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한 <안녕? 허대짜 수짜님!>을 보았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기획한 극영화이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해 왔던 노뉴단의 첫 장편 극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가질만 하다.
자 그렇다면... 영화는?

노-노 갈등의 문제를 제기하다.


90년대 초반의 <파업전야>를 기억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고, 공안정국의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 노동현장 및 각 대학에서의 상영을 진행했던 엄청난 영화다. 민주화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엔 여전히 사회적 분위기가 엄숙하기도 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열망들이 만나서 완성되었던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스탭들은 현재 충무로의 각지에 뻗어나가 영화를 하고 있고, 90년대의 중반 학번이었던 나조차 공대 지하의 어느 강의실에서 쉬쉬하면서 겨우 보았던 영화이다. 그 <파업전야>의 그림자가 21세기에 다시 드리워졌다.

<파업전야>와 <안녕? 허대짜 수짜님!>(이하 <허대수>)님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거리감만큼이나 너무나 다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동영화'라는 단어를 쓴다면 하나의 궤를 이룬다고 할 수 있지만, 두 편의 영화를 안으로 들어가서 본다면, 그것은 정말로 판이하게 다르다.
갈등의 소재가 '노-사'였던 <파업전야>, 그러나 IMF이후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친 대한민국은 새로운 신조어 '비정규직'이 등장하고 이것은 다시 '노-노'(정규직-비정규직)갈등을 만들어냈다. 이게 현재 21세기의 가장 극렬한 초상이다.
이는 분명히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에 신자유주의의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란 여전히 '서민' 옆에 붙어있는 단어이며, 그것은 결국 외적으로 양적팽창을 중심으로 내적인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섬찟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의외로 익숙하다. 현재 이미 현대자동차 노조는 신차조립라인의 투입을 앞두고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고, 거기서 주인공인 허대수는 정규직 노조 대의원으로써 사측과 협상의 주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200명 감축안을 20명의 비정규직 감축안으로 협상성과(?)를 이뤄낸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 노조는 투쟁을 계속하고 그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런 가운데 딸이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우연히 딸이 사귀는 남자가 비정규직 노조 투쟁에 앞장선 세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대해서 딸을 생각한답시고, 거짓말로 아픈 척을 하고 딸은 잠시 결혼얘기를 접는다. 게다가 세희는 계속 마음에 들지 않는 가운데 실제로 디스크 진단을 받는다. 한편, 처남의 실수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고, 결국 아버지를 철썩같이 따르고 존경했던 딸 연희는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집을 나간다. 그래도 세희는 대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딸을 찾아 세희를 쫗았던 대수는 옛날 직장동료였던 영조를 만난다. 98년 대투쟁때 영조를 외면했던 대수. 그리고 그의 재해 진단은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다. 망연하게 공장에 서있던 대수는 갑자기 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때 세희가 대수를 구하려다 같이 다친다. 둘은 어줍잖은 화해를 하게 되고, 세희는 좀 더 강한 투쟁을 해야한다고 마음먹지만, 대수는 절대 안된다고 세희를 말린다. 그리고 퇴원후 대수는 마음을 바꿔먹고 사측과 재협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다. 쉽진 않지만,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힘을 합쳐 사측과의 협상에 성공하고 세희, 연희는 결혼한다. 그리고 예쁜 딸을 얻는다.
영화는 손녀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

대충 내용은 이렇다. 익숙한 TV드라마 같은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사실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해결이 난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 새로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원인에 대한 고찰 부족.

영화가 진정으로 얘기하고자 한 지점은 어디일까?
정말로 노-노 갈등을 다루고자 한 것인가? 노-노 갈등이라면, 그 안에서 무엇을 문제로 제기하고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과정까지가 주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노-노 갈등의 출발점은 사실 IMF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다. 사실은 매우 고전적인 수법이라고 봐야한다. 중세 사회에서 지주와 농노(혹은 소작농)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름'이라는 특별한 지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노사관계에서 끼어있는 정규직인 셈이다. 이런 것을 '분리주의'라고 한다. 분리주의는 계급적이기도 하고, 민족적이기도 하다. 물론 계급적인 차원이 더욱 심각하고, 만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용자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불만들을 완충시키기 위해서 중간자를 두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들에게 돌아가야 할 저항은 중간에서 흡수되어버린다. 바로 허대수가 처한 상황처럼 ...
여기에 대항할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은 바로 노-노 갈등을 노-노 '연대'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방법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은 핵심이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을 그렇게 쉽게 던지더라도 그 현실 안으로 들어가면, 매우 첨예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파이 영화에서 가족들을 볼모로 잡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잡는 것도 그러한 이유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명분은 약자에게 있다. 그러나 실리는 강자에게 붙어야만 생긴다. 즉, 기본적으로 희생정신이 생기지 않고서는 거의 이러한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어내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허대수>는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가? 이 영화의 기획의 출발점이 바로 현대 자동차 정규직 사내방송에서 시작했다면, 더더욱 그 갈등의 시작점과 중간 과정, 그리고 그것이 어떤식으로 해결이 나는지에 대해서 더욱 주목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지점에서 허대수가 마음을 바꾸고, 재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비정규직노조와 정규직 노조가 텐트앞에 모여들어 웃으면서 끝이난다. 그리고 정작 해야할 이야기는 애니매이션 부분에서 해설로써 끝을 맺는다.  결국 영화는 그냥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연대해야 해!'라는 '선언'만 한 셈이고,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영화의 아버지격인 <파업전야>에서 조차 시나리오는 훨씬 뛰어나다. 단지 노-사문제에서만 하더라도, 내적 약점을 가진 자를 포섭하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갈등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노-노 간의 갈등은 단순히 친구(영조)에게 잘못했던 자신의 과오, 그리고 딸과의 관계, 세희의 인간성 등으로 손쉽게 그 갈등을 봉합해버리고 만다. 해결은 가족주의다. 사실 이 부분에 난 노동영화는 사실 퇴행했다고 느꼈다.
이는 단순히 감독이 현대 자동차 노조에 대해서 얼마만큼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회를 보는 틀에 있어서 너무 순진한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알면서도 뭔가 한계에 봉착한 나머지 외면을 해버린 것일까?
어쩌면,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플롯이 잘 섞이지 않아서 일까?

영화적 재미?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을 찾는다면, 바로 의사 캐릭터가 아닐까? 대수에게 디스크 진단을 내리는 의사야말로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다. 그에게는 어떠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재해진단을 자주 접한 의사로서의 본연의 건조함만 남아있다.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의사로써의 따뜻한 인간미 따위는 세세하게 가지지 않고, 오로지 사실의 진단을 내리는 데에만 집중한다. 영화는 사실 여기서 가장 영화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오히려 이쪽에서 좀 더 재미난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매일매일 아픈 사람을 상대하고, 똑같은 조끼를 입는 사람만 보는 의사는 당연하게도 삶이 별다를 것이 없을테고, 그런 가운데 새로이 나타나는 환자들에게 인간적인 교감을 하기는 커녕, 정확히 진단해주는 것만이어도 어디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산업재해 문제를 좀 더 깊이 가져가서 재해 진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를 가진 사람으로 끌어올렸다면, 노-사간의 문제에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기서 허대수는 자신이 돕지 못했던 영조와의 문제, 거기서 사실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문제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예전에 친구를 돕지 못했던 자가, 지금 와서 자신이 같은 처지에 처하는 아이러니에 방점을 맞추었다면, 그리고 다른 비정규직인 세희 혹은 사측에서 나오는 어떤 인물들이 허대수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플롯이 있었다면 영화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에 영화적 드라마란 인물에 대해서 관객이 얼마나 밀착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감동과 정서가 통용될 것이고, 더더욱 원래 기획의도에 부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외에..
이 영화의 편집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유림은, 단편에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또 다른 감독이다. 그는 <크레인, 제4도크>, <낫시리아>, <새끼여우> 등의 자신의 단편에서 더 깊숙한 노동영화의 한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노동영화의 전적인 스타일 혹은 드라마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새로운 감수성을 담아내고 있는 가능성있는 감독이다. 그가 <허대수>의 편집을 맡았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더 뛰어넘는 노동영화를 기다리며..
세상의 결국 계급의 분화가 마치 아메바의 분열만큼이나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분화하는 세상속에서 각 계급의 입장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다면화할 것이다. 누구는 언제나 갑이고, 누구는 언제나 을일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최상과 최하는 큰 요동이 없겠지만, 중산층이 몰락하고, 중간 관리자들이 여러 문제에 부딪쳐서 갈려나가고 하는 와중에 중간계급의 몰락과정에서 그 자신들은 '갑'이 되고 싶어하지만 ,'을'일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개인적으로, 계급적으로 상황적으로 다양하게 펼쳐질 것임에 분명하다. 그럴수록 영화는 그리고 예술은 더욱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어서 그 면들을 아주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허대수>의 등장은 영화적인 아쉬움을 남긴다 하더라고, 현재의 시점에서 꼭 한번은 나왔어야 할 영화이며, 그것이 노동자 스스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좋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또 더 좋은 노동영화를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덧붙여..

김규항씨가 블로그에 올리던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계급01 : 우스운 건, 다들 ‘양극화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계급'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양극화라는 말은 계급적 격차가 커진다는 뜻이다.

계급02 : 세상은 공식적으로는 '국가(나 민족)'로, 실제론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계급03 : '계급의식'은 노인이 신문을 보기 위해 돋보기를 준비하듯,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계급04 : 대중들이 계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니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은, 사랑이 메마른 세상이니 사랑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계급05 : 계급을 인정하든 부인하든 계급이라는 말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누구나 계급에 속해 있다.


계급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때라는 얘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트로마 스튜디오에 관해서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들이 서울에 왔다.

<톡식 어벤져>시리즈와 최근작 <폴트리가이스트>.
B급이란 이런 것이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른바 '난 사람'들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거의 좌절의 바닥을 헤엄치다 못해,
그들의 영화에 나오는 화장실에 내가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토록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녕 그들의 능력이며, 명랑함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B급영화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생산되고 있지만,
항상 되풀이 되는 이야기는 과연 "B급"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더욱이 B급 영화의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한국 영화판에서, B급이라는 단어는 다시금 정의해야 할 지도 모른다. 99년이었나,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영화잡지 <키노>에서 박찬욱, 류승완, 오승욱, 임필성 등이 대담을 나눈 기사도 있다.
요즘의 한국영화는 참 희한하다.
로이드 카우프만의 말 그대로 "주류영화사들이 비주류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비주류영화와 B급 영화는 조금은 다른 단어가 아닐까? 한국 영화에는 비주류영화라기보다는 비주류의 감성들이 조금씩 가미되고 있을 뿐이다. 엄연하게 B급영화의 시장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80~90년대에는 비디오 시장에서 그것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오프라인 렌탈샵이 망해가고, 그러는 가운데 B급영화 시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것이 헐리우드의 "B급영화"와는 또 달랐던 영화들이지만...)
어찌 되었든 다시 돌아와서, "B급"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B급"은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떠한 '컨셉'이거나 '장르'이기 보다는 '정신'에 가깝다. 자본의 크기, 혹은 성향 등과는 관계없이 B급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오히려 영화를 떠나서 김규항의 <B급 좌파>, 또는 우석훈이 스스로를 'C급 경제학자'라고 칭하는 단어들과 더 가깝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글쎄... 본디에 인문사회학적 소양이 깊지않은 나 인지라 그것을 정확히 진단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설명하는데 노력을 해보자면....
주류사회(영화, 학자)들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숨기고, 부끄러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통렬한 풍자를 통해 지적하는 방식. 그리고 양식 혹은 방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나 문법 혹은 거동(습속 등을 포함해서) 등에 전혀 반대의 방법 혹은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복을 기도하는 것 등이 B급 정신 혹은 양식에 포함되는 것들일 거다.
물론 용어는 굉장히 포괄적이라서 다른 부분도 더 있을 것이다.
실제로 B급이 '컨셉'일 수도 있는 것이다. 뭐 아니라면 어떠랴??

B급 정신의 진수는 '나는 이렇다... 어쩔래? 넌 아니냐? 그럼 말아라..' 쯤의 태도가 아닐까?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같이 놀아보겠다는 태도. 뭐 어떻게 보면 편협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것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협하달 수 밖에...
A급 따위는 통렬하게 부수고, 놀리고, 갖고 놀아버리는 그들의 유쾌함은 정말 훔칠 수만 있다면, 훔쳐버리고 싶다. 물론 왠지 그 녹색의 구토물 등을 좀 닦고서 ...

현재까지 <트로마 in 서울>에서 본 영화들은.
<톡식 어벤져 4 : 시티즌 톡시>
<트로미오와 줄리엣>
<폴트리가이스트>
<카니발 더 뮤지컬>
이렇게 4편이다.

영화들을 한 편씩 리뷰를 쓰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위와같이 글을 시작했다.
그냥 기분상 이중에 정말 신났던 것을 꼽자면, 오히려 <트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고전적인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오고, 환타지를 가미하고, 결말을 전복시켜버리는 거침없음에 박수를 보낸다.

왠만큼 마음의 준비도 했고, 왠만큼 자극에 익숙하다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름 근작인 <폴트리가이스트>를 보면서, 꾸엑꾸엑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인분이 난무하고, 성기가 기이하게 변하는 상황들을 보고 있노라면, ㅋㅋ. 자연적으로 고개가 조금은 돌아가더라.
아직도 뭔가 내 안에 이상한 윤리나 도덕 혹은 어떤 질서와 평형에 대한 것들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일까.
하긴 신체훼손이라는 것은 언제나 공포의 느낌을 가져온다.
그러나 트로마의 재능은 그 공포감 안에 어떤 유쾌함과 신랄함이 같이 담겨온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세상은 계속 나빠지고, 뭐랄까 뉴스만 보면 토나오는 일의 연속이다.
이럴 때일수록 좀 하드코어한 자극을 영화관안에서 좀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다.
게다가 이들의 영화는 단순히 하드코어함을 넘어서 명랑하고,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현실과 어떻게 싸워야할지 혹은 어떻게 넘어야 할지에 대한 방법도 깨달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8월 14일까지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이다.
놓치지 말 것.
하하하하.


ps. 영화 한 편에 대한 리뷰를 안 쓰려고 했지만..
왠지 <폴트리가이스트>와 <패스트푸드 네이션>과의 비교를 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역사는 되풀이된다!

다들 많이 들어 본 얘기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혹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태도에 따라서 이 문장은
체념적으로 들리기도, 강렬하게 들리기도, 가치중립적인 느낌으로 들리기도 한다.

뻔하게도 역사는 단순히 한 민족, 국가 안에서 되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간을 옮기고, 또 거기서 시간을 옮겨서 다시 되풀이된다.
일단 이유는 차치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앞뒤 정황을 얘기해보자면...

<존 레논 컨피덴셜>.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틀즈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존 레논의 독보적 행보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단순히 '반전운동'을 했다는 행적으로 나름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레논은 낯선 존재이다. 언제나 남의 나라의 위인들은 '일화'로써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비틀즈의 입장에서는 60년대 말,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멤버들간의 불화 및 음악 노선의 변화로 이미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오노 요코가 있다. 그리고 존 레논은 일단 요코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도약을 한다. 68년도를 거치면서 전 세계는 이미 들썩들썩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베트남전은 발발했다. 20세기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 사회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존 레논을 낳았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냉전의 대리전으로써 진행된 베트남전 시기에 요코와 레논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 사이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단 하나 '평화'다.
이미 비틀즈 시기에서 거침없는 발언을 하곤 했던 레논. 세상은 연예인 조차 가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요코와 신혼여행을 아예 '침대 시위'로 변모시킨다. 수년간 대중의 우상으로써 군림한 레논은 그에게 가해지는 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를 적극 이용해서 세상에 거침없이 '평화를 택하라'고 소리친다. 그들의 침대 시위는 정녕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미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찾아온 미디어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며,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다름이 아니라, 레논과 요코가 전 세계 11개 도시에 "War is over"라는 짧고 굵은 메시지를 닮은 포스터를 붙였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6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메시지를 붙였다.
자세히 보면(아니 대충 봐도) "if you want it /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라고 적힌 이 문구.
TV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는 그 포스터를 붙이는 작업의 돈은 어디서 나와서 쓰냐고 묻는다. 레논은 당당하게 '지금은 우리의 주머니(pocket)에서 나온다'라고 대답한다.
어떤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레논과 요코는 자신들의 돈을 털어서 11개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저 메시지를 뿌리고 있었다. 저 메시지를 읽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이 바로 "John & Yoko"가 원하던 당신(YOU)이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미국 내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극도의 패권주의자였던 닉슨과 그의 공화당. 한편 존과 요코는 공화당의 전당대회를 따라 다니면서, 그 곁에서 평화콘서트를 주최한다. 한편, FBI국장이던 에드가 후버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한다. 흑인들의 급진당이었던 블랙팬더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인권 운동을 주창한다. 그러는 가운데 마틴 루터킹은 암살을 당한다. 이러한 장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72년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존과 요코는 절대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계속한다. 백악관 주변에서 반전평화론자들이 촛불시위를 펼치고, 닉슨은 촛불시위를 축구경기 구경하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지저분한 방법으로 존과 요코를 추방하려 한다. 체류 비자를 연장해주지 않음으로써 강제 추방을 하려고 하지만, 존과 요코는 이에 대해서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수년이 걸리는 사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고, 존과 요코는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한다.
이후 영화는 투쟁에 승리한 존과 요코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잠시 이어간다. 결국 80년 12월 9일 데이비드 채프먼에 의해 권총 암살을 당하는 걸로 생을 마감하는 존 레논.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영화를 보면서 섬찟한 것은 이 역사가 고스란히 2008년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닉슨은 이명박, 에드가 후버는 어청수, 베트남전은 쇠고기 정국, 미국의 보수기독교는 한국의 보수기독교, 반전행동의 촛불은 시청앞 촛불, 관련한 수배자들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은 2008년 한국에는 '존과 요코'가 없다.
앙꼬없는 찐빵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불만이 아니라 일종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존은 <Happy Xmas (war is over)>, <Give peace a chance>, <Power to the people>, <Imagine>, <Love> 등의 노래를 만들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고, 민중들 역시 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더욱 힘을 모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리에겐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노래가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대칭항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윤민석 이라는 민중가요 작곡가가 만들었다. 이 노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다름을 얘기하는 것이다. 존의 노래들은 메시지도 강렬하지만, 존 스스로가 원래 대중가수였고, 그의 의식이 발전하여 예술가가 되었고, 다시 사회참여로 이어진 경우인 거다. 그가 가지는 파급력은 단순한 호응과 집결을 넘어서, 예술적 승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힘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레논의 노래를 부르면서 정치적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의 힘에 감복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정말로 "If you want it"라는 말을 보고 어떻게 원하지 않겠는가? 전쟁이 정말로 끝나기를 원한다면, 노래를 부르면서 옆사람의 손을 잡고, 군인들의 총부리에 꽃을 꽂으면서 '사랑'으로 감싸안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존과 요코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어떤 분야의 누군가가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또는 준비한다고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나라의 문화가 결국에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여 '존과 요코'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일 뿐이다. 좀 더 다르게 얘기해봐도 그래봤자 수많은 '예술가'들의 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안에서 어떤 영웅을 만들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잘못 택한 길이 될 거라 믿는다.

존은 스스로가 이렇게 노래한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
from <Imagine>
간단히 말하면, 함께 하자, 연대하자 쯤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나도 친구이고 평등한 관계로서 인간의 본연한 마음으로 만나서 함께 하자는 거다. 패권 따위일랑은, 나만이 잘살겠다는 욕심일랑은 버리고 같이 살자고 말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말그대로 당신이 원하면...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된다.

서글픔만을 따져서 본다면, 분명 우리는 아직 '존과 요코'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산 '존과 요코'를 만들거나 기다릴 것인가라면 그건 아닌것 같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일단 이 영화를 보고, 존과 요코의 노래를 듣고 생각해보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서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하는 거다. 진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해야할 일은
저 위의 사진...
마지막 줄에 쓰인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 옆에 당신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다.


<Give peace a chance>
처음에 나오는 장면은 존과 요코가 침대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호텔방에서 콘서트를 하는 장면이다.
뒤에 'Hair Peace', 'Bed Peace'라고 쓰인 문구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자신의 자료화면을 내보낼때 'PEACE'라는 문구를 꼭 내보라고 했다.


<Happy Xmas (War is over)>
존과 요코의 메시지의 마지막에 우리의 이름들을 적어놓고 전세계를 누비는 투어를 시작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피스보트가 출발한다면, 나의 이름을 같이 적어주기를.. 그 피스보트에 붙일 메시지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꼭 선물하겠다.


<Love>
존과 요코의 사랑인 듯 하지만,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래서 강렬하다.
우리의 이야기다.



<Power to the people>
민중에게, 시민에게 권력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촛불을 꺼트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나가자구요.
대한민국의 '존 레논'은 어떤 사람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일단 당신의 마음에 있구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서로서로 보여주고 나눠주고, 더욱더 키워나가면 그 곳에 '존과 요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슷한 사람도 나오리라 믿습니다. 순진한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ps.
또 다른 혁명영웅이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한마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존의 노래 <Imagine>의 가사와 놀랍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다.

뭐랄까 체와 레논은 만난적이 있을까? 어찌되었건 천상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만났겠지.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ps2.
영화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 칼 번스타인은 <힐러리의 삶>의 저자이며, 닉슨을 하야 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대우자동차 CF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통령의 음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인물이다.
그외에 노암 촘스키, 타릭 알리, 월터 크롱카이트 등도 인터뷰이로 나온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영화도 보고, 더 찾아보는 기쁨을 누리기를..


드디어 인디스페이스 블로거 프렌드의 활동 시작!
그 첫번째가 바로 이 인디애니박스가 되겠다.

일단은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라는 거 미리 주지해주시고!!

"/>" width="400" height="300">

">[Flash]



뭐 전체 배경설명.
옴니버스라고 하지만, 어떤 특정한 주제가 있어서 그것을 관통한다거나, 배우(?)가 같다거나 하는 식도 아닌 그냥 단편의 묶음이라고 봐야겠다. 문화컨텐츠진흥원에서 지원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의 선정작들로 추정되고, 그중에 나름 독립애니메이션계에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세 감독의 작품들을 모은 셈이다.
하지만서도, 세 작품에는 동일하게 사용되는 소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풍선'이다. 극장에서 만나게 될 리플렛은 누가 디자인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풍선이 나오는 장면으로 앞면을 채웠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를 보면, 각자의 영화에서 사용되는 '풍선'의 역할은 모두 다르다
이건 뭐 잠시 여담삼아 하는 말이 되겠다.

일단 각 단편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

첫번째로, "미스터리 스릴러" <원티드>
세 작품 중에서 가장 동화적인 그림체를 갖고 있는 영화다. 몸통이 둥그렇고, 손발은 굉장히 가느다란 캐릭터들이 나온다. 마치 중세시대의 마을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등장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부극의 아이콘들을 많이 가져온다. 수배장이라던지, 마을의 길과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들이라던지.
초반부에 나오는 호기심이 조금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게 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내 곧 영화는 홍수라는 커다란 재난을 통해 엄청난 이입을 가져온다. 앞부분의 성긴 드라마와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는 사라진 듯 하다.) 어쨌든, 커다란 홍수(말그대로 재난)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오르게 한다. 이미 자막으로 보여주는 날짜는 1987년 7월의 시기를 알려줌으로써, 환타지적 세계와 현실적 이야기의 만남을 예고한다.(그래서 더더욱 재난영화로 보인다.) 그리고 그 재난에 대해서 대처하는 경찰과 관료의 모습은 당시(정말 '당시'만일까?) 한국 사회의 답답한 모습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이 은유하는 그것이다. (한편, 관료가 삽질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의 대통령이신 2MB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잠시 얘기를 딴 데로 새자면, 정말 이명박은 80년대 TV속의 한 장면에서 톡 튀어나온 사람같다.) 그리고 돌아와서 복구하는 세상. 말그대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이야기다.
일단 영화로써, <원티드>는 처음의 호기심이 장르의 변화로 인해 달라져 버린다. 앗, 감독의 fake인가? 그렇다면 감독 스스로가 이 장르는 fake요 하는 지점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음, 한 번 봐서 놓친걸까? 뭐 아무튼 그렇다는 말씀이다.
한편, 애니매이션으로써, 개성적으로 생긴 캐릭터들을 봄으로써 생기는 재미가 있다. 그것에 장르적인 부분이 동화처럼 펼쳐짐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컬함도 좋다.
한가지! '할머니'로 형상화한 '셀마'라는 캐릭터의 활용도가 좀 떨어지는 듯 하다. 약간의 아쉬움.
그러나 의도적으로 장르의 변주를 가져온 것이라면? 장르는 낚시고, 이면에 깔린 그 무언가를 보자면? 이 영화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해야할지도 모른다. 박수!!!!!

다음, "판타지 멜로" <무림일검의 사생활> (어제 본 상영에서는 순서가 이렇게 되었다.)
이미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보았던 작품인지라 반갑게 또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로 줄타기를 잘한다고 해야할까? 감독의 상상력와 장르의 전형들이 적당히 버무러져서 흘러간다. 멜로라는 굵은 동아줄 위에서 뛰노는 검객과 그의 애인이라고나 할까? 장형윤 감독의 재능은 바로 여기서 흘러나온다. 천연덕 스럽게 난 '애니메이션 감독'이요 하고 나오는 캐릭터들. 동물과 사물과 인간이 서로 대화하고, 변신하고 심지어 직업을 가진다. 크기는 자유자재인데다가, 서로가 뻔뻔하고, 단순한 감정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제목에서도 이미 줄타기는 예고되어있다. '무림일검'과 '사생활'이라니...
하지만, 영화는 절대적으로 감정과 감성 중심이기 때문에 거부감없이 따라서 보기 좋다. 게다가 그 순박함과 순정, 그리고 혜미의 쿨함과 쿨한 정서 안에서 여전히 순애보의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분히 현대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홍대 주변, 한강 주변, 낙안 읍성 주변 등등 실제 현실의 이미지들을 끌여들여와서 만든 장면들에서 왠지 익숙함과 함께 현실성에 더욱 참여도를 높이고 있다.
그의 전작들에서 이어져 오는 기발한 상상력과 단순하면서도 귀여운 그림체, 그리고 한발짝 한발짝씩 전진하는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당연히 흐뭇함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이 영화는 이미 다른 영화의 공간을 빌려오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로 추정된다.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에 나오는 가리봉동 쪽방의 난간과 옥상이 나온다. 뭐랄까. 이걸 찾아내는 나는 또 뭘까. ㅡㅡ; 어찌되었거나 반가웠다. 분명 마음에 드는 장면이기에 서로 빌려갔지 않았겠나.. ^^)

마지막으로, "블랙 코미디" <사랑은 단백질>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작품이다. 최규석의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각색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이 단편은 다음 작품인 <습지생태보고서>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만화가인 최규석. 특히 <습지생태보고서>는 리얼하면서, 그 이상으로 진솔한 캐릭터와 이야기. 그리고 유머가 가미되어있다. 그래서 더더욱 기대가 된 작품. 그런데 초반부에 나오는 크레딧에 익숙한 이름들이 나온다. 성우로 참여한 배우들 중에 양익준, 오정세가 있다. 독립영화계에서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면서, 연기력이 입증된 배우들이다. 기대가 되었다.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원화의 장면들을 고스란히 잘 살려내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진 시간으로 만화는 영화가 되었다. 강한 드라마를 갖고 가기 보다는 짧은 단편 안에서 각자의 캐릭터들이 잘 살아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듯. 배달온 돼지의 갈고리 손과 배갈린 돼지 저금통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걸 보노라면, 그의 다른 작품속 손가락 잘린 '공룡 둘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은 이토록 각박한 건가. 뿐만은 아니다. 캐릭터들의 계급성을 벗어나서 단순히 닭과 돼지의 등장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에 외국 플래시 애니매이션 <the Meatrix>라 떠오르는 지점도 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구안에 어디든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미덕은 '유머'인 셈이다. 감성은 분명 슬프게 가져가지만, 겉으로는 웃어야 하고, 웃음으로써 가져가야 할 심정적 괴리감을 '유머'로 만들어낸다. 복잡다단한 느낌을 말그대로 '승화'시키는 거다. 다시 한번 박수!!!


'인디'라는 것.
인디는 분명 '자본'의 종속성의 여부에서 나오는 정의일 거다. 그러나 이 애니매이션들에게 '인디'라는 단어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상상력'이라는 정의로 가야할 듯 하다. 저 너머 다른 '인디(아나 존스)'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뭔가를 욹워내려고 애쓰는 반면, 이 곳의 "인디"라는 단어는 이렇게 다른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뱀발.
옛날의 극장용 장편 애니매이션들은 분명 동화(動畵)라는 측면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말은 애니매이션을 그렸다는 느낌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즘의 애니매이션들은 분명 영화라는 측면에 가까운 듯하다. 분명 그렸는데, 카메라로 찍은 듯, 사실적 앵글들이 나온다. 또 하나의 장점의 측면에서 얘기하는 바다.
동화를 그리는 것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태도가 달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때로는 동화를 그려내는 자유로운 방식도 넘나들어야 하겠지만...
^^

강력추천합니다.

중앙 시네마에 있는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는 '6년째 연애중'인 다진(김하늘)과 재영(윤계상)의 연애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제목이 아니다.

이 영화는 간단히 말해 '연애'에 관한 '메타담론'으로 이루어진다.

그 메타적인 제목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이 글의 "제목"이다.

물론 특수성이 언제나 작용한다고 선언(!)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의 연애라는 것이 기실 요즘의 88만원 세대에게 가깝거나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Film2.0의 인터뷰에도 나오듯, 박현진 감독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 속하기 보다는 그 앞전의 X세대 혹은 Y(또는 N일수도) 세대에 더 가까운 감성을 지닌 사람일 거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 인식에 관한 출발점이 살짝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바라봐져야 한다.

좋다.

그렇다면 (살아가야할) 현실과는 다르게 (사랑에 관한) 현실만을 놓고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전적으로 그들의 6년이라는 시간의 연애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영화적으로 의미 있는가 또는 정말로 그들의 마음이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떤 관객이 나의 딴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싸울 생각도 없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스스로가 공감한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사람들은 각자가 수용의 폭도, 방향도, 성격도 다른 법이다.

1. 6년이라는 시간의 퇴적? 그리고 공감?

6년의 연애를 하는 사람은 전체의 표본에서 본다면 많지는 않을 것이다.(21세기이지 않은가? 엉덩이와 거시기 먼저 부비다가 자고, 그걸로 연애 시작하는 사람도 많고, 그것이 며칠 맞지 않으면 헤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사실 연애란, 하는 당사자들의 정치적 보수성 혹은 진보성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1차적으로 6년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나를 포함한 당신이 6년 동안 연애를 했다고 상상해보자. 지금 그 연애가 진행중이라면, 그 연애는 다분히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시작되어서 진행중인 셈이다. 간단하게 연애는 남녀간 감정교류를 통한 '교집합'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고1 수학시간에 집합론을 배우게 되므로 크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라 판단한다. 누구라도 정석의 초반부 집합론을 열심히 안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있다면 중학생쯤?

집합의 영역의 속성으로 따졌을 때, 교집합과 여집합, 그리고 합집합이 존재한다. 결국 집합 '다진'과 집합 '재영'은 처음에는 공집합이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접점을 만들었을 거다.(갑자기 도형의 방정식) 그리고 그것들은 중심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공유하는 영역, 즉 교집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집합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숨쉬게 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6년의 시간은 그 교집합을 서로 키우고 조절하면서 둘 사이의 중심거리를 결정하는데 쓰여졌을 거다.

그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고, 전제로 정해진 바로 옆집에서 살아가는 연인이다.

그러나 이 전제부터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각자 독립해서 살아가는 1인 가정의 사람들이고, 젊은 연인들이 연애를 오래하면서 유지하는 거리가 바로 이웃해서 사는 거라니? 물론 이 영화의 출발점이 그 곳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기획부터가 이미 부서졌을 테지만, 영화는 뻔뻔하게 그것을 설득할 수 없으니 첫 장면에서 그것을 제시하고 나중에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의 대사로 관객에게 영화를 '주입'한다. 어찌되었건 '서로의 프라이버시'는 각자의 여집합이자 차집합이 된다. 그리고 이내 각자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차집합은 결국 교집합을 건드리고 이내 다시 교집합이 공집합이 되는 상태로 돌아간다. 전제는 그렇다 치고 영화의 방향은 뻔한 셈이다.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라고 쓰며 기존 로맨틱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영화를 읽어내는 지점에서 무책임함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물렁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몇몇의 얄싹한 대사 말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이 영화로써 존재하는 것은 내겐 글쎄올시다. 억지로 두 사람의 이웃해 살기를 인정한다 치고 출발해보자. 뭐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영화를 따라가려 해도, 두 사람간의 현실에는 어떠한 6년의 시간이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것은 '내가 투명인간이냐'나 '이제 여동생같고 딸같다'라는 대사말고 무엇을 근거하는가? 단지 외식보다 집에서 밥해먹는거, 가끔은 자기집이 아니라 편하게 애인집에 들이닥치는 거, 회식에서 술먹고 불러내서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6년'이라는 시간의 대의성을 갖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이지 않은가? 두 사람이 6년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혹은 겪어보았을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이 영화의 6년짜리 교집합은 불량품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영화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나 하면서 생각해본다. 얼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똑같은 시간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의 감정과 거리감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보여지는가를 말하려는 거다.) 그 영화에서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는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강릉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것에 대한 묘사 중에 은수는 신문지를 깔고 발톱을 깍고, 상우는 티비를 보고 있다가 라면을 끓여먹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간의 심리적 가까움과 편안함이다. 만약에 6년의 시간이 더해진다면, 그 깎은 발톱을 상대의 얼굴에 들이대는 장난도 하지 않을까? 그러한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보여주고, 그것이 다시 6년째 연애중이라는 특수성의 대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6년째 연애중>에는 그러한 시간의 퇴적에서 오는 두 사람의 감정 상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위에 슬몃 얘기한 것은 컨셉에 맞게 상상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사실 정말 보편적이지 않은 주거형태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6년이라는 시간을 연애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6개월 전에 곁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나란히 살게 된 두 사람이 가진 과거와 그들의 이야기는 좀 더 날카롭게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는 정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1년만 연애해도 다 겪게 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6년쯤 연애를 하면, 상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익숙함이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철학도 바뀌는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것을 반영하기는 커녕, 90년의 감수성과 그 상식으로 90년대적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연인을 그려낼 뿐이다. 그러면서 21세기의 관객에게 공감하고 이해받기를 강요한다. 이 쯤되면 좀 뻔뻔한 거 아닌가?

2. 연애의 진보성? 보수성? 설득되지 않는 21세기적 봉합!

수많은 커플들이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있다. 왜냐고? 배우자 혹은 연인의 바람끼 때문이다. 보통 바람이란 걸리기 전에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걸리지 않는 바람이란 너무너무 적어서 정녕 걸리지 않고 바람피우는 사람은 거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21세기에 들어서 연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또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진과 재영은 모두 다 바람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보수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에 관한 문제도 캐릭터에 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다진도, 재영도 굉장히 밋밋한 캐릭터들이다.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특이점을 보이기 보다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 즉 외연에서 비롯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수준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물들에게 어떤 강력한 행동력을 기대하는 것도 분명 무리수다. 강철중도 아닌데...

그래서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물들의 욕망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작은 욕망들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인물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돈에 대해서 강한 동인도 없고, 각자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들을 적극 수용한다거나, 하룻밤에 충실한 리비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연인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지도 않는다. 아... 그렇다면 그들의 옅디 옅은 감정의 굴곡을 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작은 지점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그것들은 위에 얘기했다시피 피상적으로 넘어간다.

연애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냐 아니냐, 또는 일부일처주의자나 아니냐를 놓고서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라고 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느 정도 비약이 있을테니. 하지만, 분명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렇다면 캐릭터들의 행동들에서 얘기하는 진보성, 보수성이 아니라 감독이 연애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냥 애매모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영화의 결말부분에 가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클라이막스에 가면 그들은 분명 헤어진 것이다. 6년째 연애중이라는 제목에서 예견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 말의 이면을 들고서 구성한 클라이막스다. 결국 재영은 다진의 언어(빠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재영은 여전히 뻔한 이야기(랑그)를 반복한다. 끝내 다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영역을 돌아보는 것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연애 영화의 전형성이고, 보수적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다시 에필로그에 가서 더욱 어이없어진다. 각자 이웃해 살던 집을 정리하고 다시금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이는 정녕 아이러니다. 영화는, 감독은 이것을 필연 혹은 숙명적이라고 표현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녕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랑그를 앞세워서 얘기한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 헤어져야 한다. 결국 소통되지 않고서 각자 발걸음을 바꾸어서 간다. 걸어가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도착하는 문자메시지!!(이것도 정녕 편지인가? 제 때 도착하는 편지!!) 그리고 그 안에는 둘이 행복했던 시절에 주고 받았던 이야기와 둘이 못내 그리고 싶어했던 곱게 늙은 커플의 사진이 담겨있다. (아 얼마나 21세기적이고, 새로운 기술의 위력인가!!) 이것 한 방으로 그동안에 멀어졌던, 이해하지 못했던 크레바는 순식간에 봉합되고, 뒤돌아서 뛰어온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한다. 정녕 21세기적이고도 순식간에 강력한 드라이아이스 분무식의 봉합이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날카로운 메스를 담고 있다. 수술을 너무 급하게 끝낸 나머지 메스를 미처 꺼내지 못하고 봉합해 버린 거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앞으로 몇 년을 연애 중‘일’지도 모른다. 아주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정녕 사진속의 늙은 커플 처럼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단기적으로 내일은 만나고, 혹은 이번에는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것을 충분히 읽어내고서 모호한 결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본 분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