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첨단 테크놀로지 못 다루면 미래 영화감독 할 생각마라"

“텍스트 기반의 전통적 영화는 죽었다.” “영화는 100살이 넘은 올드 미디어, 시작하면 5분 만에 결말이 보이는 지루한 매체다. 영상 리터러시(해독력)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에게는 감각적으로 소비되고 마는, 나쁜 영화들이 왜 있어야 하는가. 영화의 4대 폭군인 ‘텍스트·프레임·배우·카메라’에서 해방돼야 영화의 재탄생이 가능하다. 영화의 미래는 인터랙티브·디지털 멀티미디어에 있다.”

거장의 선언은 심오했다. 신작 ‘야경’을 들고 부산영화제를 찾은 영국의 피터 그리너웨이(65·사진) 감독. 그는 축제의 한복판에서 침통한 ‘뇌사선언’을 했다. 기자회견(8일), 마스터클래스(9일)를 통해서였다. “지금 부산영화제에 온 영화의 대부분은 쓰레기(rubbish)다.” “세계적으로 3000개가 넘는 영화제가 있으나 너무 많아지면 공멸할 수 있다”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영화제란 영상 리터러시 훈련의 장이 돼야 한다”며 “21세기 영화감독은 멀티미디어의 항해자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너웨이 감독은 내러티브(이야기)보다 이미지를 강조하고, 수학·건축·과학·회화·영화의 역사를 아우르는 지성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야기를 할 거면 차라리 소설을 써라”고 강조하며 영화의 형식·문법을 실험하는 까다로운 작품을 발표해왔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정부’ ‘차례로 익사시키기’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필로우 북’ ‘털시 루퍼 스토리’ 등 대표작들은 ‘메타영화(영화에 대한 영화)’로 받아들여졌다.

"1970년대 유럽 예술영화의 황금기 이후 영화의 관객은 점차 줄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암스테르담에서는 보통 2년에 한 번꼴로 극장에 간다. 현대인은 더 이상 ‘영화피플’이 아니라 ‘TV피플’이다. 그들에게 극장은 그저 ‘큰 TV’이고, 휴대전화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영화 내적으로도 아이젠슈타인이나 펠리니 같은 강력하고 풍부한 영상언어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신작 ‘야경’은 ‘빛과 어둠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의 동명 그림을 소재로 한 영화다. 화가의 창작 과정을 통해 그림과 사회가 맺는 관계를 조망한다. 서구 문명·사상사를 이끌어온 회화의 역할을 강조하는 영화다. 감독은 영화에 입문하기 전 회화를 공부했고 지금도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왜 렘브란트인가.

“렘브란트는 지금 우리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모든 가치를 구현한 인물이다. 휴머니즘, 민주주의, 공화주의, 페미니즘, 포스트 프로이트주의까지다. 위대한 혁신가이자 새로운 회화의 시조였다. 새로운 회화·이미지에 대한 그의 고민은 지금 나(영화감독)의 고민과 같은 것이다. 또 영화란, 본질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극장에 거는 것이기도 하고. ‘야경’을 기점으로, 승승장구하던 렘브란트가 몰락하는데 이 그림 안에 숨겨진 51개의 미스터리가 그의 삶에 대한 단서라고 봤다.”

-렘브란트의 빛을 스크린에 구현한 게 놀랍다.

“고화질 테크놀로지 때문에 가능했다. 예술가는 당대 최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잘 알아야 한다. 베르메르가 400년 전 이미 원시적 카메라를 사용했고 다빈치가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뇌사선언을 했다.

“누 구나 이미지를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는 시대에 아직도 7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의 틀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한 것이다. 지금 영화는 거대한 연예오락산업이지만, 내 눈엔 꼬리는 움직여도 머리는 이미 죽은 공룡처럼 보일 뿐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아이디어·제작·유통·배급 방식을 찾아야만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다. 가령 극장영화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수동적 미디어다. 우리 시야는 본래 전방위로 열려 있는데 왜 깜깜한 어둠 안에 앉아 모두 한방향을 바라봐야 하는가. 그런 일방통행보다 1대1로 관계를 맺는 랩톱이 영화의 미래를 보여준다. 앞으로의 영화감독은 디지털 전자매체, 사이버 스페이스를 아우르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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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에서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

-‘4대 폭군’도 흥미롭다.

“텍스트·프레임·배우·카메라다. 대다수 영화가 이미지 아닌 소설 등 문자 텍스트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점, 4각형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점을 지적한 것이다. 배우의 능력도 일부만 활용하고 있다. 배우의 감성은 물론 신체적 능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카메라는 렌즈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밖에 못한다. 그를 뛰어넘어 머릿속에 있는 것을 영화에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부산=글=양성희 기자 sh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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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등록된 포스터들을 정리하는 와중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났다.

포스터를 정리하는 일이지만, 난 왠지 포스터를 찾았다기 보다는 '만났다'고 표현하고 싶다. 마치 영화를 만나는 것처럼..
게다가 에드워드 양(양덕창)은 뭐랄까?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젊음을 유지했던 감독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무 우습게도, 너무 부끄럽게도... 혹은 너무 안타깝게도.. 나는 영화광이 아닌 영화쟁이로써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하나 그리고 둘]이 내가 본 첫 작품이었다. 몇년 전에 Film2.0의 부록으로 나눠줄때 옳다구나 DVD 한 장 더 늘리는 데 급급했던 나의 허영이 그의 작품을 만나게 해준 계기였으니 더이상 말해봤자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기억에 그렇게 받은 DVD조차 한 달은 그냥 꽂아두었던 듯 싶다. 어찌되었건, 부피 채우기는 항상 나의 허영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켰다가 이내 곧 부끄러움을 주는 까닭이 겨우겨우 꺼내서 본 영화다. 당연히도 미루고미루는 와중에 두려움 (혹은 변명?) 중 하나는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일단 시작하고나서는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왠지 거리를 둔 카메라가 그다지 다이나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지만, NJ와 틴틴, 양양의 애정 플롯들이 평행하게 교차하는 순간에 나는 완전히 놀라버렸다. 아마도 난 그 때 처음으로 영화가 영화답다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그의 영화는 현실을 지극하게도 잘 담고 있었다. 더도 덜도 아니게.....

그리고 2005년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대만 뉴웨이브전에서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았고, 그제서야 벼르고 벼르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났다. 4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에 역시나 쫄아서 들어갔지만, 단 한번도 졸지않고 좌왁 빨려들어가서 보았다. 마지막에 정녕 그녀를 찌르던 장첸의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영화는 대만의 근현대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것은 남한의 모습과도 너무 흡사했다.

그리고 참석하진 못했지만.. 올해는 양덕창을 기리면서, 부산영화제에서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대부분은 보았지만 그의 진정한 데뷔작인 [해탄적일천]을 부산이 아닌 서울, 서강 데뷔작 영화제에서 볼 기회가 있었고... 당연히도 달려가서 보았다. 역시나 그의 힘은 뭐랄까.. 자신히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한 확고한 방향성. 그리고 그것을 복잡하지 않고, 젠체 하지 않는 평범한 방식, 그러나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개인과 사회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도 않으면서 잘 담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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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포스터


이제 더이상 그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장편이 8편밖에 되지 않은 많지 않은 필모그래피에서, 그의 영화들이 언제나 우리에게 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더욱 자주 갖고 싶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의 포스터를 만나서, 기뻤지만... 흥분하진 않았다. 무언가 아스라한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떠올리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