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영상자료원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프로그램.
글쎄, 일부러는 아니었는데... 다니다보니 독립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사실은 내 안에서 이미 뭔가 '다른' 것들을 원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지도.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속에 남는 이상한 이물감들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든다.
글도 못쓰고, 이러한 잡스런 글조차 다시 고쳐쓰는 버릇이 없는 나에게는 글쎄올시다.
이러한 글이 나에겐 일종의 "즉흥연기"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적 문제를 뱉어내고 남는 것은 차가운 이성의 사유일 것이다.
영화적 윤리? 윤리의 영화??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쟁점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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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이미지가 없어서.. 일단 옛날거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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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하여 - 어부로 살고 싶다]
2006|Documentary|DV|Color|75min
감독 이강길



1. 활동가로서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로서의 활동인가?

이 영화에서 화자의 태도는 굉장히 뜨겁다. 선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끓어넘치기 직전에 냄비 만큼의 온도를 갖고 있다.
누군가의 통곡하는 모습을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누구를 향해서, 무엇때문에 저토록 섧게 울고 있는가? 의문을 갖게 한 후 그것에 대한 답을 계속 유보한다. 그 답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다.
이후 물이 막혀서 말라가는 갯벌의 모습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마치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비슷한 체험을 가져온다. 그리고 말라가서 갯벌에서 기어져 나오는 동죽, 생합(조개류)들. 그것의 모습은 일순간 우리가 자연에게 어떠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인간으로 포커스를 옮겨온다. 계화도의 아침을 보여주면서, 분주하게 일을 준비하는 주민들을 따라서 우리는 계화도, 새만금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부로 살고싶다>는 3부작 연작의 제 3부격인지만, 각각은 독립된 주제를 갖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안을 관통하는 어부들의 삶과 인간다움에 대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토록 조용했던 계화도는 이제 물로 나가는 어부들과 갯벌로 채집을 나서는 사람들로 나뉘어져서 묘사된다. 그러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조제의 물막이 공사를 보여준다. 어찌보면 단순한 진영나누기? 이야기는 쉽게 펼쳐진다. 이른바 공사하는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계화도 주민들로 이분해서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대책위원회가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제도측을 오가면서 대화창구를 마련하고 작은 갈등들이 펼쳐진다. 물막이 공사가 점점 마무리를 향하고, 대책농성을 하던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이제 점점 힘든 싸움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여기서 이어지는 큰 문제는 주민들 내부에서의 갈등인 셈이다. 보상을 제대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과, 원칙적인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 그리고 마지막 공사를 앞두고서 해상시위가 이루어지고 거기서 언론들 앞에서 나서 인터뷰를 한 대책위원장은 결국 주민들의 의사를 모두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은근슬쩍 보상에 대한 말만을 언급하면서 내부적 갈등은 심화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장 뜨거운 화자가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는 감독은 가장 이질적인 형태로서 영화에 개입해서 들어온다. 느닷없이 영화를 만든이가 이야기에 참여해 올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선 느낌이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보면 낯섬보다도 델 것 같은 뜨거움이다. 하지만 끝내 영화안에서 인터뷰 장면을 돌려서 대책위원장의 거짓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인간적인 윤리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언제나 최전선에 있다. 각종 시위장면, 혹은 농성장에서 갈등의 가장 깊은 간극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담아내고, 이른바 자신이 있는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 자체가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편에 강하게 달라붙어 있다. 정치적인 활동!
그리고 이후 점점 남성들 사이에서 지쳐가는 싸움의 흐름은 여성들에게로 중심이 옮겨간다. 실리보다도 언제나 명분을 정확히 내세운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반박할 논제가 없다. 산자부의 사람들도 그녀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고작 '추운데 고생하시지 말고 이쪽으로 들어오셔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담당자들도 나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내부적인 분열과 이른바 중요한 순간에서 지지의 힘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결국 새만금 방조제는 마지막 트럭을 쏟아붓고야 만다. 그리고 펼쳐지는 태극기들. 이젠 태극기가 오염된 듯 하다.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새만금 간척 사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앞두고, 방조제가 완성된 그들의 기쁨이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어찌되었든 그들에게 갯벌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안에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발'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고, 기득권들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시 된 개발은 결국 또다시 태극기를 '전유'한다. 그 누구의 태극기인가? 효순이 미선이가 죽어가는 동안에 휘날렸던 붉은악마들의 태극기와 같은 태극기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가 하더니, 영화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류기화'씨의 죽음. 게다가 그 죽음마저 동죽들의 운명과 별다를것이 없다. 잠깐씩의 해수유통을 위해서 설치한 수문에서 어느날 갑자기 쏟아진 물에 휩쓸려 맞이한 죽음. 여기서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감독은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태도를 등장하는 이들과 삶을 합치시키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이루어낸 성과가 내부의 작은 균열들, 그리고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다시 새만금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 영화는 분명 활동가의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1차적으로 정서적인 문제에서는 성공적인 이야기전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좀 더 영악하게 활동으로 이어지는 문제는 다르게 생각해봐야 한다.


2. 객관화해서 더 들어가야할 영화

이 영화는 사실 앞서말한 화자의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는 영화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오히려 감동을 받되, 이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잘 떠오르지 않을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정서중심의 영화만들기가 흐릴 수밖에 없는 객관적 판단의 영역이다. 물론 감독이 무려 7년의 시간을 새만금에서 살아오면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영역의 사람들을 두고서 어떻게든 그 사람들을 누구는 나쁘고, 누구만 착하고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치하받아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누었던 QnA에서 하는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고, 이제 이 영화를 갖고서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것이 단순히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런이러한 상황이니 우리와 함께 해달라는 손내밈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 시선과 방식은 충분히 순진하고, 순박하다. 글쎄 21세기의 다큐멘터리적 선동(?)은 조금은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가슴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감독은 아직도 가슴이 뜨겁고, 심지어 영악하지조차 못하다. 그의 뜨거운 가슴은 영화 안에서 내레이션의 활용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내레이션'은 화자를 등장시켜서 풀어가는 직접적 설명이다. 이 영화에서는 더더욱 내레이션이 없으면 앞뒤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선택한 내레이션인가? 분명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레이션을 썼을지도 모른다. 즉, 정서적 호소! 게다가 내레이션이란 감독의 입이면서, 이야기를 안내해주는 길잡이이다. 즉, 전지적인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영화 안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관객들은 화자가 제시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는 다시 요즘 시대의 관객들에게 (더더욱 이 다큐멘터리를 찾아올 관객들에게) 억지의 강요라는 측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화자의 목소리는 민중가요 가수인 연영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장 적합한 권위가 너무나 적합해서 그에 대한 어던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만한 여지가 없을 수 있다. 이는 촬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사실 언제나 관객의 시선과 동일시 할만한 장면들이다. 특별한 중개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에서 단독쇼트들로 인터뷰가 이루어지면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간극이 발생한다. 화면은 그러한 단독쇼트와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내레이션은 강력한 권위를 갖고서 영화적인 내용, 인물들과 관객들의 거리를 가까이 붙이려 한다. 다시 말해 어쩌면 내레이션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거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이 영화를 그러한 거리감을 두고서 관객들의 현장성을 높이는 위치에 카메라가 있다. 이 상태에서 내레이션을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점하려 할 수 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어디서 이들을 보아야 하는지 찾아가는 사유를 할 여지가 생긴다. 이 때 영화는 새롭게 관객을 보좌할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스로 사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로써 이 영화는 본래 하고자 하는 목표('연대 투쟁'이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한것일까?)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감독은 좀 더 이 상황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취재는 당연히 그들의 정서적 거리를 좁혔고, 당연히 더 진솔해졌으며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찾아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좀 더 차가운 이성을 발휘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영화를 잘 만들었냐 못 만들었냐의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목적에 좀 더 부합하냐 안하냐를 고려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 명의 관객으로써 영화를 본 나 역시 새만금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하고, 영화과 감독 역시 이 문제를 더욱 잘 전달하고 앞으로 해결 혹은 투쟁해가는 데 새로이 생각해볼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차가운 이성이 영악한 감독을 만들고, 더욱 강력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구조는 영악해(?) 보인다. 전반적인 양식에서 가장 잘 선택한 것이 전체적인 구조라고 보인다. 수미쌍관으로 한 사건을 배치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수분이 모자라서 갯벌밖으로 입을 벌려서 빗물을 받아먹으며 말라죽어가는 동죽의 운명이 그레질을 하다가 휩쓸려서 돌아가신 류기화씨의 운명까지 확장하면서 그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슬픔이 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를 떠나, 진정 영화적으로 그 논리와 내적 상징이 일관되게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에 타당한 설득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타당한 설득과 정서적 감동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은 과히 쉽지 않은 일이며, 연출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하겠다. 영악한 영화만들기가 중요하다거나,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기획적인 태도로 출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과 머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이 연출자의 숙명일 것이다.


3. 맺으며

분명, '새만금'이 이강길 감독을 찾아간 것이라 생각한다. 7년의 시간을 온전히 들여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그것에 대한 가치는 단순히 글 몇줄로 표현해서는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그를 더더욱 응원하는 마음에서 이제는 이강길 감독이 '새만금'을 새로이 찾아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지만, 아직 새만금은 일부의 수문을 통해서 해수조절이 조금씩 되고 있고,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주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생죽들이 나온다고 한다. 그토록 생명은 질긴 것이다. 그의 말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그 생죽들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해서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만금 개발 사업은 온전히 한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의 존폐가 달린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그 안에 담긴 개발 지상주의, 효용만을 생각하는 자본의 횡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새만금은 이 시대의 모든 병폐를 한데 모으고 있는 아이콘일 뿐이다. 그 안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문제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제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 시점이다. 영화는 정말 고맙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공하고 있다. 오죽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커서 판사같은거 꼭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겠는가? 또한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삼성비자금 문제에서 검찰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한다. 제발 잘 알아듣자.



PS. <광고>
이 영화는 11월 21일부터 시작하는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해 있다. 꼭 보길 바라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 글이 광고의 효과를 가지기를 기대하면서........

이강길 감독 블로그
http://blog.jinbo.net/camera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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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ey Road 표지를 떠올리게 한 스틸컷



10월 30일 미로스페이스에서 있었던 독립 장편영화 쇼케이스를 다녀왔다.

제목은 <마지막 밥상>. 이 영화는 감독의 이름도 몰랐고, 단지 위에 올린 사진을 어디선가 보았으며,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하는 비틀즈의 Abbey Road의 앨범 표지를 떠올리게 해서 뇌리게 강하게 남은 제목의 영화였다. 알고보니 20기 선배가 촬영을 했더군.
그리고 10월초 해피투게더 독립영화를 보고 뒷풀이를 하다가 옮긴 자리에서 노경태 감독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그의 차기작 시나리오까지 받아 읽어봤던 터라.. 이 영화를 꼭 보리라 했었다.


1. 실험영화같은 방식(?)으로, 또는 파토스를 제거하는, 드라마를 세우다.
실험영화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지하고, 본 것 조차 없는 터라 뭐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단지 (상영회에서 나눠준 자료에 따른) 노경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르면 그는 계속적으로 단편,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이고, 당연히 그러한 방식에서 이어지는 일관성 혹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꺼내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일단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참고해야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용어 사용을 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정서에 호소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인물들의 이름 조차 알려주지 않고, 심지어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지만)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두 단위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날 관객중에서는 할머니와 손자의 근친상간이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이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그 관객을 실소하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니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 그 관객을 욕할 수는 없는 거다. 영화는 정말로 상영이 되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감독의 의도 찾기 놀이는 말그대로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부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어있고, 배우들은 박제화한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서에의 호소? 그런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말라고 한다.
영화는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스크린에서 돌아가는 이미지들만 봐야 한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는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 고전적인 방식은 당연하게도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의 이입을 일으켜서 관객의 파토스를 자극하고 눈물과 웃음을 짜낸다음 오게되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방식이다. 어찌보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하고 일부 시도한 "지적 영화"(intelletual cinema)에 더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실험 영화가 고전적인 드라마를 벗어난 영화의 양식과 형식에 더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라는 것을 포함할 때 더더욱 이 영화는 실험영화같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이토록 폭력적이지만, 반대로 그러한 폭력을 바탕으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정보와 상황들을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파토스가 생길 수가 없다. 극도의 이성, 지적인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그리고 행위들을 보여주면서 조금씩조금씩 관객의 뇌는 쇼트 사이의 설명을 상상하고 아버지의 삶을, 아들의 에이즈를, 딸의 노력을, 엄마의 슬픔을, 할머니의 존속을 이해햐려 든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들이 얽혀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이 드라마가 된다. 파토스를 제거해서 이성적 사유만을 해야하는데 그들 사이의 드라마가 머리 속에 박히게 된다.
이 쯤되면 이 영화가 독자적인 느낌을 알게 된다.

2. 연출자의 의도대로 박제화한 '웅변조의 카메라', 휘저어댄 거품의 편집
이 영화는 수퍼16mm로 촬영해서 35mm필름으로 블로업된 포맷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영사시 문제가 발생했다. 35mm 비스타비젼을 영사실의 실수로 화면의 상단과 왼쪽이 잘린 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nA세션에서 질문해서 확인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헤드룸이 잘려나가 답답함 상태의 화면으로 영화를 본 셈이다. 어찌되었건 그것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더 준 셈이고, 하나의 미학을 더 잃은 셈이다. (제발 영사실의 실수는 이제 그만!!!!! -______________-;;;;; )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움직임이라면 주밍이 2~3번 나올 뿐이고, 거의 왠만한 앵글은 깊이감을 부각하지 않는 평면적인 상태이며, 또 대부분이 1scene 1cut으로 찍혀져 있다. 아닌 장면들도 있지만, 이 원칙이 보이는 상태에서 예외적인 것들을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그리고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보통이 LS이상으로 나온다. 이는 사실 연출자가 굉장히 카메라를 '보이게' 찍는 방식이다. 카메라가 고전적인 방식을 벗어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카메라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왜 그렇게 두고 있는지를 거의 항변하다시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웅변조의 카메라!!! 다시 말해 이제는 연출자가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를 읽어볼 필요가 생기는 셈이다.
노경태 감독은 연출의도를 "이 영화는 아이러니와 단절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지구의 오염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trivialism, surrealism and minimalism의 렌즈를 통해 나만의 코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줄 띄고) 모호한 액팅, 초현실적인 미쟝센과 탈색된 칼라는 현대 인간관계의 모순과 어색함, 그리고 세기말적인 암울한 현대사회를 표현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이러니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나의 직접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어로 나오는 사조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언급하긴 어려울 것 같고, 위에 설명한 카메라의 방식들이 분명 노경태 감독의 방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로 '하찮고... 현실이 아닌 것 같고..... 매우 작은.....' 단서들에서 출발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영화적인 공간이 탄생한다. 감옥들의 방이 그렇고 지하철이 그렇다. 지하도도 그렇다. 면접보는 공간도 그렇고, 거대한 교각 밑이 그렇다. 어항속이 그렇고... 그곳을 다니는 인물들의 옷들이 그렇다. 분장이 그렇다. 세상에 흙을 뒤집어 쓰고 줄줄이 등장해서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지구인들을 깨우는 외계인을 보았는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처음 보고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지라도....
그런가 하면 역시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속에 등장한 이상한 장면들, 이상한 인물들이다. 전혀 스토리와 상관없이 떠도는 분절된 씬들이 등장한다.  터널을 뚫는  현장 시찰의 공무원들, 엄한 곳을 파는 전화공들, 발악하는 가스통남자와 카페트녀, 주차장자리를 놓고 싸우는 아가씨와 아줌마, 점점 검은물이 들어가는 밥그릇들 등등이 이야기가 좀 아리까리할 즈음에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요 5명의 인물들간의 고개돌리기 쇼트들. 이것들이 유기적(서사적)이 않고, 자의적(시네마틱)인 상태로 영화를 세우려는 감독의 휘핑크림식 편집이다. 크림을 휘핑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자의적이고, 잘 안섞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휘핑은 반복하고 힘조절을 하고 하면 할 수록 쓸데 없는 기포는 점점 빠져나가면서 양질의 크림을 탄생시킨다. 이 영화의 편집이 마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편집 방식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궁금했던 지점은 영화가 촬영이 끝나고 나서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재편집 될 때 이는 다시 작가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모습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분리이화 되는 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거다. (반쯤은 예상했지만) 노경태 감독은 사실 시나리오상의 이야기와 거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시나리오가 나오면 영화는 다 나온거라고 했던 히치콕의 방식인 셈이다. 그 방식을 동의하든 못하든 간에 그 오케스트레이션의 방식을 통해서 씬을 이어붙이고, 쇼트를 구성하는 편집은 (실제로 누가 편집을 했든 간에) 편집자(로서의 기능과 역할)보다는 (작가로서의) 연출자를 드러낸 결과인 셈이다.


3.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배달되는 영화적 파토스!
끝내 영화의 끄트머리에 가서 어떻게 된 구성의 가족들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미 정서적인 파토스를 거세해 보면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그 가족구성원의 정보가 이렇게 저렇게다라는 사실이, 영화를 대하게 되는 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스토리 정보가 영화를 좌지우지 하고,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미 머리가 좌석이 딱 붙어서 엔딩 음악에 놀래서 벌떡 깨는 사태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가족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면서 그들의 회합을 화성으로 떠나는 어느 간이역에서 마무리짓는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간이역에 만나서 화성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냐 찍지 않았냐는 것은 정서적인 영화찍기와 만들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어찌되었던 이 영화는 방식과 태도의 지점을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명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갖고서 움직여왔고, 감독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관철하고 싶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일단 당신이 엔딩음악에 겨우 깨어난 관객이 아니라면, 선택하면 된다. 감독의 이야기를 작게 주억거리며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사실 버틴다고 하는 순간 영화적 이야기는 다 알아들은 셈일텐데... ^^) 양자 택일의 이분법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정서적으로 동화할 감정의 표현도 없고, 드라마틱한 갈등도 없고, 따라가야할 주인공도 모르채 영화를 다 보았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눈물을 짜내거나, 가슴이 움직일 드라마틱한 파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묘한 인상, 이들이 어찌되었거나 하나의 개인들이고 각자의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으로 영화적인 파토스를 생성한다. 나만 그런건가? 당신도 보면 좀 그럴거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당신에게 격정적이지도 않고, 아리까리하기만 한 영화적 인상을 남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엄밀하게 관객과의 소통이란 친절하냐 불친절하냐의 측면보다는 어떤 방식의 소통을 요구하느냐로 시작해야 한다. 마치 TV처럼 주저리 주저리 대사를 쉬지 않고 내뱉어내는 설명조의 이야기는 엄밀하게 일방적 전달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전적인 서사의 영화는 TV 드라마와 별 차이점을 지니지도 못할 뿐더러, 이 지점에서 얘기한다면 <마지막 밥상>은 불친절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지적 영화"의 측면과 실험적인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다가가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의미를 형성하고 영화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장면들에서 정보가 부족한 것은 감독의 실수라고 받아들일 자세 조차 필요하다. 그의 첫 장편영화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짚어내야 한다. 노경태 감독을 위해서....)


5. 맺으며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다른 영화가 가능한 것도 같다. 하지만, 객석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배급의 기회 조차 못 갖는 것은 이미 무대조차 가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만든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이러한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가 하면 노경태 감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른 영화가 가능한지는 몰라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에너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며 살아온 나는 언제나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었고, 왠지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소심함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차리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 그의 영화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꺼져가던 불씨에 산소 한 움큼을 던져준 셈이다.
 

영화, 그 자체를 찾는 여정.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작성자 : 정경록
- 날짜 : 10/26

1. ‘상실’을 이야기하다.
- 영화를 찾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독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상길(안길강 분)은 주구장창 영화를 찾고 있다. 독립적으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첫 시퀀스는 그 현실적인 어려움 안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드는 것(찾는 것,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그가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속초를 향하게 된다. ‘무정차’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무정차는 없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 안에서 운명적(!)인 여자를 만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후, 여자를 따라서 홀연히 여자의 동생찾기에 합류하는 상길. 여기까지 오면, 영화의 주제는 잘 드러난다. 상길의 사촌형과 숙모는 이산가족으로써,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여자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자 한다. 물론 상길은 자신의 영화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여자를 따라서 강원도의 탄광촌들을 다니던 상길은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물론 관객도). 사실 이 상황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태도와 진지함에 (혹은 뻔뻔함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제 영화는 단순히 내용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상실을 회복하려는 모습에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 영화를 욕망하다.
여자의 이름이 ‘영화’인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다. 내용 혹은 상황으로 상길이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그저 있는 이야기들 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바깥으로 보면, ‘감독은 영화를 욕망한다’는 철학적(?) 명제를 구현한 셈이 된다. 게다가 그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옛 탄광촌의 건물이다. 폐허 안에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찾기를 원하는 감독. 이 쯤 되면 사실 은유가 은유가 아니고, 이야기가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관객은 이 영화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지 물음표가 찍힌다. 감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 여자(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나서다.
결국 여자의 동생찾기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는 개발이나 자본에 의해 자신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탄광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을 오가는 동안에 상길은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속초에서의 자신의 기억 역시 탄광촌들과 다를바 없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개발과 자연의 사이, ‘거주호와 철거호’ 사이, 부산과 속초 사이, 속초와 탄광촌의 사이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 찾으려고 하는 노력만, 과정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된다. 정말로 개인지 늑대인지... 집을 나간 우리집 개인지, 자신의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는 야생의 늑대인지 구분할 수 조차 없다. 상길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다시 자신의 영화를 찾으려 편집실로 연락하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데뷔작)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2. 영화를 받치고 있는 이상한 징후들? 혹은 상징들?
이 영화는 내연의 이야기와 외연의 쇼트(혹은 구조, 또는 기호체계)들이 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상한 인상들을 남기고 있다. 먼저 가장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술집의 아저씨. 그 아저씨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횟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아저씨는 무언가를 초탈했거나 허무한 표정을 한 채로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상길의 일행의 건배에 박자를 맞추어서 혼자서 건배를 한다. 단독 쇼트와 롱샷 안에서의 포커스를 할애하면서 까지 영화는 그 인물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이 사람은 영화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아지. 속초에 도착해서 묵은 민박. 그 민박집에는 너무나도 귀엽게 ‘개밥’스러운 개밥을 먹는 하얀색의 강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살이 토실토실 오르기를 기대하는 주인이 있다. 이 영화에서 정녕 강아지라고 주장할 법한 하얀 강아지이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 함께 떠난 여정 중에 도계에서 만나게 되는 검은 강아지가 있다. (이 쇼트들은 카메라가 비추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시선과는 무관하며, 관객만이 알게 되는 전지적인 쇼트들이다.) 그러나 검은 강아지는 개가 아니라 ‘늑대’이다. 주인이 없고, 혼자서 버려진 쓰레기들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담고 있다.
폐허의 공간. 강원도에서 만나는 태백, 사북, 도계 등의 공간은 한동안 석탄 붐을 따라서 발전했지만, 광산들이 모두 폐광 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져버린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거기서 상길(감독)은 영화와 교합(!)한다. 마치 김기찬의 사진들(<서울 풍경>이라는 사진집)에 나오는 공간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꿈같다.

3. 감독론
전수일 감독을 논하는 데 있어서 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스토리텔러?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스타일리스트?인지는 전후작들을 더 살펴보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만을 놓고 그가 어떤 감독인지를 조심스럽게 논해본다면, 아무래도 그는 성긴 이야기 구조와 약한 드라마위에 독특한 징후들을 심어 놓는 데에서 영화를 세워나가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징후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계속적인 잔상을 남겨놓음으로 해서 어떤 영화적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이번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는 드라마와 시네마 사이에서의 고민점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길의 여행은 마치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여행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는 그래도 영화의 메인 플롯을 이루면서 마지막 시퀀스를 가능하게끔 했다. 결국에 숙모가 돌아가시고, 그가 다시 부산에서 속초를 향하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눈덮인 강원도의 한 골짜기에서 영화를 끝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것일까? 오히려 커다란 구조에서 영화를 강원도 여행을 둘러싸고서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한편의 완결된 형식의 구조를 갖고서, 그의 고민과 환상특급을 구현하는 쪽을 선택했다면 어떨까? 그것이 구조의 측면에서 <개와 늑대>를 형성해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를 놓고서 ‘만약’이라는 단서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설명불가능한 징후들을 형성하고 그것의 분위기를 더 이끌어내는 것이 구조와 특정 쇼트들을 기반으로 더욱 영화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수일 감독은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적인 이름, 제목, 쇼트들에서 매우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말그대로 이 영화를 완성한 시점에서 그의 결론과 일치할 것이다. 모호한 예술성을 근간으로 끝내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려고 한 점에서 그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2층의 공포.

-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분석이므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딴지를 걸지 마시오. 하지만 그래도 정녕 딴지를 거신다면, 정말로 당시에게 러브러브를 날려줄 것임을 명심하시오!! ^^

2층이라는 곳.

우리에게 있어서, 2층이라는 곳이 가지는 의미.

우리가 가진 역사에서 우리의 건물들은 어느 양식에서도 2층을 찾아보는 것이 힘들다. 보통의 옛날집에서 서민들은 흙벽과 짚을 댄 초가집에서 생활했고, 권세있는 양반들도, 비로 굇돌 위이고, 평지보다 바닥을 돋아서 집을 지었을 지언정, 집이라는 생활공간에서 2층을 만날 수는 없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관공서나 도심에서 여러층의 서구식 건물이 들어섰고, 어떤 일본인 지주, 혹은 한국인 지주들은 일본식의 2층집을 지어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보통 한국인들의 생활공간에서 2층집은 실제로 낯설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평지 혹은 1층이라는 같은 층에서 살아온 가정에 “2층”이 배달된 셈이다. ‘편지는 반드시 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했던 라깡(혹은 지젝)의 말들과 다시 만나는 셈이다. (사실 이런 말 쓰는 거 싫어하는 데 왠지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재미있어서 ‘끼워넣기’!) 이러한 명제를 갖고서 출발하는 게 앞뒤가 바뀐 건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1960년이라는 한국에 <하녀>는 대중들 앞에 처음 선보였고, 10만 이상의 관객이 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흥행영화가 되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집에 ‘2층’이 배달되었다. 2층집을 짓는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중상층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가정이어야 한다. 2층이란 필연적으로 상승운동을 통해서 올라가야 한다(물리적 상승이 신분적 상승과 같은 의미). 또한 2층이란 공간은 진짜 땅에서 떨어져 있고, 가짜 땅(콘크리트 바닥)을 밟고 서 있어야 하는 곳이다(하늘과도 같은 가상의 공간, 혹시라도 옥황상제?).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 2층에 ‘하녀’가 산다(그녀 역시 천상의 여자?). 그러나 김기영 감독은 그러한 환타지를 당연하게도 그 시대의 암담함과 어두운 면과 연관지은 공포의 존재로써 바꾸어냈다. 한발짝 떨어져본다면, 하녀가 사는 2층은 외계의 다른 행성과도 같고, 하녀는 에일리언과 다름없다. 결국에 2층에 올라가면 모든 사건이 터져 나오고, 거기서 에일리언은 숙주(남자)를 통해 생존하려고 하지만, 결국 숙주가 숙주임을 포기하면서, 다시 지구라는 1층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리고 끝내 1층으로 돌아온 숙주와 에일리언은 끝내 1층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영화의 본 내용은 끝난다. 하녀에게 있어 1층은 오히려 외계인 셈일테니......



<아래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다 쓰고 올리려고 하였으나 괜히 집중해서 뭔가 쓰질 못하는 요즘의 상황때문에 일단은 위에거라도 올린다. 아래는 차차 채워나갈 기회가 있으려니...>

가족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가족적인 공간이 없는 가정.

이 영화안에 집은 크게 거실 겸 안방, 부엌, 계단, 피아노방, 하녀방, (테라스)로 구성된다. 절대 어디에도 두 아이들만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유리라는 프레임 혹은 스크린 속 스크린

뎅깡쇼트가 없는 스튜디오식 세트.

양식적 연기 - 에이젠슈테인, 마이어홀드




[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이라는 이 블로그의 제목은 영화 <괜찮아, 울지마>에 나오는 주인공인 무하마드이고, 그의 거짓말에 관한 진실여부를 판가름하는 바이올린 가방을 가리킨다.

마치 말장난과도 같지만,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결론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그 사유의 과정을 거칠 때, 영화가 더욱 생명력을 가지고, 감독과 진정으로 이 영화를 두고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까페에서 이 영화를 두고, 어제 세미나가 이루어졌고, 민병훈감독 역시 참석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뵙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한 번쯤 뵙고 싶어하던 차에 기회가 잘 닿았다. 그리고 세미나의 발제자의 발제문에서도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은 바이올린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그 발제문을 듣고, 이야기하는 와중에 민병훈 감독의 의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무하마드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은 비단 이 바이올린 가방만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정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의 가장 전면에 세워져 있는 껍데기이며, 그는 모스크바에서 내려올 때부터, 고이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가방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떠날 때 역시 가방을 잘 들고 간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하마드는 음악가로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 행동한다. 억지춘향으로 유추를 하자면, 무하마드의 원래 꿈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영화적 근거는 없지만, 인간적으로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하려던 바가 안되었을 때 하게 되지 않는가.. 신정아의 경우처럼황우석의 경우처럼..) 그렇게 전방위적 위치에 존재하는 소품이고, 무하마드라는 인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차인 바이올린 가방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비어있다거나, 바이올린이 없다거나 하는 상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하마드가 동생에게 숙제를 가져다 주러, 그리고 다시 학교를 빠진 동생을 찾으러 뒷동산의 투계장을 오르는 동안, 어머니는 무하마드의 방에 와서 그의 바이올린 가방을 열어본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이내 닫아버린다. 어머니의 표정에 커다란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감독은 세련되게(!) 바이올린 가방의 안쪽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관객들은 그것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고, 감독 역시 그 의도를 잘 유도(?)한 셈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기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만약에 그것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것들로 가득찼다면? 바이올린이 있긴 하지만, 줄이 하나도 없거나, 훼손된 상태라면? 아니면 정말로 바이올린이 들어있다면?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영화는 그 장면 이후에 다시 바이올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으며, 그 안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실제로 그 바이올린 가방이 비어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찌보면 속단이 되는 것이고, 무하마드라는 사람을 단정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마저 잠재된다. 단순한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고, 보통의 구라쟁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 하나의 진실한 순간이 있을 텐데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인물에게서 손을 놓지 않게 된다. 결국 이 바이올린 가방은 무하마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감독의 의도가 그 가방은 비어있거나, 다른 물건으로 가득찬 무하마드=거짓말쟁이의 증거라고 하더라도, 속 내부를 안보여주거나, 보여주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의 영화적 분위기를 더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무하마드의 방에서 펼쳐지던, 엄마와 관계나 대화 상에서 보여지든, 같은 텍스트를 놓고서 하나의 지점을 얘기하는 담론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는 지점이다.

 

민병훈 감독과 다른 사람들과의 영화를 통한 이야기 중에 실제로 영화관의 배급문제까지 확산이 되어서 하는 이야기 중에 영화를 만드는 자들이 해야할 역할인 좋은 영화를 만들고 그것이 관객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른바 예술영화가 일반 관객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및 그 대책의 차원에서 구조(배급, 제작 등)적인 문제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고, 대중 혹은 관객은 틀리지 않다라는 논리를 펼치는 민감독이었고, 그에 대해서 영화과 과연 제대로 소통하고 있느냐?라는 부분에서 만드는 자들의 지적 허영심 혹은 우월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던 나였다. 그러한 논점을 <괜찮아, 울지마>라는 텍스트 안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무하마드의 바이올린 가방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본 지점이고, 감독은 이 지점에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연출력의 깊이에 관한 쪽에서 내 스스로도 앞으로 더 깊어져야 한다며 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분명 전방위적으로 영화를 생산하는 생산자이다. 감독들이 의자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연출이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 역시 동의하고, 그것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지난 5월 미로스페이스에서 잠시 얼굴만 보고, 그전에는 2005년 어느 여름날 밤 홍대역 주변을 지나던 그와 마주쳤고, 그전에 서강대 다닐 적에 수업시간에 만났던 선생으로서 민병훈 감독은 내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년만에 마주한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격려를 해주었다. ‘영화를 만들어라그것이 영화쟁이가 해야할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곁에 앉은 다른 친구가 자신의 첫 단편이라며 건네주는 DVD를 매우 공손하고 고맙게 받으면서, 잘 보겠다는 약속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매우 매력적이다.

조만간 또 다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그 동안에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