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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1.01 /2007년 나의 best 10 films/ 1
  2. 2007.10.26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영화, 그 자체를 찾는 여정

/2007년 나의 best 10 films/

번역 2008. 1. 1. 18:15 Posted by Ru

아래의 순서들은 정말로 순위로 매긴 것이 아니라, 10편의 영화를 그냥 나열한 것임을 먼저 밝힌다.


1. <마지막 벌목꾼>, 위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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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디지털(만의) 영화제인 시네마디지털 서울2007 (약칭 cindi2007)에서 만난 올해 최고의 영화. 비록 10편이 순위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은 단연코 최고의 1위로 올려놓고 싶다. 흑룡강성의 벌목꾼들(이라지만, 본시엔 농사꾼들이고, 겨울에만 벌목 일을 하는)의 100년이 넘는 자연속의 생활에서 진정 마지막 벌목을 하러 가는 겨울의 전체 과정을 담아낸 수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비로소 조금이나마 "카메라와 인물(혹은 피사체)의 거리"가 무엇인지를 또는 그 거리는 얼마만큼에서 어떤 느낌을 만들어 내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과언일까? 결코 아닐 것, 어른이 되어서 맞이하게 된 강한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른다. 우연찮게 참석하게 된 폐막식에서 절대 1위에 뽑히기를 고대하면서 두둥둥 지켜봤는데, 그 예상이 들어맞았던 그 순간은 마치 내가 상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련했다. 폐막식 후 내려온 위광이 감독에게 달려가서 당장에 그의 사인을 받았다. 배우 박해일의 사인보다도 더욱 소박해 보이는 그의 사인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감독의 사인이 되었다.

2. <익사일, EXILED>, 두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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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기봉이라는 이름을 익히 들어봤지만, 그의 전작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아트시네마를 오가다가 만난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포스. 이미 포스터의 실루엣에서 마초들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액션이지만, 액션이 아니고, 웨스턴이지만, 웨스턴이 아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림자가 강하게 풍겨지는 이 영화는 멕시코의 그림과 빛, 음악들이 홍콩과 마카오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것은 끝내 여전히 꿈틀대는 홍콩 느와르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정체성은 **다 라고 끝내 정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전히 아름다운 총격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 폼을 잡아대는 배우와 카메라, 그리고 그 뒤에 서있는 감독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이 쯤되면 총격씬도 예술이다. 그래! 영화는 '예술'을 버려야만 '예술'이 된다.

3. <준벅, Junebug>, 필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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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나에겐 굉장히 낯선 영화다. 공학을 했던 '나'이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나에겐 카메라가 가지는 어떤 물질성과 영화를 찍어나가는 과정에서 쇼트들이 만나서 의미를 발생하는 것에 있어서 에이젠슈테인의 방법론을 신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 굉장히 낯선 영화다. 분명 모든 쇼트들이 하나의 주제 혹은 영화 자체를 향해서 기여해야 하고, 그 쇼트 자체가 가지는 물질성 혹은 존재성이 이 영화에서는 다르게 바뀐다. 이른바 '비어있는 쇼트'라고나 할까? 드라마와도 구조와도 관계없는 쇼트들이 등장해서 어떤 인상을 남긴다. '어떤'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에게 그것이 아직 정의되거나 뜻이 정확히 전달이 되지 않는 이유다. 간단히 말해서 난 그 쇼트들에 대해서 특정한 인상을 제대로 못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왠지 잘 모르겠는 (언젠가는 찾아가야 할) 느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내내 펼쳐지는 드라마의 긴장은 한국사회와는 굉장히 다르면서도 비슷한 미국의 한 시골에서의 가족간의 관계를 걸쳐나가기 때문이다. 미국영화에서 이러한 가족관계를 본 것은 처음인 듯. 게다가 해피한지 언해피한지 알 수 없는 느낌의 엔딩 또한 여운이 남는다.

4. <창가의 여인>, 프리츠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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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츠 랑 회고전.  위에서 말했다시피 공학적 영화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나로서는 쇼트 하나하나의 의미와 시퀀스들의 조합에서 발생하는 구조의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들을 단연코 선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주의 감독들이 미국에서 찍었던 영화들이 또한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창가의 여인>은 굉장히 장르적이지만, 장르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스릴러, 느와르 등의 장르가 분화되기 이전의 모태격의 작품이라고 봐야 할지도) 하지만, 그 안에 살인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불신, 그리고 우발적으로 살인자가 된 범죄심리학 교수라는 인물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와 자신이 가르치는 학문에서 처럼 행동하게 되는 모습들에서 보게 되는 영화적 재미는 굉장히 탁월함을 준다.

5.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스탠리 큐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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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 비록 6편 밖에 오지 못했지만, 필름으로 볼 수 있다는 흥분에서 절대 놓칠 수 없었던 영화들이다. 언제나 나에게 가장 큰 트리거(trigger)였던 큐브릭 감독, 그리고 단연코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것은 언제나 <a clockwork orange,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이지만, 올해에 본 작품에서만 꼽는다면 잠시 그 자리를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로 넘겨주어야 한다. 비디오나 DVD가 아닌 스크린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세세한 화면의 디테일과 강력한 음악에서 오는 물질파는 단박에 나의 장기들을 뒤흔들어놓았고, 내 평생의 숙원을 만들었다.  이제 내 평생의 숙원은 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70mm 프린트로 보는 것이다. 인류가 달에 처음으로 발을 내리기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적인 완성도와 의미를 넘어, 큐브릭을 정녕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자 철학자의 경지에 올려놓는다. 시간의 축을 통해서나 공간의 축을 통해서나 가장 먼 곳의 위치에서 the MOST extreme long shot을 구현한 유일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이런 영화를 감히 만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그에게 도전해야 한다.

6. <카모메 식당>, <안경>, 오기가미 나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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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 역시 나로서는 가장 당황스러운 영화이다.  이 영화들의 경우는 감독의 세계관에서 가장 부럽다고나 해야할까? 그녀의 쾌활함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정녕 삶은 계속 살아야 하는 것. 그냥 겪어가는 것.이라는 말과 느낌을 전달해준다. '이 절망스런 세상을 두고서 안노 히데아키가 <에반겔리온>에서 죽어라 죽어라 라고 한다면, 그보다 훨씬 선배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서 살아라 살아라라고 역설한다'라고 정성일 선생님은 정영음(정은임의 영화음악실)에서 설명했다. 마치 내가 안노 히데아키의 생각을 갖고 있는데, 오기가미 나오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각을 가진 듯하다. 드라마의 강한 동인 혹은 정념들은 이 영화들에서 의미가 탈색된다. 이 영화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각자가 어떤 과거들이 있지만, 결국 삶이란 과거에 얽매이는 것보다도 앞으로 다른 이들과 어떻게 만나가느냐에 관한 문제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성긴 관계로, 그러나 근원적인 깨달음 같은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결국 이유란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시기, 공기가 되는 누군가는 언제나 '온다.' 그리고 'きぃた'(왔다).

7. <리틀 미스 선샤인>, 발레리 파리스, 조나단 데이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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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보면, 이런 영화들이 전형적(?)인 미국의 독립영화 혹은 저예산 영화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이유다. 영화의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주류 미국영화와 별다른 차이점을 보이기 보다는 익숙한 틀 안에서 좀더 수수함을 보이기 때문이랄까? 뭐 그런 이유에서이다. 간단히 말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고, 영화는 결국 드라마(혹은 내러티브)상의 목적을 표면에 드러내지만, 결국에 그것을 배신하고, 이면에 깔렸던 어떤 가치(혹은 이념)을 드러내는 결말을 선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쓰레기같은 주류영화 에서는 벗어날 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뭔가 완전히 색다른 영화로 범주화하기에는 여전히 익숙한 틀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올해의 10 베스트에 꼽은 것은 그 가치들에 있어서 나 역시 십분 동조하기 때문이다. 미인대회를 아이들에게 까지 강요(!)하는 사회가 되었고, (이는 한국도 다르지 않다) 그런 가운데에서 아이를 위해서 온 가족이 달겨드는 일은 어찌보면 굉장히 익숙한 광경이다. 그러나 이 가족의 구성은 실로 총천연색 레인보우(!)다. 약쟁이, 게이, 성격적 특이성을 보이는 오빠, 기존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적극 부응하려나 아빠,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듯 하지만 여전히 신경질적인 엄마,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미인대회에 푹 빠진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가진 즐거움 그리고 미덕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8. <리플리>, 앤서니 밍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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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왜 끼어있냐고? 이글의 2007년에 개봉한 영화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2007년에 '본' 영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좀 민망하기도 하다. 철지난 영화에 대해서 이제서야 봤다는 핀잔을 들을까봐 슬그머리 빼려다가, 뭐 그렇게까지 남에게 비위를 맞출까 하는 내 스스로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냥 본거는 본거지 하는 심정으로 꼽았다. 원작은 사실 영화를 보고 나서 봤는데, 이상스레 좀 재미가 없어서 끝가지 다 못읽었다. <태양은 가득히> 역시 사실 드라마적인 재미 이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앤서니 밍겔라의 작품은 좀 다른 지점에서 떠오른다. 원작 혹은 다른 영화와는 차별점이 불균질하게 들어가있다. "재즈"라는 음악에 관한 모티브. 그런데 이것이 전혀 불균질한 것이 아니라 묘한 감정을 자아내면서 영화 전반에 기여한다. 리플리는 게다가 동성애적 성향을 보이는 인물로 치환되어있다. 그런가하면, 그가 사랑하는 (동성의) 사람들은 다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이상한 아이러니가 있다. 드라마를 파악하는 것과 다르게, 이 영화를 리플리 개인의 고뇌를 중심으로 그의 러브라인을 살펴보면 영화는 또 다른 재미를 가져온다. 이 정도라면 아주아주 잘 만든 상업영화에다가 작가적 성향까지 발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9. <시간을 달리는 소녀>, 호소다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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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반기에 보았던 영화들 중에서 상위에 랭크할 수 있는 영화다. 당시에는 <초속 5센티미터>도 같이 꼽았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동어반복은 좀 지겹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간..소녀>만 포함시켰다. 이 영화는 순전히 영화다. 게다가 애니매이션만이 할 수 있는 상상과 표현을 잘 보여준다. 원작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와의 관계성에서 충분히 살펴볼 만하다고 예상된다. 애니메이션은 영화다. 너무나 단순한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제를 다시 얘기하는 것은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애니과동기들이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 그리기(!)에 급급하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문득 생겨난 그 능력을 너무나도 '소녀답게' 사용한다. 미국영화였으면, 영웅이 탄생했을 텐데.... 그 부분이 가장 감동적인 측면인거다. 그러나 그 안에 소녀의 감정이 너무 잘 전달되고 있다. 이 영화는 그토록 순수한 감성을 애니메이션다운 상상력과 표현력으로 내게 전달하고 있다.

10. <은하해방전선>, 윤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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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 베스트안에 들어온 유일한 한국영화. 이 영화를 보는 감정은 여러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영화와 관계없이 '윤성호'라는 젊은 감독에 대한 부러움(시기심도 당연히 포함할테지..)도 있고,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능력에 대해서 존경스럽기도 하고... 뭐 여러가지 복합한 층위위에서 그의 영화를 보지 못하다가, 우습게도 제일 처음만나는 그의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는 영화적인 완성도에서 말하기 보다는 내용의 다양성, 정해지지 않음, 그 산만함을 긍정하고 싶다. 내용을 얘기하는 것은 별 의미 없으니깐 제껴두고! 플롯과 캐릭터를 배치, 병치하는 뻔뻔함은 가히 박수를 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이 영화를 포함시킨 이유는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아마도 그의 다른 단편들에도 드러날 것 같은) 그의 태도와 방식이 부러웠고, 절대적으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의 영화를 보고나서 위에 쓴 잡스러운 부러움같은 건 사라지고, 오히려 그의 태도만이 부러웠다. 이것은 시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잘 알고, 잘 풀어내고 있는 상태가 부러운 거다. 다시말해 그의 영화를 그냥 그의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 들었고, 난 다시 나대로 방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뻔한 명제를 떠올린 거다. 게다가 이 영화는 영화자체의 자기반영보다는 한국 영화계를 반영하는 측면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재미가 있다. (엄밀하게 영화의 자기반영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않을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유쾌한 코미디가 된다.


장외 11위들
<반도의 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까뮈따윈 난 몰라>
- 장외의 영화들은 '메타영화'라는 개념, 혹은 그 범주에 들어갈 만한 부분이다. 올 한 해동안 나는 알게 모르게 영화에서 나를 분리하고, 드라마에서 영화를 분리하는 작업을 해온 듯 하다. 아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가 재미난 영화는 물론 좋다. 그것이 장르라는 틀을 썼던, 아니던 간에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오는 재미나는 확실한 재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을, 머리를 홀랑 뒤집어 놓는 재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무언가 명확한것 보다, 무언가 구조적인 것 보다, 반대로 불분명한 인상이나 층위, 딱 이거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인상들이 주는 영화적 재미를 나 역시 추구한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미시적 구조보다도 거시적인 구조안에서 작은 단위들의 확연한 경계를 통해서! 때로는 그 반대로 불분명한 경계위에서 이루어지는 영화와 관객의 문답놀이 같은 거다. 그것이 영화적 재미가 아닐까....


뱀발.
생각보다 보통 극장에서 상업영화를 많이 못보고 지나간 것에 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적 재미를 못찾아서라기보다는 왠지 내가 (선입견에 의해) 시야를 너무 좁힌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영화를 보러가면 언제나 돌아오는 뻔한 실망들은 정말 맥이 빠진다.

영화, 그 자체를 찾는 여정.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작성자 : 정경록
- 날짜 : 10/26

1. ‘상실’을 이야기하다.
- 영화를 찾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독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상길(안길강 분)은 주구장창 영화를 찾고 있다. 독립적으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첫 시퀀스는 그 현실적인 어려움 안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드는 것(찾는 것,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그가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속초를 향하게 된다. ‘무정차’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무정차는 없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 안에서 운명적(!)인 여자를 만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후, 여자를 따라서 홀연히 여자의 동생찾기에 합류하는 상길. 여기까지 오면, 영화의 주제는 잘 드러난다. 상길의 사촌형과 숙모는 이산가족으로써,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여자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자 한다. 물론 상길은 자신의 영화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여자를 따라서 강원도의 탄광촌들을 다니던 상길은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물론 관객도). 사실 이 상황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태도와 진지함에 (혹은 뻔뻔함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제 영화는 단순히 내용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상실을 회복하려는 모습에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 영화를 욕망하다.
여자의 이름이 ‘영화’인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다. 내용 혹은 상황으로 상길이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그저 있는 이야기들 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바깥으로 보면, ‘감독은 영화를 욕망한다’는 철학적(?) 명제를 구현한 셈이 된다. 게다가 그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옛 탄광촌의 건물이다. 폐허 안에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찾기를 원하는 감독. 이 쯤 되면 사실 은유가 은유가 아니고, 이야기가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관객은 이 영화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지 물음표가 찍힌다. 감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 여자(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나서다.
결국 여자의 동생찾기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는 개발이나 자본에 의해 자신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탄광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을 오가는 동안에 상길은 자신의 옛 기억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속초에서의 자신의 기억 역시 탄광촌들과 다를바 없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개발과 자연의 사이, ‘거주호와 철거호’ 사이, 부산과 속초 사이, 속초와 탄광촌의 사이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 찾으려고 하는 노력만, 과정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된다. 정말로 개인지 늑대인지... 집을 나간 우리집 개인지, 자신의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는 야생의 늑대인지 구분할 수 조차 없다. 상길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다시 자신의 영화를 찾으려 편집실로 연락하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데뷔작)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2. 영화를 받치고 있는 이상한 징후들? 혹은 상징들?
이 영화는 내연의 이야기와 외연의 쇼트(혹은 구조, 또는 기호체계)들이 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여자의 이름이 ‘영화’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상한 인상들을 남기고 있다. 먼저 가장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술집의 아저씨. 그 아저씨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횟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아저씨는 무언가를 초탈했거나 허무한 표정을 한 채로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상길의 일행의 건배에 박자를 맞추어서 혼자서 건배를 한다. 단독 쇼트와 롱샷 안에서의 포커스를 할애하면서 까지 영화는 그 인물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이 사람은 영화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아지. 속초에 도착해서 묵은 민박. 그 민박집에는 너무나도 귀엽게 ‘개밥’스러운 개밥을 먹는 하얀색의 강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살이 토실토실 오르기를 기대하는 주인이 있다. 이 영화에서 정녕 강아지라고 주장할 법한 하얀 강아지이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 함께 떠난 여정 중에 도계에서 만나게 되는 검은 강아지가 있다. (이 쇼트들은 카메라가 비추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시선과는 무관하며, 관객만이 알게 되는 전지적인 쇼트들이다.) 그러나 검은 강아지는 개가 아니라 ‘늑대’이다. 주인이 없고, 혼자서 버려진 쓰레기들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담고 있다.
폐허의 공간. 강원도에서 만나는 태백, 사북, 도계 등의 공간은 한동안 석탄 붐을 따라서 발전했지만, 광산들이 모두 폐광 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져버린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거기서 상길(감독)은 영화와 교합(!)한다. 마치 김기찬의 사진들(<서울 풍경>이라는 사진집)에 나오는 공간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꿈같다.

3. 감독론
전수일 감독을 논하는 데 있어서 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의 스토리텔러?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스타일리스트?인지는 전후작들을 더 살펴보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만을 놓고 그가 어떤 감독인지를 조심스럽게 논해본다면, 아무래도 그는 성긴 이야기 구조와 약한 드라마위에 독특한 징후들을 심어 놓는 데에서 영화를 세워나가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징후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계속적인 잔상을 남겨놓음으로 해서 어떤 영화적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이번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에서는 드라마와 시네마 사이에서의 고민점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길의 여행은 마치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여행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는 그래도 영화의 메인 플롯을 이루면서 마지막 시퀀스를 가능하게끔 했다. 결국에 숙모가 돌아가시고, 그가 다시 부산에서 속초를 향하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눈덮인 강원도의 한 골짜기에서 영화를 끝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것일까? 오히려 커다란 구조에서 영화를 강원도 여행을 둘러싸고서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한편의 완결된 형식의 구조를 갖고서, 그의 고민과 환상특급을 구현하는 쪽을 선택했다면 어떨까? 그것이 구조의 측면에서 <개와 늑대>를 형성해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를 놓고서 ‘만약’이라는 단서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설명불가능한 징후들을 형성하고 그것의 분위기를 더 이끌어내는 것이 구조와 특정 쇼트들을 기반으로 더욱 영화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수일 감독은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적인 이름, 제목, 쇼트들에서 매우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말그대로 이 영화를 완성한 시점에서 그의 결론과 일치할 것이다. 모호한 예술성을 근간으로 끝내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려고 한 점에서 그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