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비처럼]이 드디어 개봉했다.
언제나 돌아오는 명절 시즌에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잔뜩 고스톱판으로 얼굴을 붉혔다가, 돈을 모조리 딴 사람이 들고 나서는 판돈의 모음으로 극장은 넘쳐난다.
당연하게도 돈을 딴 사람은 온갖 생색과 자부심으로, 잃은 사람은 얻어보는 영화로 대충 만족하며 마무리하는 명절의 극장 풍경이다.
그 풍경에 이번에 특이하게(?) 끼어든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나 컨셉에 대한 설명은 간단히 생략한다. 포털에서 제목만 입력해도 바로 나온다. 굳이 이 블로그에서 수고하면서 읽을 필요는 없다.


영화의 출발, 그러나 실망스러운 이야기.

'민자영'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영화는 이 질문에서 시작했을 것 같다. 우리는 "을미사변" 혹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면서 재조립해왔다.
그러나 영화는 '명성황후'가 아닌 '민자영'이라는 한 "여성"의 사랑을 다루고자 한다. 
말그대로 그녀의 이름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이 영화는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기획의) 출발은 좋았다.
동명의 원작인 야설록의 소설을 원전으로 영화는 각색되었는데, (나 역시 원작은 읽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한다) 
영화 안에서의 이야기는 일단 굉장히 실망스럽다.

예비 중전과 사공의 사랑이야기라는데, 다른 모든이들도 공감하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언제 어떻게 사랑에 빠져드는가 하는 지점이다.
영화는 대놓고 첫 장면을 잘못 풀고 있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무명'(혹은 요한)의 어린 시절을 잠시 보여준다. 무명이라는 인물이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서학을 믿게 되고, 그것이 발각되어서 엄마는 목이 달아나고, 그것을 막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흑백장면으로 오프닝을 처리했다. 사실은 뒤를 보지 않고도 이 장면은 굉장히 뜨악했다. 이 장면을 보고 나면, 아무래도 이 아이는 뻔히 '무명'(즉, 조승우)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가진 배경인, '천주교'가 과연 이야기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일까 하는 점이다. 
그렇게 씬이 지나고 나면, 개화기의 어떤 풍광들을 계속 비추다가, 잠시의 역사적 배경 설명, 그리고 등장하는 민자영의 모습이다. 
자영은 중전 간택을 앞두고, 혼자서 무언가를 해내는, 그리고 기대감을 갖고 있는 신여성의 모습을 보이고, 이내 혼자서 바닷가를 다녀오는 '신식 행동'을 보인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사공 무명. 
둘은 하루 동안의 긴 데이트를 한다. 자영에겐 아주 중요한 추억과 기억이 자리한 바닷가. 그러나 그 중요한 추억과 기억은 무엇인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대사로 '들려줄' 뿐이다. 그런가 하면 그 긴 하루의 시간과, 아무도 없는 배라는 공간, 탁 트였지만, 역시 둘만 남은 아름다움 바닷가에서 무명과 자영은 서로 뜬금없는 대화만을 하며, 직접적으로 사랑에 빠질만한 행동도 하지 않고, 카메라는 더더욱 어떤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앞으로 멜로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최소한의 선행조건일 텐데, 영화는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 

그리고 무명은 혼자서, 자영에게 '이미 빠져들어서' 사례로 댕기를 달라는 둥, 오바를 한다. (이건 명백히 오바다.) 그런 오바가 펼쳐지는 가운데, 자영을 습격하려는 자객들이 나타나고, 뱃사공에 불과했던 무명은 갑자기 무림 고수의 풍모를 보여준다. 그리곤 자영을 구해낸다. 여기서도 관객들은 좀 의아함을 가지게 된다. 영화의 초반부이기 때문에 어떤 무협 서사의 관습인 양, 절대 무림 고수가 초양에 묻혀지내고 있었다라는 설정을 억지로 넘겨받을 수도 있지만, 명백히 어색함은 남는다. 게다가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어려서 천주교를 따르던 천주학쟁이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천주교와 무림고수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다.)

참아준다. 여기도 참겠다. 이후, 무명은 자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언제 느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추석날 전부치던 '며느리'도 모른다.) 그리고 평생 목숨을 바쳐 자영을 지키겠다는 오바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자영은 나중에 궁궐에서 자신을 왜 그리 지키려 하느냐고 무명에게 묻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가관이다. 무명은 '어려서 죽임을 당한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아픔이 남아있어서, 자영만은 꼭 지키겠다'고 대답한다. 이 대목, 역시 좀 코미디다. 굳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작법을 논하진 않겠다. 이 말 자체가 좀 이해가 되는가? 엄마를 지키지 못해서, (그래서 무예를 익혔다고도 스스로 상상했다. 나 열심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게 자영이다. 좀 있는 체 하면서 정리하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지키지 못해서, 연인에 대한 사랑을 지키겠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언뜻 '사랑'이라는 항목을 보면 성립가능한 문장 같지만,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잘 생각해보면 한강물 더럽힌 걸 못내 잊지 못해서, 대동강물을 깨끗하게 지켜내겠다는 말이다. 즉, 오류의 문장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가장 심각한 반칙을 일으키고 만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더 이상 영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어떡하나? 이후에 남은 러닝타임은 1시간도 더 남았다.

좀 더 매끈한 이야기적 출발을 하려면, 영화의 첫장면은 무명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 자영의 어린 시절이 나와야 했었다. 그것도 자영과 아버지 사이의 그 잊지못할 기억이 영화의 첫장면으로 등장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무명의 어린시절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바닷가에서 이러저러한 데이트 하면서, 결정적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넣어주기만 하면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을 지키는 데 무슨 말이 필요하나? 엄마를 지키지 못했다 어쨌다는 둥?? 제대로 빠지기만 한다면, 사랑을 지키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영화의 이야기는 정말 uncanny하다.


견딜 수 없는 CG의 도배, Uncanny Valley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후, 엄한 방향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려 한다. 그 첫 시도는 바로 대원군의 호위무사인 뇌전과 무명의 대결.
밤에 홀로 배위에 누워 있는 무명에게 뇌전은 '조각배'를 타고 나타난다. 이 장면 조차 관객들은 피식 하는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서로 현란한 액션을 선보이면서 대결한다. (꽤 긴 장면인 이 시퀀스는 딱 1줄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누가 봐도 명백한 CG는 관객들을 당황케 한다. 너무 어깨에 힘을 준 영화속 캐릭터들은 관객의 마음을 저쪽으로 차버린채 지들끼리 현란한 칼싸움을 벌인다.
누가 봐도 명백한 CG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CG가 주는 느낌에 대해서 영화를 만든 이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했다.

Uncanny Valley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본래 로봇공학에서 나오는 용어이다. 그래프를 잠시 설명하자면, 가로축은 '인간과 닮은 정도'이고 세로축은 '(보는이들 혹은 인간들이 느끼는) 친근함'을 뜻한다.
그리고 uncanny는 1 초인적인, 초자연적인, 이상한, 비정상적인   2 섬뜩한, 으스스한  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Uncanny valley라는 용어는 사람들이 만화 캐릭터와 같이 희화화된 캐릭터는 귀엽게 느끼고 친근감을 느끼는 반면에 그 캐릭터가 점점 사람에 가깝게 만들어 질수록 실제 사람과 캐릭터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게 되고 그 차이로부터 불편함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현상을 뜻한다. 이 개념은 일본의 로봇학자 Masahiro Mori 교수가 1970년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로봇과 같은 “진짜” 인간이 아닌 개체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론이다. 즉 Barely human 과 Full human 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로봇에 대한 호감도는 로봇의 생김새가 인간과 비슷해 질수록 증가하다가 로봇의 생김새가 인간과 어중간하게 비슷해 지는 지점에서 급속히 떨어지고(거의 좀비 또는 시체의 수준까지) 이후 로봇이 인간과 더 비슷하게 되면 다시 증가한다고 한다. 그 변화폭은 로봇이 움직이게 되면 크게 증가한다.

참고로 아래 로봇의 사진들을 올린다.

1차 산업용 로봇. 딱 기계라는 느낌을 준다.

군사용 로봇.

인간과 닮은 로봇이라는 뜻의 휴머노이드. 2족보행을 한다.

휴머노이드의 인간과 유사성을 재현하겠다며, 아인슈타인의 머리를 붙였다. 이제부턴 역겨움이 시작된다.




영화에서 이 씬은 위의 이론이 명백하게 들어맞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누가봐도 CG이면서, 3D로 렌더링되어서 싸우는 뇌전과 무명은 우리가 쉽게 보지는 못한 장면을 재현해내서 '멋있다'라는 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짜라는 느낌과 함께, 왠지 이상한 역겨움을 가져온다. (아쉽게도 영화의 한 스틸이나, 동영상 장면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영화는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욕이 앞서서, 배우들의 얼굴이 몰핑된 클로즈업까지 보여주는 기괴함을 감행한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아휴~하는 소리를 토해낸다. 
물론 여태껏 이런 장면을 보여준 영화가 최초는 아니다. 올해만 해도, <국가대표>에서 스키점프를 하는 선수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로 재현 불가능한 장면을 3D의 CG로 처리해서 새로운 쾌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박쥐>에서 날아다니는 송강호와 김옥빈의 모습을 비슷한 느낌의 CG로 보여준 적이 있다. 
물론 예로 든 2편의 영화들이 uncanny valley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들이 탄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두 영화들이 정말로 현실에서 실사촬영을 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살짝 CG를 활용하는 선에서 그치기 때문에 용인하면서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의 CG는 도가 너무 지나치다. 이야기도 따라주지 않고, 분위기도 받쳐주지 않는데, 무협 액션씬의 쾌감을 무리하게 재현하겠다는 욕심을 전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3D렌더링을 내내 돌리고 말았다. 그래서 영화는 계속해서 uncanny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나아가 관객들은 영화에 대해서 무성의하다는 생각까지 가질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실사로 찍어주면서 정말로 무림고수들의 정통한 대결을 보이다가, 특별한 기술을 위해서 쓰는 CG였다면 조금은 용납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싸우는 배경은 또 어찌나 오바인가.)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이런 실수는 대원군의 군대 동원 장면에서 또 한 번 재현된다.

또 하나 나비의 CG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제목(엄밀히는 원작의 제목)을 지어놓고, 뭔가 '나비'가 등장해야 겠다는 강박에 시달린 나머지, 쓸데 없는 CG 나비를 등장시키고 있다. 영화에서 나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괜히 쓸데없이 날아다니느라 바쁜 불쌍한 캐릭터, 나비!
(이 나비 CG를 보면서 떠올랐던 것은 오우삼의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비둘기이다. 그는 홍콩에서 활동할 당시, 실제 비둘기를 동워해서 가장 멋드러진 비둘기 장면을 찍어내곤 했다. 그러나 헐리우드에 가서 만든 영화들, 예를 들면 [페이스 오프], [미션 임파서블 2] 등에서는 CG로 만든 비둘기가 등장한다. 난 이 장면들에서 격세지감과 함께 이상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건드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이 드는 "민자영"이라는 개인.

그런가 하면, '민자영'이라는 캐릭터 역시 시대의 비극과 개인의 삶이 제대로 병치되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이는 영화적 이야기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데서 기인하는 게 크지만, 그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벌어지는 명성황후 민자영의 사랑은 왠지 그녀를 거꾸로 이상한 인물로 비춰지게끔 만든다.
그다지 민족주의자가 아닌 나에게도 이러한 인상인데, 혹시라도 열정적인 민족주의자가 이 영화를 본다면, 다분히도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걸어올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은 내가 한번 오바 해보는 거다.) 한 명의 신여성으로서 신식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고, 열강들 사이에서 살아남고, 독립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명성황후과 사랑놀음에 정신이 팔린 민자영이라는 캐릭터는 하나의 인물로 잘 섞이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영화 내에서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지, 역사안에서 명성황후 민자영에 대한 논평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잘 못 건드려서 영화 속의 캐릭터는 다 분리되고 파편되어서, 앞뒤가 안맞는 행동을 하느라고 정신팔린 인물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명성황후"라는 인물은 역사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드라마와 뮤지컬, 심지어 뮤직비디오 등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장면을 숱하게 봐왔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신화화 되어있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진은 또 다른 명성황후 시해장면을 찍기 위해 고뇌했을 것이다. 물론 이야기가 일단 그녀의 인간적, 개인적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 성격은 출발부터 달라지는 감은 있지만, 시해장면의 마지막은 또 어이없이 예상대로 진행되고 만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 '너희들이 두렵지 않다'는 상투적인 대사는 국민적 정서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던 듯 하다. 이런것들을 다 빼버린다면, 관객들의 거부감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그래서 나오는 대사는 "나는 조선의 국모 민자영이다"라는 대사였다. 이 대사에서 나오는 '국모'와 '민자영'은 영화가 명백하게 실패하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두 가지 정체성을 같이 가져갈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그러나 영화 초반부부터 실패해버린 무명과 자영의 사랑의 감정을 대비 지점에서 이 대사 '국모 민자영'은 왠지 잘 붙지 않는다. 뭔가 어색한 기분을 정녕 지울 수 없다.


아쉬움과 실수의 영화, 나아가 실소를 하게 만드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토록 총체적인 어색함과 어눌함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결국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등을 좌석에서 떼어놓았다. '자영~'이라는 이름을 자꾸 불러대는 무명, 그리고 어떤 관객도 사랑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데 군란의 난리 때 도망가서 동굴에서 펼치는 사랑의 키스신(황순원의 소나기인가?), 그리고 은근 삼각관계를 병치시켜서, 질투심을 유발하면서, 자신의 승리를 누리기 위해 무명을 침소밖에 세워두고 자영과 정사를 벌이는 고종 등의 장면을 보고 있으면 계속 웃음이 나오기만 했다.
이 영화는 추석날 가족들끼리 벌인 고스톱에서의 승부를 무마하는 오락 영화가 되기는 커녕, 돈을 딴 사람이 잃은 사람이나 모두 본전 생각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고, 그들 모두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을 여실하게 재현하고 말았다. 정녕 uncanny valley에 빠져버린 uncanny story, uncanny movie인 셈이다.

포스터 컨셉역시 영화컨셉과 잘 어울린다!!!


일단 오랜만에 영화글을 블로그에 쓸 수 있게 해준 영화라서 고맙다고 선언!

무려 2004년, 즉 5년전의 영화를 다시 꺼내보게 만든 신정원 감독에게 또 한 번 감사.

<챠우>의 소문을 듣다가, 이 감독의 전작이자 데뷔작이 <시실리 2km>라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영상자료원을 찾으......려고 했으나,
너무 서둘렀던가.
소식을 듣고 돌아가던 버스에서 발목부상을 당하고,
겨우겨우 며칠이 지나 거동이 좀 괜찮아지고 나서 찾은 영상자료원 자료실.

바로 <시실리2km>를 꺼내달라고 요청하고 보기 시작.

영화는 초반부터 시끌벅적 이상한 분위기를 담아낸다.
각종 줄거리들은 각설하고,
혹 필요하다면, 요기로 가보라.

1. 펑키 호러?
영화에 붙은 수식어다.
펑키는 또 뭐고 호러는 또 뭐람?
따지지 말고 입닥치고 보고 나면 대충 무슨 감인지 알 수 있다.
아주 폐부를 찌르는 감각은 없다 하더라도, 장르영화에서 장르를 적절하게 뒤섞어 내는 이 솜씨는 가히 절대 칭찬받을만 하다.
언제부턴가 한국 영화판에서 이상한 낚시성 카피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쯤의 카피는 사실 영화를 만든 이들의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호러와 코미디는 가장 안섞이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웃음"의 감정과 "공포"의 정서는 누가봐도 물과 기름이 아니겠는가? 이 둘을 섞으려면 특별한 용매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용매가 잘 작동하는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법. 극장에서 사실 가장 삐딱한 관객이라면, 아마도 정말 무서운 공포영화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무서워하고, 시작되는 연인들이 작정하고 무서워하러 갔는데, 곁에서 키득키득 웃으면서 '사랑의 성장'을 방해하는 사람들. 그들은 일반관객의 적임에는 틀림없지만, 영화의 다양성을 생각하면 절대 필수적인 관객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관객들이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영화이고, 사랑의 성장을 바라던 사람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이 <시실리 2km>가 아닐까?

이런 장르가 사실 한국에서는 흔하진 않을 것이다. <시실리 2km>를 위시하여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도 당시에는 '코믹잔혹극'이라는 카피로 상영을 했다. 다른 영화들이 더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필시 이 2편이 아주 성공적인 관객몰이(?) 혹은 관객설득(!)에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의 원류(?, 라기 보다는 같은 흐름)에 있는 한 편의 영화를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이블데드 3>!!!

어렸을 적 한동안 공포영화를 열심히 찾아보다가 찾아낸 <이블데드>시리즈의 (현재까지의) 완결작.
이 영화는 정말로 뒤통수였다. 당시에는 보면서 완전 끔찍하고 뭐 이따위 영화가 다 있어라고 생각했지만,
다 크고 지나서 영화를 좀 더 좋아하게 되면서 이 영화의 과감한(!) 실험정신과 샘 레이미의 엉뚱함에 반해버린 영화다.
게다가 1,2편의 그 공포스러움을 기대하고 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절대 이 영화는 시리즈의 연작이기 보다는 단독적인 한 편의 영화로 재평가해야만 한다.

'펑키 호러'라는 단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야 말로 뭔가 무서운 듯 하지만, 웃음이 난무하는 골때리는 영화인 셈. 당시에 흥행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아~ 샘 레이미는 정말로 앞서가는 감독이었던가.

2. B급 정서.
한동안 'B급'이라는 용어가 많이 통용되었던 적이 있다. 물론 B급 영화가 나올때마다 다시 소환당해서 입담을 나눌 수 밖에 없는 단어이긴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이른바 영화광이라는 사람치고 자신만이 최고로 꼽는 영화들 중에 기괴한 영화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광도 아니며, 이상하게도 나의 베스트에 B급영화는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 스스로도 괴로울 따름이다. 좋아하면서 완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이 나의 문제라면 문제.)
우리나라에도 B급영화를 좋아하고, 만드는 수많은 감독들과 영화광들이 존재한다. 거의 10년전의 키노(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언젠가를 둘러보면, B급영화에 대한 사랑을 논하고자, 박찬욱, 오승욱, 김지운, 임필성 등이 각자의 B급영화 예찬론을 펼친 기사도 있다. (기사제목 : 우리는 어떻게 망설임 을 멈추고 B무비를 사랑하게 되었나?)
예전에 트로마 스튜디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B무비에 대해서 쓴 글도 있지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왜 감독들은 B급영화에 열광하고, B급 정신을 추종할까?
또 다른면에서 왜 B급영화는 이토록 창궐하는가?
한편, 한국영화들에서는 유독 B급 영화들이 장사가 되지 않으며, 그런 드라마 역시 잘 제작이 되지 않는다. 작년에 굉장히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와 그것의 원작인 <노다메 칸타빌레>를 비교해보자. 두 드라마는 각각의 나라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두 드라마를 모두 본 사람들도 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드라마는 사실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정말로 핍박받고, 슬프고, 억압된 사람들의 성공적인 오케스트라 꾸리기에 집중하는 것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커다란 줄기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두 드라마를 모두 본 사람들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리곤 한다. 나로서는 두 드라마를 모두 즐겁게 보았지만, 개인적인 선호도는 <노다메 칸타빌레>에 더 크게 작용한다. 이것은 결국에 드라마가 갖고 있는 정서의 문제인데, <베토벤>의 경우, 인물의 갈등들이 굉장히 첨예하고, 각자의 인물들이 자신의 갈등에 너무 집중하면서 정석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는 반면, <노다메>의 경우, 인물들이 대부분 정상적이지 않고, 언제나 천방지축에 튀어다니며, 자신의 현실이나 갈등을 크게 혹은 심각하게 따지지 않는다. 굉장히 단순한 목표들을 설정하고 단순하게 반응하는 직선적인 캐릭터들이 난무한다. B급정서는 바로 이러한 점이다.

절대로 감정에 동화되지 않을 것!
절대로 현실에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

이것이 이른바 B급 정서의 핵심이다.
<시실리 2km>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봐라. 가장 우습게 등장하는 58년 개띠 조폭. 그에게 '상황파악'이라는 기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못을 박으라고 시켰는데, 망치가 없으면, 그것이 가장 해결해야할 숙제일 뿐이지, 형님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캐릭터다. 초반에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권오중'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토록 맞고, 못이 이마에 박혔다면, 죽어도 일찌감치 죽어야 한다. 하지만 B무비에는 그런 사실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정신과 캐릭터들이 진정으로 영화의 장르를 섞는데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가장 끝내주는 장면은 영화가 호러에서 멜로로 넘어서는 장면이다. 호러에서 멜로? 언뜻 상상이 가능할까? 이것이야 말로 일반 관객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관객들에게는 명장면이 새롭게 탄생한다. 쫓기는 임창정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들어서 폐교의 전화기. 그것을 방해하는 임은경 처녀귀신. 여기는 절대적으로 공포 영화의 관습을 철저하게 지켜가면서 분위기를 타고 간다. 그러나 영화가 뒤바뀌는 정점은 바로 '여기서 나가라'고 하는 처녀귀신의 대사에서 결정난다. 어느 영화에서 귀신이 '여기서 나가, 내구역'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보통 공포영화에서는 있는 위엄, 없는 위협을 다 내보이면서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라는 식의 대사를 남발할 뿐이다. 그리고 임은경의 대사에 대해서 임창정은 '아침까지만 있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으잉??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이제 영화는 공포가 아니라 인간과 귀신 사이에 친밀감을 높이는 상황으로 바뀌어 간다. (정말 이런 캐릭터는 우리나라에서 임창정이라는 걸출한 배우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B급 캐릭터의 진수는 임창정의 독식이 아닐까?)


3. 지역 토호의 사회적 맥락.

<시실리>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새로운 맥락을 보여준다. 사실은 새롭다기 보다 감춰두었던 비기를 그제서야 발휘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싶다. 그 단서는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다. (스틸을 찾을 수가 없어서 아쉽다.) 그 장면은 '시실리 2km'라는 팻말이 등장하는 컷인데, '시실리' 팻말 밑에는 '천사의 집 4km'라는 팻말도 있다. (천사의 집인데 죽음의 '4'km 팻말. 다분히 보이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아무리 농기구에 단련된 사람들이고, 숫자가 많다한들 여자가 3명이나 포함된 집단에서 엄청난 연장(!)을 휘둘러대는 조폭 4명을 "제낄"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탐욕'이 그만큼 크다는 것으로 하나의 설득을 얻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에 의해서 또한 타당성을 얻는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과 탐욕이 만나서 제끼는 이야기에 대한 개연성을 더욱 확보해준다. 이 부분에 이르면 윤태호의 만화 <이끼>가 떠오른다. (지금 강우석 감독이 영화화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토호들은 이토록 강건하다. 토호는 단순한 토호도 아니며, 그것은 일종의 아성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중세 유럽과 같은 봉건제가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그 토호들은 이 땅에 자리잡은 유사이래로 분명히 지속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그러한 은유는 <시실리>에서는 가장 밑의 맥락에 깔려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분명 이것에 대한 통찰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만화 <이끼>에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그 마을에는 이상한 비밀이 있으며, 그들만의 커뮤니티는 너무나 돈독하여 이방인을 허락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단순한 주종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주는 예수같은 존재로써 비춰지는 우두머리라면, 그 결속력에다가 엄청난 냉기로 동결건조 시켜버린 결합력이 덧붙여진다.

<시실리 2km>는 장르영화의 규범을 마음껏 전복하는 즐거운 또 다른 반장르영화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꿰뚫어 가장 우회적으로 표현한 예술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한편, 만화 <이끼>는 이러한 사회적 속성들을 끔찍한 음모와 비밀을 파헤쳐가는 정공법의 이야기로서 양편의 극단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챠우>를 보기 위해서 찾은 신정원 감독의 데뷔작인 <시실리 2km>는 사실 여전히 진행중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차기작인 <챠우>에서도 자신만의 솜씨를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한 영화다. 곧 찾아볼 <챠우>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하다.
그러는 한편, 같은 이야기를 또 다른 방법, 정공법으로 파헤쳐간 <이끼>, 그리고 그것의 영화판인 강우석 감독의 <이끼> 역시 기다려진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질 때, 분명 우리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한 <안녕? 허대짜 수짜님!>을 보았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기획한 극영화이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해 왔던 노뉴단의 첫 장편 극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가질만 하다.
자 그렇다면... 영화는?

노-노 갈등의 문제를 제기하다.


90년대 초반의 <파업전야>를 기억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고, 공안정국의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 노동현장 및 각 대학에서의 상영을 진행했던 엄청난 영화다. 민주화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엔 여전히 사회적 분위기가 엄숙하기도 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열망들이 만나서 완성되었던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스탭들은 현재 충무로의 각지에 뻗어나가 영화를 하고 있고, 90년대의 중반 학번이었던 나조차 공대 지하의 어느 강의실에서 쉬쉬하면서 겨우 보았던 영화이다. 그 <파업전야>의 그림자가 21세기에 다시 드리워졌다.

<파업전야>와 <안녕? 허대짜 수짜님!>(이하 <허대수>)님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거리감만큼이나 너무나 다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동영화'라는 단어를 쓴다면 하나의 궤를 이룬다고 할 수 있지만, 두 편의 영화를 안으로 들어가서 본다면, 그것은 정말로 판이하게 다르다.
갈등의 소재가 '노-사'였던 <파업전야>, 그러나 IMF이후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친 대한민국은 새로운 신조어 '비정규직'이 등장하고 이것은 다시 '노-노'(정규직-비정규직)갈등을 만들어냈다. 이게 현재 21세기의 가장 극렬한 초상이다.
이는 분명히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에 신자유주의의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란 여전히 '서민' 옆에 붙어있는 단어이며, 그것은 결국 외적으로 양적팽창을 중심으로 내적인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섬찟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의외로 익숙하다. 현재 이미 현대자동차 노조는 신차조립라인의 투입을 앞두고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고, 거기서 주인공인 허대수는 정규직 노조 대의원으로써 사측과 협상의 주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200명 감축안을 20명의 비정규직 감축안으로 협상성과(?)를 이뤄낸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 노조는 투쟁을 계속하고 그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런 가운데 딸이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우연히 딸이 사귀는 남자가 비정규직 노조 투쟁에 앞장선 세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대해서 딸을 생각한답시고, 거짓말로 아픈 척을 하고 딸은 잠시 결혼얘기를 접는다. 게다가 세희는 계속 마음에 들지 않는 가운데 실제로 디스크 진단을 받는다. 한편, 처남의 실수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고, 결국 아버지를 철썩같이 따르고 존경했던 딸 연희는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집을 나간다. 그래도 세희는 대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딸을 찾아 세희를 쫗았던 대수는 옛날 직장동료였던 영조를 만난다. 98년 대투쟁때 영조를 외면했던 대수. 그리고 그의 재해 진단은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다. 망연하게 공장에 서있던 대수는 갑자기 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때 세희가 대수를 구하려다 같이 다친다. 둘은 어줍잖은 화해를 하게 되고, 세희는 좀 더 강한 투쟁을 해야한다고 마음먹지만, 대수는 절대 안된다고 세희를 말린다. 그리고 퇴원후 대수는 마음을 바꿔먹고 사측과 재협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다. 쉽진 않지만,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힘을 합쳐 사측과의 협상에 성공하고 세희, 연희는 결혼한다. 그리고 예쁜 딸을 얻는다.
영화는 손녀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

대충 내용은 이렇다. 익숙한 TV드라마 같은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사실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해결이 난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 새로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원인에 대한 고찰 부족.

영화가 진정으로 얘기하고자 한 지점은 어디일까?
정말로 노-노 갈등을 다루고자 한 것인가? 노-노 갈등이라면, 그 안에서 무엇을 문제로 제기하고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과정까지가 주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노-노 갈등의 출발점은 사실 IMF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다. 사실은 매우 고전적인 수법이라고 봐야한다. 중세 사회에서 지주와 농노(혹은 소작농)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름'이라는 특별한 지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노사관계에서 끼어있는 정규직인 셈이다. 이런 것을 '분리주의'라고 한다. 분리주의는 계급적이기도 하고, 민족적이기도 하다. 물론 계급적인 차원이 더욱 심각하고, 만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용자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불만들을 완충시키기 위해서 중간자를 두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들에게 돌아가야 할 저항은 중간에서 흡수되어버린다. 바로 허대수가 처한 상황처럼 ...
여기에 대항할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은 바로 노-노 갈등을 노-노 '연대'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방법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은 핵심이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을 그렇게 쉽게 던지더라도 그 현실 안으로 들어가면, 매우 첨예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파이 영화에서 가족들을 볼모로 잡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잡는 것도 그러한 이유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명분은 약자에게 있다. 그러나 실리는 강자에게 붙어야만 생긴다. 즉, 기본적으로 희생정신이 생기지 않고서는 거의 이러한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어내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허대수>는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가? 이 영화의 기획의 출발점이 바로 현대 자동차 정규직 사내방송에서 시작했다면, 더더욱 그 갈등의 시작점과 중간 과정, 그리고 그것이 어떤식으로 해결이 나는지에 대해서 더욱 주목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지점에서 허대수가 마음을 바꾸고, 재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비정규직노조와 정규직 노조가 텐트앞에 모여들어 웃으면서 끝이난다. 그리고 정작 해야할 이야기는 애니매이션 부분에서 해설로써 끝을 맺는다.  결국 영화는 그냥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연대해야 해!'라는 '선언'만 한 셈이고,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영화의 아버지격인 <파업전야>에서 조차 시나리오는 훨씬 뛰어나다. 단지 노-사문제에서만 하더라도, 내적 약점을 가진 자를 포섭하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갈등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노-노 간의 갈등은 단순히 친구(영조)에게 잘못했던 자신의 과오, 그리고 딸과의 관계, 세희의 인간성 등으로 손쉽게 그 갈등을 봉합해버리고 만다. 해결은 가족주의다. 사실 이 부분에 난 노동영화는 사실 퇴행했다고 느꼈다.
이는 단순히 감독이 현대 자동차 노조에 대해서 얼마만큼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회를 보는 틀에 있어서 너무 순진한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알면서도 뭔가 한계에 봉착한 나머지 외면을 해버린 것일까?
어쩌면,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플롯이 잘 섞이지 않아서 일까?

영화적 재미?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을 찾는다면, 바로 의사 캐릭터가 아닐까? 대수에게 디스크 진단을 내리는 의사야말로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다. 그에게는 어떠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재해진단을 자주 접한 의사로서의 본연의 건조함만 남아있다.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의사로써의 따뜻한 인간미 따위는 세세하게 가지지 않고, 오로지 사실의 진단을 내리는 데에만 집중한다. 영화는 사실 여기서 가장 영화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오히려 이쪽에서 좀 더 재미난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매일매일 아픈 사람을 상대하고, 똑같은 조끼를 입는 사람만 보는 의사는 당연하게도 삶이 별다를 것이 없을테고, 그런 가운데 새로이 나타나는 환자들에게 인간적인 교감을 하기는 커녕, 정확히 진단해주는 것만이어도 어디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산업재해 문제를 좀 더 깊이 가져가서 재해 진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를 가진 사람으로 끌어올렸다면, 노-사간의 문제에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기서 허대수는 자신이 돕지 못했던 영조와의 문제, 거기서 사실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문제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예전에 친구를 돕지 못했던 자가, 지금 와서 자신이 같은 처지에 처하는 아이러니에 방점을 맞추었다면, 그리고 다른 비정규직인 세희 혹은 사측에서 나오는 어떤 인물들이 허대수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플롯이 있었다면 영화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에 영화적 드라마란 인물에 대해서 관객이 얼마나 밀착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감동과 정서가 통용될 것이고, 더더욱 원래 기획의도에 부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외에..
이 영화의 편집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유림은, 단편에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또 다른 감독이다. 그는 <크레인, 제4도크>, <낫시리아>, <새끼여우> 등의 자신의 단편에서 더 깊숙한 노동영화의 한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노동영화의 전적인 스타일 혹은 드라마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새로운 감수성을 담아내고 있는 가능성있는 감독이다. 그가 <허대수>의 편집을 맡았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더 뛰어넘는 노동영화를 기다리며..
세상의 결국 계급의 분화가 마치 아메바의 분열만큼이나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분화하는 세상속에서 각 계급의 입장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다면화할 것이다. 누구는 언제나 갑이고, 누구는 언제나 을일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최상과 최하는 큰 요동이 없겠지만, 중산층이 몰락하고, 중간 관리자들이 여러 문제에 부딪쳐서 갈려나가고 하는 와중에 중간계급의 몰락과정에서 그 자신들은 '갑'이 되고 싶어하지만 ,'을'일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개인적으로, 계급적으로 상황적으로 다양하게 펼쳐질 것임에 분명하다. 그럴수록 영화는 그리고 예술은 더욱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어서 그 면들을 아주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허대수>의 등장은 영화적인 아쉬움을 남긴다 하더라고, 현재의 시점에서 꼭 한번은 나왔어야 할 영화이며, 그것이 노동자 스스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좋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또 더 좋은 노동영화를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덧붙여..

김규항씨가 블로그에 올리던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계급01 : 우스운 건, 다들 ‘양극화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계급'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양극화라는 말은 계급적 격차가 커진다는 뜻이다.

계급02 : 세상은 공식적으로는 '국가(나 민족)'로, 실제론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계급03 : '계급의식'은 노인이 신문을 보기 위해 돋보기를 준비하듯,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계급04 : 대중들이 계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니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은, 사랑이 메마른 세상이니 사랑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계급05 : 계급을 인정하든 부인하든 계급이라는 말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누구나 계급에 속해 있다.


계급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때라는 얘기다.


드디어 인디스페이스 블로거 프렌드의 활동 시작!
그 첫번째가 바로 이 인디애니박스가 되겠다.

일단은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라는 거 미리 주지해주시고!!

"/>" width="400" height="300">

">[Flash]



뭐 전체 배경설명.
옴니버스라고 하지만, 어떤 특정한 주제가 있어서 그것을 관통한다거나, 배우(?)가 같다거나 하는 식도 아닌 그냥 단편의 묶음이라고 봐야겠다. 문화컨텐츠진흥원에서 지원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의 선정작들로 추정되고, 그중에 나름 독립애니메이션계에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세 감독의 작품들을 모은 셈이다.
하지만서도, 세 작품에는 동일하게 사용되는 소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풍선'이다. 극장에서 만나게 될 리플렛은 누가 디자인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풍선이 나오는 장면으로 앞면을 채웠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를 보면, 각자의 영화에서 사용되는 '풍선'의 역할은 모두 다르다
이건 뭐 잠시 여담삼아 하는 말이 되겠다.

일단 각 단편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

첫번째로, "미스터리 스릴러" <원티드>
세 작품 중에서 가장 동화적인 그림체를 갖고 있는 영화다. 몸통이 둥그렇고, 손발은 굉장히 가느다란 캐릭터들이 나온다. 마치 중세시대의 마을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등장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부극의 아이콘들을 많이 가져온다. 수배장이라던지, 마을의 길과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들이라던지.
초반부에 나오는 호기심이 조금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게 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내 곧 영화는 홍수라는 커다란 재난을 통해 엄청난 이입을 가져온다. 앞부분의 성긴 드라마와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는 사라진 듯 하다.) 어쨌든, 커다란 홍수(말그대로 재난)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오르게 한다. 이미 자막으로 보여주는 날짜는 1987년 7월의 시기를 알려줌으로써, 환타지적 세계와 현실적 이야기의 만남을 예고한다.(그래서 더더욱 재난영화로 보인다.) 그리고 그 재난에 대해서 대처하는 경찰과 관료의 모습은 당시(정말 '당시'만일까?) 한국 사회의 답답한 모습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이 은유하는 그것이다. (한편, 관료가 삽질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의 대통령이신 2MB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잠시 얘기를 딴 데로 새자면, 정말 이명박은 80년대 TV속의 한 장면에서 톡 튀어나온 사람같다.) 그리고 돌아와서 복구하는 세상. 말그대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이야기다.
일단 영화로써, <원티드>는 처음의 호기심이 장르의 변화로 인해 달라져 버린다. 앗, 감독의 fake인가? 그렇다면 감독 스스로가 이 장르는 fake요 하는 지점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음, 한 번 봐서 놓친걸까? 뭐 아무튼 그렇다는 말씀이다.
한편, 애니매이션으로써, 개성적으로 생긴 캐릭터들을 봄으로써 생기는 재미가 있다. 그것에 장르적인 부분이 동화처럼 펼쳐짐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컬함도 좋다.
한가지! '할머니'로 형상화한 '셀마'라는 캐릭터의 활용도가 좀 떨어지는 듯 하다. 약간의 아쉬움.
그러나 의도적으로 장르의 변주를 가져온 것이라면? 장르는 낚시고, 이면에 깔린 그 무언가를 보자면? 이 영화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해야할지도 모른다. 박수!!!!!

다음, "판타지 멜로" <무림일검의 사생활> (어제 본 상영에서는 순서가 이렇게 되었다.)
이미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보았던 작품인지라 반갑게 또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로 줄타기를 잘한다고 해야할까? 감독의 상상력와 장르의 전형들이 적당히 버무러져서 흘러간다. 멜로라는 굵은 동아줄 위에서 뛰노는 검객과 그의 애인이라고나 할까? 장형윤 감독의 재능은 바로 여기서 흘러나온다. 천연덕 스럽게 난 '애니메이션 감독'이요 하고 나오는 캐릭터들. 동물과 사물과 인간이 서로 대화하고, 변신하고 심지어 직업을 가진다. 크기는 자유자재인데다가, 서로가 뻔뻔하고, 단순한 감정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제목에서도 이미 줄타기는 예고되어있다. '무림일검'과 '사생활'이라니...
하지만, 영화는 절대적으로 감정과 감성 중심이기 때문에 거부감없이 따라서 보기 좋다. 게다가 그 순박함과 순정, 그리고 혜미의 쿨함과 쿨한 정서 안에서 여전히 순애보의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분히 현대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홍대 주변, 한강 주변, 낙안 읍성 주변 등등 실제 현실의 이미지들을 끌여들여와서 만든 장면들에서 왠지 익숙함과 함께 현실성에 더욱 참여도를 높이고 있다.
그의 전작들에서 이어져 오는 기발한 상상력과 단순하면서도 귀여운 그림체, 그리고 한발짝 한발짝씩 전진하는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당연히 흐뭇함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이 영화는 이미 다른 영화의 공간을 빌려오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로 추정된다.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에 나오는 가리봉동 쪽방의 난간과 옥상이 나온다. 뭐랄까. 이걸 찾아내는 나는 또 뭘까. ㅡㅡ; 어찌되었거나 반가웠다. 분명 마음에 드는 장면이기에 서로 빌려갔지 않았겠나.. ^^)

마지막으로, "블랙 코미디" <사랑은 단백질>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작품이다. 최규석의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각색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이 단편은 다음 작품인 <습지생태보고서>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만화가인 최규석. 특히 <습지생태보고서>는 리얼하면서, 그 이상으로 진솔한 캐릭터와 이야기. 그리고 유머가 가미되어있다. 그래서 더더욱 기대가 된 작품. 그런데 초반부에 나오는 크레딧에 익숙한 이름들이 나온다. 성우로 참여한 배우들 중에 양익준, 오정세가 있다. 독립영화계에서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면서, 연기력이 입증된 배우들이다. 기대가 되었다.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원화의 장면들을 고스란히 잘 살려내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진 시간으로 만화는 영화가 되었다. 강한 드라마를 갖고 가기 보다는 짧은 단편 안에서 각자의 캐릭터들이 잘 살아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듯. 배달온 돼지의 갈고리 손과 배갈린 돼지 저금통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걸 보노라면, 그의 다른 작품속 손가락 잘린 '공룡 둘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은 이토록 각박한 건가. 뿐만은 아니다. 캐릭터들의 계급성을 벗어나서 단순히 닭과 돼지의 등장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에 외국 플래시 애니매이션 <the Meatrix>라 떠오르는 지점도 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구안에 어디든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미덕은 '유머'인 셈이다. 감성은 분명 슬프게 가져가지만, 겉으로는 웃어야 하고, 웃음으로써 가져가야 할 심정적 괴리감을 '유머'로 만들어낸다. 복잡다단한 느낌을 말그대로 '승화'시키는 거다. 다시 한번 박수!!!


'인디'라는 것.
인디는 분명 '자본'의 종속성의 여부에서 나오는 정의일 거다. 그러나 이 애니매이션들에게 '인디'라는 단어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상상력'이라는 정의로 가야할 듯 하다. 저 너머 다른 '인디(아나 존스)'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뭔가를 욹워내려고 애쓰는 반면, 이 곳의 "인디"라는 단어는 이렇게 다른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뱀발.
옛날의 극장용 장편 애니매이션들은 분명 동화(動畵)라는 측면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말은 애니매이션을 그렸다는 느낌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즘의 애니매이션들은 분명 영화라는 측면에 가까운 듯하다. 분명 그렸는데, 카메라로 찍은 듯, 사실적 앵글들이 나온다. 또 하나의 장점의 측면에서 얘기하는 바다.
동화를 그리는 것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태도가 달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때로는 동화를 그려내는 자유로운 방식도 넘나들어야 하겠지만...
^^

강력추천합니다.

중앙 시네마에 있는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는 '6년째 연애중'인 다진(김하늘)과 재영(윤계상)의 연애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제목이 아니다.

이 영화는 간단히 말해 '연애'에 관한 '메타담론'으로 이루어진다.

그 메타적인 제목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이 글의 "제목"이다.

물론 특수성이 언제나 작용한다고 선언(!)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의 연애라는 것이 기실 요즘의 88만원 세대에게 가깝거나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Film2.0의 인터뷰에도 나오듯, 박현진 감독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 속하기 보다는 그 앞전의 X세대 혹은 Y(또는 N일수도) 세대에 더 가까운 감성을 지닌 사람일 거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 인식에 관한 출발점이 살짝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바라봐져야 한다.

좋다.

그렇다면 (살아가야할) 현실과는 다르게 (사랑에 관한) 현실만을 놓고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전적으로 그들의 6년이라는 시간의 연애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영화적으로 의미 있는가 또는 정말로 그들의 마음이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떤 관객이 나의 딴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싸울 생각도 없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스스로가 공감한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사람들은 각자가 수용의 폭도, 방향도, 성격도 다른 법이다.

1. 6년이라는 시간의 퇴적? 그리고 공감?

6년의 연애를 하는 사람은 전체의 표본에서 본다면 많지는 않을 것이다.(21세기이지 않은가? 엉덩이와 거시기 먼저 부비다가 자고, 그걸로 연애 시작하는 사람도 많고, 그것이 며칠 맞지 않으면 헤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사실 연애란, 하는 당사자들의 정치적 보수성 혹은 진보성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1차적으로 6년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나를 포함한 당신이 6년 동안 연애를 했다고 상상해보자. 지금 그 연애가 진행중이라면, 그 연애는 다분히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시작되어서 진행중인 셈이다. 간단하게 연애는 남녀간 감정교류를 통한 '교집합'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고1 수학시간에 집합론을 배우게 되므로 크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라 판단한다. 누구라도 정석의 초반부 집합론을 열심히 안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있다면 중학생쯤?

집합의 영역의 속성으로 따졌을 때, 교집합과 여집합, 그리고 합집합이 존재한다. 결국 집합 '다진'과 집합 '재영'은 처음에는 공집합이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접점을 만들었을 거다.(갑자기 도형의 방정식) 그리고 그것들은 중심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공유하는 영역, 즉 교집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집합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숨쉬게 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6년의 시간은 그 교집합을 서로 키우고 조절하면서 둘 사이의 중심거리를 결정하는데 쓰여졌을 거다.

그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고, 전제로 정해진 바로 옆집에서 살아가는 연인이다.

그러나 이 전제부터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각자 독립해서 살아가는 1인 가정의 사람들이고, 젊은 연인들이 연애를 오래하면서 유지하는 거리가 바로 이웃해서 사는 거라니? 물론 이 영화의 출발점이 그 곳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기획부터가 이미 부서졌을 테지만, 영화는 뻔뻔하게 그것을 설득할 수 없으니 첫 장면에서 그것을 제시하고 나중에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의 대사로 관객에게 영화를 '주입'한다. 어찌되었건 '서로의 프라이버시'는 각자의 여집합이자 차집합이 된다. 그리고 이내 각자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차집합은 결국 교집합을 건드리고 이내 다시 교집합이 공집합이 되는 상태로 돌아간다. 전제는 그렇다 치고 영화의 방향은 뻔한 셈이다.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라고 쓰며 기존 로맨틱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영화를 읽어내는 지점에서 무책임함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물렁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몇몇의 얄싹한 대사 말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이 영화로써 존재하는 것은 내겐 글쎄올시다. 억지로 두 사람의 이웃해 살기를 인정한다 치고 출발해보자. 뭐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영화를 따라가려 해도, 두 사람간의 현실에는 어떠한 6년의 시간이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것은 '내가 투명인간이냐'나 '이제 여동생같고 딸같다'라는 대사말고 무엇을 근거하는가? 단지 외식보다 집에서 밥해먹는거, 가끔은 자기집이 아니라 편하게 애인집에 들이닥치는 거, 회식에서 술먹고 불러내서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6년'이라는 시간의 대의성을 갖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이지 않은가? 두 사람이 6년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혹은 겪어보았을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이 영화의 6년짜리 교집합은 불량품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영화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나 하면서 생각해본다. 얼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똑같은 시간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의 감정과 거리감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보여지는가를 말하려는 거다.) 그 영화에서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는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강릉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것에 대한 묘사 중에 은수는 신문지를 깔고 발톱을 깍고, 상우는 티비를 보고 있다가 라면을 끓여먹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간의 심리적 가까움과 편안함이다. 만약에 6년의 시간이 더해진다면, 그 깎은 발톱을 상대의 얼굴에 들이대는 장난도 하지 않을까? 그러한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보여주고, 그것이 다시 6년째 연애중이라는 특수성의 대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6년째 연애중>에는 그러한 시간의 퇴적에서 오는 두 사람의 감정 상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위에 슬몃 얘기한 것은 컨셉에 맞게 상상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사실 정말 보편적이지 않은 주거형태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6년이라는 시간을 연애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6개월 전에 곁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나란히 살게 된 두 사람이 가진 과거와 그들의 이야기는 좀 더 날카롭게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는 정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1년만 연애해도 다 겪게 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6년쯤 연애를 하면, 상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익숙함이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철학도 바뀌는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것을 반영하기는 커녕, 90년의 감수성과 그 상식으로 90년대적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연인을 그려낼 뿐이다. 그러면서 21세기의 관객에게 공감하고 이해받기를 강요한다. 이 쯤되면 좀 뻔뻔한 거 아닌가?

2. 연애의 진보성? 보수성? 설득되지 않는 21세기적 봉합!

수많은 커플들이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있다. 왜냐고? 배우자 혹은 연인의 바람끼 때문이다. 보통 바람이란 걸리기 전에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걸리지 않는 바람이란 너무너무 적어서 정녕 걸리지 않고 바람피우는 사람은 거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21세기에 들어서 연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또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진과 재영은 모두 다 바람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보수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에 관한 문제도 캐릭터에 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다진도, 재영도 굉장히 밋밋한 캐릭터들이다.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특이점을 보이기 보다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 즉 외연에서 비롯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수준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물들에게 어떤 강력한 행동력을 기대하는 것도 분명 무리수다. 강철중도 아닌데...

그래서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물들의 욕망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작은 욕망들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인물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돈에 대해서 강한 동인도 없고, 각자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들을 적극 수용한다거나, 하룻밤에 충실한 리비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연인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지도 않는다. 아... 그렇다면 그들의 옅디 옅은 감정의 굴곡을 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작은 지점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그것들은 위에 얘기했다시피 피상적으로 넘어간다.

연애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냐 아니냐, 또는 일부일처주의자나 아니냐를 놓고서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라고 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느 정도 비약이 있을테니. 하지만, 분명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렇다면 캐릭터들의 행동들에서 얘기하는 진보성, 보수성이 아니라 감독이 연애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냥 애매모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영화의 결말부분에 가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클라이막스에 가면 그들은 분명 헤어진 것이다. 6년째 연애중이라는 제목에서 예견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 말의 이면을 들고서 구성한 클라이막스다. 결국 재영은 다진의 언어(빠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재영은 여전히 뻔한 이야기(랑그)를 반복한다. 끝내 다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영역을 돌아보는 것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연애 영화의 전형성이고, 보수적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다시 에필로그에 가서 더욱 어이없어진다. 각자 이웃해 살던 집을 정리하고 다시금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이는 정녕 아이러니다. 영화는, 감독은 이것을 필연 혹은 숙명적이라고 표현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녕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랑그를 앞세워서 얘기한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 헤어져야 한다. 결국 소통되지 않고서 각자 발걸음을 바꾸어서 간다. 걸어가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도착하는 문자메시지!!(이것도 정녕 편지인가? 제 때 도착하는 편지!!) 그리고 그 안에는 둘이 행복했던 시절에 주고 받았던 이야기와 둘이 못내 그리고 싶어했던 곱게 늙은 커플의 사진이 담겨있다. (아 얼마나 21세기적이고, 새로운 기술의 위력인가!!) 이것 한 방으로 그동안에 멀어졌던, 이해하지 못했던 크레바는 순식간에 봉합되고, 뒤돌아서 뛰어온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한다. 정녕 21세기적이고도 순식간에 강력한 드라이아이스 분무식의 봉합이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날카로운 메스를 담고 있다. 수술을 너무 급하게 끝낸 나머지 메스를 미처 꺼내지 못하고 봉합해 버린 거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앞으로 몇 년을 연애 중‘일’지도 모른다. 아주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정녕 사진속의 늙은 커플 처럼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단기적으로 내일은 만나고, 혹은 이번에는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것을 충분히 읽어내고서 모호한 결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본 분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