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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간다.
다는 못보더라도 가능한 영화는 계속 만나야 한다.
좋은 영화를 만나는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이다.

<중경> . 장률감독.
예전에 우연찮게 장률감독과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리>를 찍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란 사람이 워낙에 사교성도 없고, 수줍음도 많은 터라... 그냥 옆에 옆쯤에 앉아서 멍하니 모른척 하고 앉아있었다. 밥오.
(하지만, 감독님의 영화를 본 게 없어서...ㅡㅡ;)

그래도 결국 만나게 되어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만나게 되는 것 처럼.
만나게 될 영화 역시 언제 어디서든 이렇게 만나게 된다.
드디어 장률감독 영화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중경>.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인구 3천만이 거주한다는..
이제는 더이상 그 경치 혹은 도시의 존재가 예전 같지 않은 쓰촨성의 중심도시, 그 중경이다.
그리고 그 안에 쑤이와 김씨가 만났다.
김씨는 자신의 물리적 아픔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후유증으로 이리저리 흘러다니고, 급기야 더이상 중국도 별게 없다고 느낀 나머지, 몽골로 가야겠다고 한다.
그리고 쑤이는 그를 의지하다가, 그의 떠남에 절망하고 점점 나락에 빠져든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번 놀라게 된다.
처음에 탁월하게 전개하는 공간적 묘사와 인물들간의 관계.
그 경제성은 구조적인 접근에서 칭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스타일에 있어서도 다른 영화감독들과 비슷한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중부의 모습이 그래서일까? 중경의 공간을 잡아내는 장면들은 일면 지아장커의 영화에 나오는 싼야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한편, 인물들을 담는 방식과 호흡에서는 허우 샤오시엔의 여유마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장률의 영화는 점점 그런 스타일에서 벗어난다.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들을 헐겁게 병치시키면서, 공간적 배경이 단순히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또 다른 인물로써 작용한다. 중경의 현재가 부서져 가면서, 인물들도 똑같이 망가져 간다.
쑤이는 자신의 입에서 '나는 점점 더 더러워져 간다'고 한다.
자신의 집을 지키려던 고공시위자는 끝내 높은 다리에서 자살한다.
경찰서장은 계속 다른 여자들을 만나면서 공안의 끝장의 모습을 보여주다 못해,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뛴다.
아버지는 끝내 집을 나간다.
창녀는 결국 자신의 몸값을 낮추면서 장사를 계속 한다.
그리고 쑤이의 동네는 곧 철거의 위기에 닥친다.

강이 흘러간다.
여전히 흘러가고, 영화는 지속적으로 강을 보여준다. 마치 <미스틱 리버>의 그것처럼.
분위기는 조금 다르지만, 정녕 고전적인 상징처럼 강의 시간이고, 절대자 같은 느낌을 준다.

심지어 카메라조차 망가져 간다.
처음에 아버지, 쑤이의 각각의 섹스는 문밖에서 들여다보지만,
카메라는 점점 노골적으로 방안으로 들어가고, 한발 더 나아가, 섹스에 골몰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다.

영화가 끝난 후, CinDi Class.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를 한참 소개한다.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의 소개.
그리고 여지없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Why digital?
그러나 장률감독은 그것에 대해서 다른 답변을 한다.
구조적 접근을 주무기로 한 평론가의 질문과 영화를 직감으로 만들어 낸 감독의 대답.
합이 맞는 듯 안맞는 듯.
심기일전 한 표창을 가볍게 피하면서,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말.
그저 인물의 상태에 따라서 찍는 법을 달리 했을 뿐이라는 대답.

결국 감독이란 그런 존재였나?

고맙다.
결국 영화는 카메라로 찍지만, 마음으로 담아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작년 첫번째 CinDi에서 만난 최고의 작품이었던 <마지막 벌목꾼>.
그리고 그 때를 기억하자면, 경쟁작 20편중에 15편을 보고.. 나름 수위권을 꼽았는데.
폐막식날, 수상결과를 발표하는 와중에 어찌나 속으로 응원을 했던지..
내가 다 긴장을 했었더랬다.
그리고 내가 꼽았던 최고의 작품인 <마지막 벌목꾼>이 최고의 상 2관왕을 수상했을 때.
그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려가서 감독의 사인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감독 사인이었다.
(참고로, 공동 수상작인 우밍진 감독의 <코끼리와 바다>는 보지못했다. ㅡㅡ;)

아무튼, 그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제목은 <살아남은 자의 송가>. 영어제목은 <Survival Song>이고, 영화의 주인공인 샤오리의 노래를 칭하는 것이리라.
거두절미하고 간단 소감을 말하자면, 영화는 기대에 못미쳤다.
첫번째 작품과 두번째 작품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외형적으로 카메라의 거리가 달라졌다.
그리고 감독의 목소리가 개입해들어왔다.
그러면서 영화는 굉장히 다른 지점의 시선을 가졌다.
일단,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마지막 벌목꾼>이 정말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벌목꾼들의 팍팍한 삶과 시대적 희생(?)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었는데 반해, <살아남은 자의 송가>는 감독의 목소리가 너무 많이 느껴졌고, 감독은 이제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아달라'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뭔가 작위적이고, 게다가 그의 시선조차 너무 순진하고,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주인인 한씨 부부, 그리고 주인공 샤오리, 그들을 둘러싼 주변부의 벌목꾼들과 공안정국, 그리고 가장 바깥에 놓여있는 헤이룽강 주변의 척박한 기후.
더불어서 그대로 그것을 은유하려 애쓰는 개 2마리, 고양이, 새 등의 모습들.
이상하게도 촬영 역시 전작보다 훨씬 떨어져보인다.
(몇몇 장면이 오토 모드로 촬영되어서 포커스가 나갔는데, 그러한 작은 결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인물에게 다가가려 하고, 또는 떨어지려고 하는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 작위적임을 못 견디게 한다.
물론 여전히 몇몇 장면을 빛을 발한다.
한씨부부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샤오리를 잡는 장면들은 여전히 탁월하다.
그의 고독함과 망연자실함이 바람과 눈의 배경속에서 진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위광이감독의 억지성 영화적 행위와 편집들은 불편함을 가져다준다.

무엇이 그를 바꾼 것일까?
아니.. 내가 바뀐 것일까?
기대한 감독이고, 기대한 작품인데...
뭐 이렇게 쓰고 나서 다시 위광이 감독이 올해도 상을 받는다면.. 뭐 내가 퇴보한 것일지도..
하지만, 솔직한 감정이 그렇다.
'모르겠다' 이다... '뭔가 이상하다' 이다...

ps.
GV에서 어떤 남성분께서 질문했다. 창바이산(백두산)을 훼손한다는 표현을 썼고, 그것을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단어를 썼고, 그것에 대해 분개아닌 분개를 표현했다.
짜증이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돌아가지만, 영화가 흘러가는 방식에 맞는 질문을 좀 했으면 좋겠다.
물론 개인적으로 민족주의자들의 광신도 싫다.
논점을 좀 정확하게 얘기하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