전적인 드라마를 벗어난 영화의 양식과 형식에 더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라는 것을 포함할 때 더더욱 이 영화는 실험영화같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이토록 폭력적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폭력을 바탕으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정보와 상황들을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파토스가 생길 수가 없다. 극도의 이성, 지적인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그리고 행위들을 보여주면서 조금씩조금씩 관객의 뇌는 쇼트 사이의 설명을 상상하고 아버지의 삶을, 아들의 에이즈를, 딸의 노력을, 엄마의 슬픔을, 할머니의 존속을 이해햐려 든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들이 얽혀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이 드라마가 된다. 파토스를 제거해서 이성적 사유만을 해야하는데 그들 사이의 드라마가 머리 속에 박히게 된다.
이 쯤되면 이 영화가 독자적인 느낌을 알게 된다.

2. 연출자의 의도대로 박제화한 '웅변조의 카메라', 휘저어댄 거품의 편집
이 영화는 수퍼16mm로 촬영해서 35mm필름으로 블로업된 포맷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영사시 문제가 발생했다. 35mm 비스타비젼을 영사실의 실수로 화면의 상단과 왼쪽이 잘린 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nA세션에서 질문해서 확인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헤드룸이 잘려나가 답답함 상태의 화면으로 영화를 본 셈이다. 어찌되었건 그것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더 준 셈이고, 하나의 미학을 더 잃은 셈이다. (제발 영사실의 실수는 이제 그만!!!!! -______________-;;;;; )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움직임이라면 주밍이 2~3번 나올 뿐이고, 거의 왠만한 앵글은 깊이감을 부각하지 않는 평면적인 상태이며, 또 대부분이 1scene 1cut으로 찍혀져 있다. 아닌 장면들도 있지만, 이 원칙이 보이는 상태에서 예외적인 것들을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그리고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보통이 LS이상으로 나온다. 이는 사실 연출자가 굉장히 카메라를 '보이게' 찍는 방식이다. 카메라가 고전적인 방식을 벗어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카메라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왜 그렇게 두고 있는지를 거의 항변하다시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웅변조의 카메라!!! 다시 말해 이제는 연출자가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를 읽어볼 필요가 생기는 셈이다.
노경태 감독은 연출의도를 "이 영화는 아이러니와 단절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지구의 오염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trivialism, surrealism and minimalism의 렌즈를 통해 나만의 코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줄 띄고) 모호한 액팅, 초현실적인 미쟝센과 탈색된 칼라는 현대 인간관계의 모순과 어색함, 그리고 세기말적인 암울한 현대사회를 표현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이러니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어로 나오는 사조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언급하긴 어려울 것 같고, 위에 설명한 카메라의 방식들이 분명 노경태 감독의 방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로 '하찮고... 현실이 아닌 것 같고..... 매우 작은.....' 단서들에서 출발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화적인 공간이 탄생한다. 감옥들의 방이 그렇고 지하철이 그렇다. 지하도도 그렇다. 면접보는 공간도 그렇고, 거대한 교각 밑이 그렇다. 어항속이 그렇고... 그곳을 다니는 인물들의 옷들이 그렇다. 분장이 그렇다. 세상에 흙을 뒤집어 쓰고 줄줄이 등장해서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지구인들을 깨우는 외계인을 보았는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처음 보고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지라도....
그런가 하면 역시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속에 등장한 이상한 장면들, 이상한 인물들이다. 전혀 스토리와 상관없이 떠도는 분절된 씬들이 등장한다.  터널을 뚫는  현장 시찰의 공무원들, 엄한 곳을 파는 전화공들, 발악하는 가스통남자와 카페트녀, 주차장자리를 놓고 싸우는 아가씨와 아줌마, 점점 검은물이 들어가는 밥그릇들 등등이 이야기가 좀 아리까리할 즈음에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요 5명의 인물들간의 고개돌리기 쇼트들. 이것들이 유기적(서사적)이 않고, 자의적(시네마틱)인 상태로 영화를 세우려는 감독의 휘핑크림식 편집이다. 크림을 휘핑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자의적이고, 잘 안섞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휘핑은 반복하고 힘조절을 하고 하면 할 수록 쓸데 없는 기포는 점점 빠져나가면서 양질의 크림을 탄생시킨다. 이 영화의 편집이 마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편집 방식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궁금했던 지점은 영화가 촬영이 끝나고 나서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재편집 될 때 이는 다시 작가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모습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분리이화 되는 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거다. (반쯤은 예상했지만) 노경태 감독은 사실 시나리오상의 이야기와 거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시나리오가 나오면 영화는 다 나온거라고 했던 히치콕의 방식인 셈이다. 그 방식을 동의하든 못하든 간에 그 오케스트레이션의 방식을 통해서 씬을 이어붙이고, 쇼트를 구성하는 편집은 (실제로 누가 편집을 했든 간에) 편집자(로서의 기능과 역할)보다는 (작가로서의) 연출자를 드러낸 결과인 셈이다.


3.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배달되는 영화적 파토스!
끝내 영화의 끄트머리에 가서 어떻게 된 구성의 가족들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미 정서적인 파토스를 거세해 보면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그 가족구성원의 정보가 이렇게 저렇게다라는 사실이, 영화를 대하게 되는 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스토리 정보가 영화를 좌지우지 하고,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미 머리가 좌석이 딱 붙어서 엔딩 음악에 놀래서 벌떡 깨는 사태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가족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면서 그들의 회합을 화성으로 떠나는 어느 간이역에서 마무리짓는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간이역에 만나서 화성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냐 찍지 않았냐는 것은 정서적인 영화찍기와 만들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어찌되었던 이 영화는 방식과 태도의 지점을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갖고서 움직여왔고, 감독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관철하고 싶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일단 당신이 엔딩음악에 겨우 깨어난 관객이 아니라면, 선택하면 된다. 감독의 이야기를 작게 주억거리며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사실 버틴다고 하는 순간 영화적 이야기는 다 알아들은 셈일텐데... ^^) 양자 택일의 이분법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정서적으로 동화할 감정의 표현도 없고, 드라마틱한 갈등도 없고, 따라가야할 주인공도 모르채 영화를 다 보았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눈물을 짜내거나, 가슴이 움직일 드라마틱한 파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묘한 인상, 이들이 어찌되었거나 하나의 개인들이고 각자의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으로 영화적인 파토스를 생성한다. 나만 그런건가? 당신도 보면 좀 그럴거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당신에게 격정적이지도 않고, 아리까리하기만 한 영화적 인상을 남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엄밀하게 관객과의 소통이란 친절하냐 불친절하냐의 측면보다는 어떤 방식의 소통을 요구하느냐로 시작해야 한다. 마치 TV처럼 주저리 주저리 대사를 쉬지 않고 내뱉어내는 설명조의 이야기는 엄밀하게 일방적 전달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의 영화는 TV 드라마와 별 차이점을 지니지도 못할 뿐더러, 이 지점에서 얘기한다면 <마지막 밥상>은 불친절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지적 영화"의 측면과 실험적인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다가가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의미를 형성하고 영화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장면들에서 정보가 부족한 것은 감독의 실수라고 받아들일 자세 조차 필요하다. 그의 첫 장편영화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짚어내야 한다. 노경태 감독을 위해서....)


5. 맺으며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다른 영화가 가능한 것도 같다. 하지만, 객석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배급의 기회 조차 못 갖는 것은 이미 무대조차 가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만든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가 하면 노경태 감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른 영화가 가능한지는 몰라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에너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며 살아온 나는 언제나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었고, 왠지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소심함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차리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 그의 영화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꺼져가던 불씨에 산소 한 움큼을 던져준 셈이다.
 

영화, 그 자체를 찾는 여정.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작성자 : 정경록
- 날짜 : 10/26

1. ‘상실’을 이야기하다.
- 영화를 찾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독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상길(안길강 분)은 주구장창 영화를 찾고 있다. 독립적으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첫 시퀀스는 그 현실적인 어려움 안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드는 것(찾는 것,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그가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속초를 향하게 된다. ‘무정차’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무정차는 없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 안에서 운명적(!)인 여자를 만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후, 여자를 따라서 홀연히 여자의 동생찾기에 합류하는 상길. 여기까지 오면, 영화의 주제는 잘 드러난다. 상길의 사촌형과 숙모는 이산가족으로써,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여자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자 한다. 물론 상길은 자신의 영화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여자를 따라서 강원도의 탄광촌들을 다니던 상길은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물론 관객도). 사실 이 상황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태도와 진지함에 (혹은 뻔뻔함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제 영화는 단순히 내용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상실을 회복하려는 모습에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 영화를 욕망하다.
여자의 이름이 ‘영화’인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다. 내용 혹은 상황으로 상길이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그저 있는 이야기들 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바깥으로 보면, ‘감독은 영화를 욕망한다’는 철학적(?) 명제를 구현한 셈이 된다. 게다가 그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옛 탄광촌의 건물이다. 폐허 안에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찾기를 원하는 감독. 이 쯤 되면 사실 은유가 은유가 아니고, 이야기가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관객은 이 영화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지 물음표가 찍힌다. 감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 여자(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나서다.
결국 여자의 동생찾기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는 개발이나 자본에 의해 자신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탄광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을 오가는 동안에 상길은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속초에서의 자신의 기억 역시 탄광촌들과 다를바 없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개발과 자연의 사이, ‘거주호와 철거호’ 사이, 부산과 속초 사이, 속초와 탄광촌의 사이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 찾으려고 하는 노력만, 과정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된다. 정말로 개인지 늑대인지... 집을 나간 우리집 개인지, 자신의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는 야생의 늑대인지 구분할 수 조차 없다. 상길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다시 자신의 영화를 찾으려 편집실로 연락하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데뷔작)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2. 영화를 받치고 있는 이상한 징후들? 혹은 상징들?
이 영화는 내연의 이야기와 외연의 쇼트(혹은 구조, 또는 기호체계)들이 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상한 인상들을 남기고 있다. 먼저 가장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술집의 아저씨. 그 아저씨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횟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아저씨는 무언가를 초탈했거나 허무한 표정을 한 채로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상길의 일행의 건배에 박자를 맞추어서 혼자서 건배를 한다. 단독 쇼트와 롱샷 안에서의 포커스를 할애하면서 까지 영화는 그 인물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이 사람은 영화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아지. 속초에 도착해서 묵은 민박. 그 민박집에는 너무나도 귀엽게 ‘개밥’스러운 개밥을 먹는 하얀색의 강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살이 토실토실 오르기를 기대하는 주인이 있다. 이 영화에서 정녕 강아지라고 주장할 법한 하얀 강아지이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 함께 떠난 여정 중에 도계에서 만나게 되는 검은 강아지가 있다. (이 쇼트들은 카메라가 비추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시선과는 무관하며, 관객만이 알게 되는 전지적인 쇼트들이다.) 그러나 검은 강아지는 개가 아니라 ‘늑대’이다. 주인이 없고, 혼자서 버려진 쓰레기들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담고 있다.
폐허의 공간. 강원도에서 만나는 태백, 사북, 도계 등의 공간은 한동안 석탄 붐을 따라서 발전했지만, 광산들이 모두 폐광 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져버린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거기서 상길(감독)은 영화와 교합(!)한다. 마치 김기찬의 사진들(<서울 풍경>이라는 사진집)에 나오는 공간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꿈같다.

3. 감독론
전수일 감독을 논하는 데 있어서 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스토리텔러?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스타일리스트?인지는 전후작들을 더 살펴보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만을 놓고 그가 어떤 감독인지를 조심스럽게 논해본다면, 아무래도 그는 성긴 이야기 구조와 약한 드라마위에 독특한 징후들을 심어 놓는 데에서 영화를 세워나가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징후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계속적인 잔상을 남겨놓음으로 해서 어떤 영화적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이번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는 드라마와 시네마 사이에서의 고민점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길의 여행은 마치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여행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는 그래도 영화의 메인 플롯을 이루면서 마지막 시퀀스를 가능하게끔 했다. 결국에 숙모가 돌아가시고, 그가 다시 부산에서 속초를 향하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눈덮인 강원도의 한 골짜기에서 영화를 끝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것일까? 오히려 커다란 구조에서 영화를 강원도 여행을 둘러싸고서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한편의 완결된 형식의 구조를 갖고서, 그의 고민과 환상특급을 구현하는 쪽을 선택했다면 어떨까? 그것이 구조의 측면에서 <개와 늑대>를 형성해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를 놓고서 ‘만약’이라는 단서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설명불가능한 징후들을 형성하고 그것의 분위기를 더 이끌어내는 것이 구조와 특정 쇼트들을 기반으로 더욱 영화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수일 감독은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적인 이름, 제목, 쇼트들에서 매우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말그대로 이 영화를 완성한 시점에서 그의 결론과 일치할 것이다. 모호한 예술성을 근간으로 끝내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려고 한 점에서 그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2층의 공포.

-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분석이므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딴지를 걸지 마시오. 하지만 그래도 정녕 딴지를 거신다면, 정말로 당시에게 러브러브를 날려줄 것임을 명심하시오!! ^^

2층이라는 곳.

우리에게 있어서, 2층이라는 곳이 가지는 의미.

우리가 가진 역사에서 우리의 건물들은 어느 양식에서도 2층을 찾아보는 것이 힘들다. 보통의 옛날집에서 서민들은 흙벽과 짚을 댄 초가집에서 생활했고, 권세있는 양반들도, 비로 굇돌 위이고, 평지보다 바닥을 돋아서 집을 지었을 지언정, 집이라는 생활공간에서 2층을 만날 수는 없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관공서나 도심에서 여러층의 서구식 건물이 들어섰고, 어떤 일본인 지주, 혹은 한국인 지주들은 일본식의 2층집을 지어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보통 한국인들의 생활공간에서 2층집은 실제로 낯설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평지 혹은 1층이라는 같은 층에서 살아온 가정에 “2층”이 배달된 셈이다. ‘편지는 반드시 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했던 라깡(혹은 지젝)의 말들과 다시 만나는 셈이다. (사실 이런 말 쓰는 거 싫어하는 데 왠지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재미있어서 ‘끼워넣기’!) 이러한 명제를 갖고서 출발하는 게 앞뒤가 바뀐 건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1960년이라는 한국에 <하녀>는 대중들 앞에 처음 선보였고, 10만 이상의 관객이 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흥행영화가 되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집에 ‘2층’이 배달되었다. 2층집을 짓는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중상층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가정이어야 한다. 2층이란 필연적으로 상승운동을 통해서 올라가야 한다(물리적 상승이 신분적 상승과 같은 의미). 또한 2층이란 공간은 진짜 땅에서 떨어져 있고, 가짜 땅(콘크리트 바닥)을 밟고 서 있어야 하는 곳이다(하늘과도 같은 가상의 공간, 혹시라도 옥황상제?).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 2층에 ‘하녀’가 산다(그녀 역시 천상의 여자?). 그러나 김기영 감독은 그러한 환타지를 당연하게도 그 시대의 암담함과 어두운 면과 연관지은 공포의 존재로써 바꾸어냈다. 한발짝 떨어져본다면, 하녀가 사는 2층은 외계의 다른 행성과도 같고, 하녀는 에일리언과 다름없다. 결국에 2층에 올라가면 모든 사건이 터져 나오고, 거기서 에일리언은 숙주(남자)를 통해 생존하려고 하지만, 결국 숙주가 숙주임을 포기하면서, 다시 지구라는 1층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리고 끝내 1층으로 돌아온 숙주와 에일리언은 끝내 1층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영화의 본 내용은 끝난다. 하녀에게 있어 1층은 오히려 외계인 셈일테니......



<아래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다 쓰고 올리려고 하였으나 괜히 집중해서 뭔가 쓰질 못하는 요즘의 상황때문에 일단은 위에거라도 올린다. 아래는 차차 채워나갈 기회가 있으려니...>

가족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가족적인 공간이 없는 가정.

이 영화안에 집은 크게 거실 겸 안방, 부엌, 계단, 피아노방, 하녀방, (테라스)로 구성된다. 절대 어디에도 두 아이들만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유리라는 프레임 혹은 스크린 속 스크린

뎅깡쇼트가 없는 스튜디오식 세트.

양식적 연기 - 에이젠슈테인, 마이어홀드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다. 첫째로, 우주에서 지구로 찾아든 침입자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의 자식들이 자꾸 위험에 빠지게 되고, 주인공들은 자신의 아이를 구하는 데 정신이 없다는 두 번째 지점, 마지막으로 이 침입자들이 주인공들의 영웅적 노력이 아니라, 지구라는 낯선(그들에게는 분명 낯설지..) 행성에서의 부적응(혹은 면역 부족)으로 망하게 된다는 커다란 틀들이 매우 비슷하다.

 

나는 여기서 영화들이 왜 이런 반복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영화들이 가족애를 강조하는 결말을 갖고 있다. 단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두 편이 너무나도 비슷한 구조와 성격을 갖고 있기에 집중 조명해보자는 것일 뿐!

 

내러티브를 단순화 해보자.

 

1.     전제로서의 사건 우주왕복선의 추락, 그리고 그에 묻어들어온 이상한 외계의 바이러스.

2.     주인공의 남편에게 바이러스 중독

3.     주인공의 환자 남편 역시 중독

4.     점차 커지는 위협

5.     주인공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놀러가는 전환 사건

6.     주인공이 알게 되는 주변의 사건들(바이러스의 발견, 남편의 변화)

7.     아들구하기 및 살아남기

8.     해결책의 발견

9.     그리고 대단원

 

위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러면 이것을 다시 갈등이라는 측면으로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의 가장 큰 갈등은 [외계의 바이러스 vs 지구인], 메인플롯은 지구인들이 죽도록 고생(?) 후에 살아남기쯤이 될 거다. 그리고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미분해보면,

 

1.     [주인공의 남편 vs 주인공 정신과 의사]

2.     [아이의 납치 vs 아이의 엄마 (주인공 정신과의사)]

3.     [남편으로부터 바이러스 감염 vs 잠들지 않아서 감염을 이겨야 하는 주인공]

 

식으로 다층화 한다. 가장 큰 외연에는 위에서 언급한 사회 대 사회의 갈등이 싸고 있으면서, 그 안으로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사회의 갈등 들이 다층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형태의 갈등 구조인데,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 2,3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2,3번 갈등이 이루어지고 작용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가족주의인 셈이다. 비록 남편이라는 상징적 권위가 배제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가부장(다니엘 크레이그)이 등장하면서 대치되고, 그 근원으로는 아들을 구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모성애가 가장 큰 핵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결국 이 가족이 붕괴되지 않고, 다시 안정적인 엄마,아버지,아이라는 축으로 가족을 이루면서 이 영화의 질서는 모두 회복한다. 아이의 뇌염 면역은 주인공에 의해서 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대 사회적 갈등인 지구인의 살아남기에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은연중에 가족이라는 집단으로 회기함으로써 우리가 살아남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또 하나의 보수반동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키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이렇게 강한 선언을 하는 것은 나의 쓸데없는 버릇이라고 생각하고!!!! 갖다 버리라고 하셔도 상관없고!!!

어찌되었거나, 이 영화가 끌고 가는 주인공 니콜 키드만의 가장 큰 갈등은 아들 올리버를 지키고 싶다는 지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바깥의 갈등과 무관하다. 혹시라도 올리버가 수두를 앓고, 뇌염에 관한 면역이 없었다면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긴 개연성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러한 내러티브적인 개연성보다도 아버지를 새롭게 대치하는 다니엘 크레이그는 결국엔 대안이 아닌 대치일 뿐이라는 지점에서 결국 활성화 에너지가 모자라서 다시 메타 스테이블한 상태로 내려앉은 영화의 운명 및 결론이 슬퍼보일 뿐이다.

 

한편, <우주전쟁>의 경우, 딸은 구하려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이 눈부시다. (희한하게도 니콜 키드만은 아들을 구하고, 탐 크루즈는 딸을 구하는데 거의 목숨을 다 바치면서 뛰어다닌다. 그런데도 더욱 아이러니컬한 (영화밖) 사실은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을 영위할 당시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가족이었던 두 배우가 아이도 없는 채로 찢어져서 각각 가족의 온정이 넘치는 영화를 찍었으니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신가? 거참 장난도 심하시지) 개인적으로 <우주전쟁>을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실망감을 가졌다. 실망감을 갖고서 내가 왜 실망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1차적인 답은 탐 크루즈의 이미지였다. 그는 출연한 전작들에서 꽤나 열심히 뛰어다니고 능력이 뻗는 요원이었기 때문이고, 나는 <우주전쟁>을 보면서, 탐 크루즈가 화성에서 온 트라이포드를 부수고, 외계인을 처단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영화안에서 단 한번 수류탄으로 트라이포드를 부수는 장면을 봤을 때는 정말로 영화의 남은 1/3이 우리의 영웅탐 크루즈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기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전쟁>에서 빛나는 장면은 탐 크루즈가 차를 갖고서 도망치려고 할 때이다. 굴러가는 유일한 차를 본 군중들은 그것을 뺏으려고 달려들고, 그는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한 장면은 <인베이젼>에서 (이미 변신한) 외계 지구인들이 니콜과 아들이 도망치려는 차 위로 달겨드는 장면과 겹친다. 이것은 두 영화에서 공통된 공포이고, 각각에서 괜찮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벗어나서 현대 사회를 생각해보면, 점차 가족의 단위는 축소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고, 가족간의 혈연 역시 그 끈끈함이 묽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전 지구적 위기를 가족주의를 통해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러한 영화들이 갖고 있는 성찰들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이 강조하는 퇴행적(!) 이데올로기인 가족주의를 다시 불러들어야 하는 것인가?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사실은 그렇게 얼굴에 무언가 뱉어지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외계인이다.

모두(?) 다 알다시피, <인베이젼>은 이번이 4번째로 만들어지는 영화다. 잭 피니라는 소설가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4명의 자식이 만들어진 셈. 그러나 이는 돈 시겔의 1956 <신체강탈자의 침입>, 필립 카우프만의 1978년작 <신체강탈자의 침입>, 아벨 페라라의 1993 <바디 스내쳐즈>(국내 출시명 : 바디 에일리언)에서 현재 올리버 히르비겔의 <인베이젼>까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거꾸로 보았다. 시대의 역순을 따라가면서 이번 추석 프로젝트(?)를 실행한 셈. 괜찮은 느낌의 순서를 나열해 본다면, 첫번째로 1978년 필립 카우프만 작, 2번째로 1993년 아벨 페라라 작, 1956년작과 2007년작은 비슷한 느낌이라고 혼자서 나열해본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재미와 관심에 관한 것이며, 특별한 기준에 의거해서 순위를 매긴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4작품 모두가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어설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화란 보는 자의 취향과 마음에 달린 법이니까! 딴지를 건다면 내 맘대로 !’을 날려주리라. 푸하하하..

 

여러 군데의 리뷰(최소한 네이버 검색에 의해서 나오는 홍성진의 영화해설이나 어떤 개인들의 영화평)들을 살펴보면 뻔히 나오는 말들이 바로 시대와 엮어내는 지점들이다. 이런 분석은 결국엔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라면 누구나 찾아낼 수 있으므로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다. 그런 건 내가 써도 내 것이 아니니깐. 정 궁금하면 알아서 찾아볼 것. 억지로 세로축을 사다리 삼듯 이어야 하는 부분에서만 다시 조금씩 언급하는 수준일 것임을 미리 알리는 바이다.

 

우선적으로 살필 영화는 당연히도 <인베이젼>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처음으로 뒤에서 들린 말은 완전 무서, 완전 무서. 허리가 다 아파라는 어떤 여성의 말이었다. 그 문장 속의 느낌은 몇해 전 내가 <큐브> (지금은 없어진) 동숭 씨네마텍에서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그러한 촉각과 동일한 것이었다. 생생히 기억하건데, 난 그 때 <큐브>를 보고 나오면서 허리에 굉장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허리가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뻣뻣함을 느꼈던 가장 무서운 영화였고, 그 기억을 그대로 소환하는 말이었다.

한편, 그 사람의 말은 나의 기억을 떠올렸으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나에겐 그 때 그 느낌을 고스란히 재현시키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여기저기 검색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올리버 히르비겔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올리버 히르비겔이 촬영을 완료하고, 편집한 버전에 대해서 제작자(조엘 실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감독(제임스 맥테이그)을 고용하여 많은 군중씬들을 재촬영했고, 다시 편집되었다. Imdb의 데이터로는 제임스 멕테이그는 ‘not credited’이다.

그래서 일까? 올리버 히르비겔의 편집본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랬더라면, 이전의 3편의 작품들과 비해서 어떤 평가를 들었을까? 막연히 상상해 보지만, 그것은 전혀 알 수가 없으니만약에 존재만 한다면, 제임스 본을 고용해서라도 그 편집본을 훔쳐오게끔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랬다면, 좀 더 이 시대상과 맞물려서 영화는 더욱 강한 인상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간단히 전작들을 얘기하자면, 돈 시겔의 작품은 당시의 매카시즘을 암시하는 바가 있고, 필립 카우프만의 작품은 70년 후반의 급격한 사회의 보수화를 꼬집는 면이 있다. 또 다른 리메이크작 아벨 페라라의 작품은 90년대 초 미국의 첫번째 이라크 침공과 관련한 미국사회의 보수성을 짚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샛길, 무엇보다도 아벨 페라라의 작품에서는 그 변화하는 주체로서,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군인들은 외계의 식물에 의해 변화했지만, 내 생각에는 군인들은 굳이 그렇게 변화하지 않았어도, 똑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경직성들을 잘 표현하는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폭격에 의해 부서지는 군대의 모습은 이상한 쾌감을 전해주고, 뭔가 아이러니컬함을 남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베이젼>은 충분히 앞의 작품들의 성향을 이으면서, 또 한편으로 독자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2007년 현재,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괴뢰정부를 세워놓은 상태이다. 물론 그렇게 확대 해석 하지 않더라도, 현재 미국(한국도 다름 없지만) 사회에서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을 충분히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사회는 이것을 가족주의의 온정(?)으로 치유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인베이젼>을 위시한 신체 강탈자시리즈가 갖고 있는 강점이자, 독자성은 한 문장의 대사로 대표된다.

 

“My husband is NOT my husband.”

 

익숙했던 사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감정과 표정 등이 탈색되어서 나타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위의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원래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일 뿐이고, 어떤 다른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져오는 두려움은 무엇보다도 크다. 그것은 어떤 괴수보다도 무섭고, 에일리언 보다도 무섭다. 저 대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네 편의 영화를 통틀어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 역시 그러한 ‘NOT’의 지점이다. 우리 사회안에서도 그러한 폐쇄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거꾸로 반대로 그것을 작용시키고 있다. 예전에 박노자씨는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자신이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미 귀화한 지 수 년이 지난 그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 시장의 아줌마는 박노자씨를 한국인이 NOT(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모 언론의 기사는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몇몇 출연자들의 국적인 한국임을, 다시 말해 그들이 외국인이 NOT임을 걸고 넘어지면서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다들 좀비가 되어버린다. 한국에서 외국인은 외계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 영화가 1차적으로 깔고 있는 메시지는 이렇게 억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우 굉장한 상업적 완성도로 잘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시지 따위를 지우려고 편집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히르비겔 감독의 편집본이 궁금하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정녕 그러한 외계인들과 같다. 획일화하는 우익집단이 판치고, 스포츠 민족주의가 판치고,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신체강탈자시리즈에서 보이는 미국의 모습과 다를 것은 크게 없을 것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볼 때 별 씁쓸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몰락>을 만든 독일 감독 올리버 히르비겔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이고, 그의 완성본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제작자 조엘 실버는 다른 감독을 데려다가 재촬영, 재편집을 통해서 완성한 새로운 영화가 가족주의라는 또 다른 우파적 생각으로 영화안의 비극 혹은 재난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그럼 어디쯤에 서야하는 걸까 의문이 생기지만, 그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78년판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 답이지 않을까? 결국엔 그 도날드 서덜랜드 처럼 되는 게 아닐까?

 

ps. 그래서 요즘 괴상한 소리과 그 제스쳐를 연습중이다. ^^ 그건 바로 이거다

OoO

궁금하면, 78년작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보시길.. 이걸 알고 나면 열라 무서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