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흐름이란, 일부러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유통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놀라운 것은 마치 역사의 필연마냥, 어떤 흐름들이 보일 때다.
물론 그것은 너무 미묘하고도 아주 큰 한강 같아서, 그 안에 흐르는 작은 조류들을 마치 중요한 흐름인 것 처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말로 '바다'로 흘러가는 '강'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다. 숲안에 있으면 숲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만, 숲이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이 결국 어떤 흐름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문화는 분명 어떤 '복고(復古)'의 흐름이 있다고 말하려던 참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문화평론가의 식견은 없으므로 몇몇 영화들을 중심으로 생각해볼까 한다.)

최근 몇개월간의 영화들.
최근에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과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가 개봉을 했다. 이른바 60~70년대 한국에서 큰 유행을 만들었던 만주웨스턴과 액션영화들을 불러온 영화다. 한편, 곧 개봉을 앞둔 <고고70>, <모던보이>등도 각각 70년대, 30~40년대의 시대배경을 갖고 있다. 간단히 말해 복고풍 영화다. 그리고 현재 개봉중인 <맘마 미아>. 여기엔 어떤 향수가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복고풍. 왜 우리는 복고풍에 열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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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맘마 미아>를 보고나서 흥겨웠던 것은 너무 당연하게도, ABBA의 노래덕분이다. 영화를 보면서 평점을 주자면, 영화로서 평점은 과히 높히 주기 어렵다. 별5개중 3개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메릴 스트립의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보는 재미를 기점으로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돋보였던 장면은 'Super Trouper'를 부르면서 작은 공연을 하는 다이나모스의 장면이었다. 줄리 월터스, 크리스틴 바란스키와 반짝이 나팔의상을 입고 두껍고, 투박한 굽의 하이힐, 그리고 메릴 스트립의 눈가에 그려진 스모키 메이크업에 율동에 가까운 안무를 펼치면서 디너쇼를 펼치는 장면에서 나는 뭔가 탁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이 영화는 이렇게 즐겨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 반짝거리면서 바깥단으로 뻗어나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나팔의상을 보고 있으니, 왠지 저것이 정말 70년대의 문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내가 영화를 보다보니, 아 저것이 바로 나의 부모님 세대가 향유했던 문화라는 것이구나.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 엄마, 아버지를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메릴 스트립은 우리 엄마와 동갑이다. ㅡ.ㅡa)
영화를 주론 보는 계층은 20~30대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아바를 즐기는 것은 동시대의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향수와 역사속에서 기록 등을 통해서다. 물론 음악자체를 즐기는 부분도 있을 테지만, 우리가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왠지 그 안에서 우리 부모들이 젊었을 때, 즉, 젊은 엄마, 젊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맘마 미아>속의 이야기는 뭔가 그런 지점을 잘 살려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시작은 그렇게 간다. 자신의 결혼을 앞두고,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한 딸.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찾고자, 무조건 3명의 후보를 모두 결혼식에 초대를 해버린다.(물론 엄마가 보낸 것처럼.) 그리고 결혼식 준비 와중에서 엄마 역시 자신의 옛 남자들을 모두 만나게 되고, 엄마는 순식간에 젊었을 적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금요일이면 놀기 위해 클럽을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댄싱 퀸'이 되고, 친구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 'Super Trouper'가 된다. 젊었을 적의 엄마가 되살아난 셈이다. 고스란히 나이만 더 먹은 세 명의 아빠, 세 명의 엄마가 젊은 모습으로 애정행각과 삶을 즐긴다. 이게 우리들의 부모를 만나는 방법이다.
(한편, A TEENS라는 스웨덴 그룹이 있다. 아바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젊은 친구들, 멤버구성도 비슷하고, 정말로 아바의 자식들이 부모의 노래를 재현하는 느낌이랄까?)

엄마, 아버지를 위한 영화표를 2장 더 샀음은 너무 당연한 거다. 비록 당시의 나의 부모님은 아바를 즐기지도, 음악을 즐기지도 못한 개발경제하의 순진한 일꾼 가족에 불과했지만..... 왠지 멀리서나마 길거리에서 들었을 아바의 음악을 다시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복고풍이 나에겐 이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영화 <맘마 미아>에 나오는 다이나모스의 "Super Troupers"
(여담이지만, 크리스틴 바란스키는 왠지 제이미 리 커티스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
(또 하나, 메릴 스트립의 스모키 메이크업, 정말 멋지지 않은가? 우리의 엄마들에게 저렇게 멋진 모습을 연출해 드리고 싶다.)

이번엔 아바의 "Super Troupers"


80년대말~90년대초의 한국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듯. 앵글봐라, 옆모습 하나도 없다.
'슈밥바'인지 '트루펍버'인지.. 코러스 완전 신난다. 아싸!

또, 아래는 A TEENS의 "Super Troupers"

이젠 그들조차 TEENager는 아닌 듯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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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마 스튜디오에 관해서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들이 서울에 왔다.

<톡식 어벤져>시리즈와 최근작 <폴트리가이스트>.
B급이란 이런 것이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른바 '난 사람'들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거의 좌절의 바닥을 헤엄치다 못해,
그들의 영화에 나오는 화장실에 내가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토록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녕 그들의 능력이며, 명랑함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B급영화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생산되고 있지만,
항상 되풀이 되는 이야기는 과연 "B급"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더욱이 B급 영화의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한국 영화판에서, B급이라는 단어는 다시금 정의해야 할 지도 모른다. 99년이었나,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영화잡지 <키노>에서 박찬욱, 류승완, 오승욱, 임필성 등이 대담을 나눈 기사도 있다.
요즘의 한국영화는 참 희한하다.
로이드 카우프만의 말 그대로 "주류영화사들이 비주류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비주류영화와 B급 영화는 조금은 다른 단어가 아닐까? 한국 영화에는 비주류영화라기보다는 비주류의 감성들이 조금씩 가미되고 있을 뿐이다. 엄연하게 B급영화의 시장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80~90년대에는 비디오 시장에서 그것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오프라인 렌탈샵이 망해가고, 그러는 가운데 B급영화 시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것이 헐리우드의 "B급영화"와는 또 달랐던 영화들이지만...)
어찌 되었든 다시 돌아와서, "B급"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B급"은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떠한 '컨셉'이거나 '장르'이기 보다는 '정신'에 가깝다. 자본의 크기, 혹은 성향 등과는 관계없이 B급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오히려 영화를 떠나서 김규항의 <B급 좌파>, 또는 우석훈이 스스로를 'C급 경제학자'라고 칭하는 단어들과 더 가깝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글쎄... 본디에 인문사회학적 소양이 깊지않은 나 인지라 그것을 정확히 진단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설명하는데 노력을 해보자면....
주류사회(영화, 학자)들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숨기고, 부끄러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통렬한 풍자를 통해 지적하는 방식. 그리고 양식 혹은 방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나 문법 혹은 거동(습속 등을 포함해서) 등에 전혀 반대의 방법 혹은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복을 기도하는 것 등이 B급 정신 혹은 양식에 포함되는 것들일 거다.
물론 용어는 굉장히 포괄적이라서 다른 부분도 더 있을 것이다.
실제로 B급이 '컨셉'일 수도 있는 것이다. 뭐 아니라면 어떠랴??

B급 정신의 진수는 '나는 이렇다... 어쩔래? 넌 아니냐? 그럼 말아라..' 쯤의 태도가 아닐까?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같이 놀아보겠다는 태도. 뭐 어떻게 보면 편협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것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협하달 수 밖에...
A급 따위는 통렬하게 부수고, 놀리고, 갖고 놀아버리는 그들의 유쾌함은 정말 훔칠 수만 있다면, 훔쳐버리고 싶다. 물론 왠지 그 녹색의 구토물 등을 좀 닦고서 ...

현재까지 <트로마 in 서울>에서 본 영화들은.
<톡식 어벤져 4 : 시티즌 톡시>
<트로미오와 줄리엣>
<폴트리가이스트>
<카니발 더 뮤지컬>
이렇게 4편이다.

영화들을 한 편씩 리뷰를 쓰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위와같이 글을 시작했다.
그냥 기분상 이중에 정말 신났던 것을 꼽자면, 오히려 <트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고전적인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오고, 환타지를 가미하고, 결말을 전복시켜버리는 거침없음에 박수를 보낸다.

왠만큼 마음의 준비도 했고, 왠만큼 자극에 익숙하다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름 근작인 <폴트리가이스트>를 보면서, 꾸엑꾸엑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인분이 난무하고, 성기가 기이하게 변하는 상황들을 보고 있노라면, ㅋㅋ. 자연적으로 고개가 조금은 돌아가더라.
아직도 뭔가 내 안에 이상한 윤리나 도덕 혹은 어떤 질서와 평형에 대한 것들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일까.
하긴 신체훼손이라는 것은 언제나 공포의 느낌을 가져온다.
그러나 트로마의 재능은 그 공포감 안에 어떤 유쾌함과 신랄함이 같이 담겨온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세상은 계속 나빠지고, 뭐랄까 뉴스만 보면 토나오는 일의 연속이다.
이럴 때일수록 좀 하드코어한 자극을 영화관안에서 좀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다.
게다가 이들의 영화는 단순히 하드코어함을 넘어서 명랑하고,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현실과 어떻게 싸워야할지 혹은 어떻게 넘어야 할지에 대한 방법도 깨달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8월 14일까지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이다.
놓치지 말 것.
하하하하.


ps. 영화 한 편에 대한 리뷰를 안 쓰려고 했지만..
왠지 <폴트리가이스트>와 <패스트푸드 네이션>과의 비교를 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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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된다!

다들 많이 들어 본 얘기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혹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태도에 따라서 이 문장은
체념적으로 들리기도, 강렬하게 들리기도, 가치중립적인 느낌으로 들리기도 한다.

뻔하게도 역사는 단순히 한 민족, 국가 안에서 되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간을 옮기고, 또 거기서 시간을 옮겨서 다시 되풀이된다.
일단 이유는 차치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앞뒤 정황을 얘기해보자면...

<존 레논 컨피덴셜>.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틀즈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존 레논의 독보적 행보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단순히 '반전운동'을 했다는 행적으로 나름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레논은 낯선 존재이다. 언제나 남의 나라의 위인들은 '일화'로써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비틀즈의 입장에서는 60년대 말,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멤버들간의 불화 및 음악 노선의 변화로 이미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오노 요코가 있다. 그리고 존 레논은 일단 요코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도약을 한다. 68년도를 거치면서 전 세계는 이미 들썩들썩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베트남전은 발발했다. 20세기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 사회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존 레논을 낳았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냉전의 대리전으로써 진행된 베트남전 시기에 요코와 레논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 사이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단 하나 '평화'다.
이미 비틀즈 시기에서 거침없는 발언을 하곤 했던 레논. 세상은 연예인 조차 가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요코와 신혼여행을 아예 '침대 시위'로 변모시킨다. 수년간 대중의 우상으로써 군림한 레논은 그에게 가해지는 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를 적극 이용해서 세상에 거침없이 '평화를 택하라'고 소리친다. 그들의 침대 시위는 정녕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미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찾아온 미디어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며,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다름이 아니라, 레논과 요코가 전 세계 11개 도시에 "War is over"라는 짧고 굵은 메시지를 닮은 포스터를 붙였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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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메시지를 붙였다.
자세히 보면(아니 대충 봐도) "if you want it /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라고 적힌 이 문구.
TV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는 그 포스터를 붙이는 작업의 돈은 어디서 나와서 쓰냐고 묻는다. 레논은 당당하게 '지금은 우리의 주머니(pocket)에서 나온다'라고 대답한다.
어떤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레논과 요코는 자신들의 돈을 털어서 11개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저 메시지를 뿌리고 있었다. 저 메시지를 읽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이 바로 "John & Yoko"가 원하던 당신(YOU)이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미국 내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극도의 패권주의자였던 닉슨과 그의 공화당. 한편 존과 요코는 공화당의 전당대회를 따라 다니면서, 그 곁에서 평화콘서트를 주최한다. 한편, FBI국장이던 에드가 후버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한다. 흑인들의 급진당이었던 블랙팬더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인권 운동을 주창한다. 그러는 가운데 마틴 루터킹은 암살을 당한다. 이러한 장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72년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존과 요코는 절대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계속한다. 백악관 주변에서 반전평화론자들이 촛불시위를 펼치고, 닉슨은 촛불시위를 축구경기 구경하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지저분한 방법으로 존과 요코를 추방하려 한다. 체류 비자를 연장해주지 않음으로써 강제 추방을 하려고 하지만, 존과 요코는 이에 대해서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수년이 걸리는 사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고, 존과 요코는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한다.
이후 영화는 투쟁에 승리한 존과 요코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잠시 이어간다. 결국 80년 12월 9일 데이비드 채프먼에 의해 권총 암살을 당하는 걸로 생을 마감하는 존 레논.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영화를 보면서 섬찟한 것은 이 역사가 고스란히 2008년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닉슨은 이명박, 에드가 후버는 어청수, 베트남전은 쇠고기 정국, 미국의 보수기독교는 한국의 보수기독교, 반전행동의 촛불은 시청앞 촛불, 관련한 수배자들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은 2008년 한국에는 '존과 요코'가 없다.
앙꼬없는 찐빵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불만이 아니라 일종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존은 <Happy Xmas (war is over)>, <Give peace a chance>, <Power to the people>, <Imagine>, <Love> 등의 노래를 만들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고, 민중들 역시 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더욱 힘을 모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리에겐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노래가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대칭항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윤민석 이라는 민중가요 작곡가가 만들었다. 이 노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다름을 얘기하는 것이다. 존의 노래들은 메시지도 강렬하지만, 존 스스로가 원래 대중가수였고, 그의 의식이 발전하여 예술가가 되었고, 다시 사회참여로 이어진 경우인 거다. 그가 가지는 파급력은 단순한 호응과 집결을 넘어서, 예술적 승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힘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레논의 노래를 부르면서 정치적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의 힘에 감복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정말로 "If you want it"라는 말을 보고 어떻게 원하지 않겠는가? 전쟁이 정말로 끝나기를 원한다면, 노래를 부르면서 옆사람의 손을 잡고, 군인들의 총부리에 꽃을 꽂으면서 '사랑'으로 감싸안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존과 요코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어떤 분야의 누군가가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또는 준비한다고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나라의 문화가 결국에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여 '존과 요코'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일 뿐이다. 좀 더 다르게 얘기해봐도 그래봤자 수많은 '예술가'들의 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안에서 어떤 영웅을 만들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잘못 택한 길이 될 거라 믿는다.

존은 스스로가 이렇게 노래한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
from <Imagine>
간단히 말하면, 함께 하자, 연대하자 쯤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나도 친구이고 평등한 관계로서 인간의 본연한 마음으로 만나서 함께 하자는 거다. 패권 따위일랑은, 나만이 잘살겠다는 욕심일랑은 버리고 같이 살자고 말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말그대로 당신이 원하면...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된다.

서글픔만을 따져서 본다면, 분명 우리는 아직 '존과 요코'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산 '존과 요코'를 만들거나 기다릴 것인가라면 그건 아닌것 같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일단 이 영화를 보고, 존과 요코의 노래를 듣고 생각해보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서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하는 거다. 진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해야할 일은
저 위의 사진...
마지막 줄에 쓰인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 옆에 당신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다.


<Give peace a chance>
처음에 나오는 장면은 존과 요코가 침대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호텔방에서 콘서트를 하는 장면이다.
뒤에 'Hair Peace', 'Bed Peace'라고 쓰인 문구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자신의 자료화면을 내보낼때 'PEACE'라는 문구를 꼭 내보라고 했다.


<Happy Xmas (War is over)>
존과 요코의 메시지의 마지막에 우리의 이름들을 적어놓고 전세계를 누비는 투어를 시작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피스보트가 출발한다면, 나의 이름을 같이 적어주기를.. 그 피스보트에 붙일 메시지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꼭 선물하겠다.


<Love>
존과 요코의 사랑인 듯 하지만,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래서 강렬하다.
우리의 이야기다.



<Power to the people>
민중에게, 시민에게 권력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촛불을 꺼트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나가자구요.
대한민국의 '존 레논'은 어떤 사람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일단 당신의 마음에 있구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서로서로 보여주고 나눠주고, 더욱더 키워나가면 그 곳에 '존과 요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슷한 사람도 나오리라 믿습니다. 순진한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ps.
또 다른 혁명영웅이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한마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존의 노래 <Imagine>의 가사와 놀랍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다.

뭐랄까 체와 레논은 만난적이 있을까? 어찌되었건 천상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만났겠지.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ps2.
영화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 칼 번스타인은 <힐러리의 삶>의 저자이며, 닉슨을 하야 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대우자동차 CF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통령의 음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인물이다.
그외에 노암 촘스키, 타릭 알리, 월터 크롱카이트 등도 인터뷰이로 나온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영화도 보고, 더 찾아보는 기쁨을 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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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6년째 연애중'인 다진(김하늘)과 재영(윤계상)의 연애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제목이 아니다.

이 영화는 간단히 말해 '연애'에 관한 '메타담론'으로 이루어진다.

그 메타적인 제목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이 글의 "제목"이다.

물론 특수성이 언제나 작용한다고 선언(!)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의 연애라는 것이 기실 요즘의 88만원 세대에게 가깝거나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Film2.0의 인터뷰에도 나오듯, 박현진 감독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 속하기 보다는 그 앞전의 X세대 혹은 Y(또는 N일수도) 세대에 더 가까운 감성을 지닌 사람일 거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 인식에 관한 출발점이 살짝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바라봐져야 한다.

좋다.

그렇다면 (살아가야할) 현실과는 다르게 (사랑에 관한) 현실만을 놓고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전적으로 그들의 6년이라는 시간의 연애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영화적으로 의미 있는가 또는 정말로 그들의 마음이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떤 관객이 나의 딴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싸울 생각도 없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스스로가 공감한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사람들은 각자가 수용의 폭도, 방향도, 성격도 다른 법이다.

1. 6년이라는 시간의 퇴적? 그리고 공감?

6년의 연애를 하는 사람은 전체의 표본에서 본다면 많지는 않을 것이다.(21세기이지 않은가? 엉덩이와 거시기 먼저 부비다가 자고, 그걸로 연애 시작하는 사람도 많고, 그것이 며칠 맞지 않으면 헤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사실 연애란, 하는 당사자들의 정치적 보수성 혹은 진보성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1차적으로 6년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나를 포함한 당신이 6년 동안 연애를 했다고 상상해보자. 지금 그 연애가 진행중이라면, 그 연애는 다분히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시작되어서 진행중인 셈이다. 간단하게 연애는 남녀간 감정교류를 통한 '교집합'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고1 수학시간에 집합론을 배우게 되므로 크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라 판단한다. 누구라도 정석의 초반부 집합론을 열심히 안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있다면 중학생쯤?

집합의 영역의 속성으로 따졌을 때, 교집합과 여집합, 그리고 합집합이 존재한다. 결국 집합 '다진'과 집합 '재영'은 처음에는 공집합이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접점을 만들었을 거다.(갑자기 도형의 방정식) 그리고 그것들은 중심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공유하는 영역, 즉 교집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집합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숨쉬게 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6년의 시간은 그 교집합을 서로 키우고 조절하면서 둘 사이의 중심거리를 결정하는데 쓰여졌을 거다.

그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고, 전제로 정해진 바로 옆집에서 살아가는 연인이다.

그러나 이 전제부터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각자 독립해서 살아가는 1인 가정의 사람들이고, 젊은 연인들이 연애를 오래하면서 유지하는 거리가 바로 이웃해서 사는 거라니? 물론 이 영화의 출발점이 그 곳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기획부터가 이미 부서졌을 테지만, 영화는 뻔뻔하게 그것을 설득할 수 없으니 첫 장면에서 그것을 제시하고 나중에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의 대사로 관객에게 영화를 '주입'한다. 어찌되었건 '서로의 프라이버시'는 각자의 여집합이자 차집합이 된다. 그리고 이내 각자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차집합은 결국 교집합을 건드리고 이내 다시 교집합이 공집합이 되는 상태로 돌아간다. 전제는 그렇다 치고 영화의 방향은 뻔한 셈이다.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라고 쓰며 기존 로맨틱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영화를 읽어내는 지점에서 무책임함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물렁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몇몇의 얄싹한 대사 말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이 영화로써 존재하는 것은 내겐 글쎄올시다. 억지로 두 사람의 이웃해 살기를 인정한다 치고 출발해보자. 뭐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영화를 따라가려 해도, 두 사람간의 현실에는 어떠한 6년의 시간이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것은 '내가 투명인간이냐'나 '이제 여동생같고 딸같다'라는 대사말고 무엇을 근거하는가? 단지 외식보다 집에서 밥해먹는거, 가끔은 자기집이 아니라 편하게 애인집에 들이닥치는 거, 회식에서 술먹고 불러내서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6년'이라는 시간의 대의성을 갖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이지 않은가? 두 사람이 6년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혹은 겪어보았을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이 영화의 6년짜리 교집합은 불량품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영화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나 하면서 생각해본다. 얼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똑같은 시간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의 감정과 거리감들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보여지는가를 말하려는 거다.) 그 영화에서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는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강릉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것에 대한 묘사 중에 은수는 신문지를 깔고 발톱을 깍고, 상우는 티비를 보고 있다가 라면을 끓여먹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간의 심리적 가까움과 편안함이다. 만약에 6년의 시간이 더해진다면, 그 깎은 발톱을 상대의 얼굴에 들이대는 장난도 하지 않을까? 그러한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보여주고, 그것이 다시 6년째 연애중이라는 특수성의 대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6년째 연애중>에는 그러한 시간의 퇴적에서 오는 두 사람의 감정 상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위에 슬몃 얘기한 것은 컨셉에 맞게 상상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사실 정말 보편적이지 않은 주거형태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6년이라는 시간을 연애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6개월 전에 곁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나란히 살게 된 두 사람이 가진 과거와 그들의 이야기는 좀 더 날카롭게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는 정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1년만 연애해도 다 겪게 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6년쯤 연애를 하면, 상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익숙함이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철학도 바뀌는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것을 반영하기는 커녕, 90년의 감수성과 그 상식으로 90년대적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연인을 그려낼 뿐이다. 그러면서 21세기의 관객에게 공감하고 이해받기를 강요한다. 이 쯤되면 좀 뻔뻔한 거 아닌가?

2. 연애의 진보성? 보수성? 설득되지 않는 21세기적 봉합!

수많은 커플들이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있다. 왜냐고? 배우자 혹은 연인의 바람끼 때문이다. 보통 바람이란 걸리기 전에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걸리지 않는 바람이란 너무너무 적어서 정녕 걸리지 않고 바람피우는 사람은 거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21세기에 들어서 연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또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진과 재영은 모두 다 바람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보수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에 관한 문제도 캐릭터에 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다진도, 재영도 굉장히 밋밋한 캐릭터들이다.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특이점을 보이기 보다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 즉 외연에서 비롯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수준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물들에게 어떤 강력한 행동력을 기대하는 것도 분명 무리수다. 강철중도 아닌데...

그래서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물들의 욕망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작은 욕망들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인물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돈에 대해서 강한 동인도 없고, 각자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들을 적극 수용한다거나, 하룻밤에 충실한 리비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연인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지도 않는다. 아... 그렇다면 그들의 옅디 옅은 감정의 굴곡을 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작은 지점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영화인데, 그것들은 위에 얘기했다시피 피상적으로 넘어간다.

연애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냐 아니냐, 또는 일부일처주의자나 아니냐를 놓고서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라고 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느 정도 비약이 있을테니. 하지만, 분명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렇다면 캐릭터들의 행동들에서 얘기하는 진보성, 보수성이 아니라 감독이 연애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냥 애매모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영화의 결말부분에 가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클라이막스에 가면 그들은 분명 헤어진 것이다. 6년째 연애중이라는 제목에서 예견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 말의 이면을 들고서 구성한 클라이막스다. 결국 재영은 다진의 언어(빠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재영은 여전히 뻔한 이야기(랑그)를 반복한다. 끝내 다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영역을 돌아보는 것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연애 영화의 전형성이고, 보수적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다시 에필로그에 가서 더욱 어이없어진다. 각자 이웃해 살던 집을 정리하고 다시금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이는 정녕 아이러니다. 영화는, 감독은 이것을 필연 혹은 숙명적이라고 표현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녕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랑그를 앞세워서 얘기한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 헤어져야 한다. 결국 소통되지 않고서 각자 발걸음을 바꾸어서 간다. 걸어가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도착하는 문자메시지!!(이것도 정녕 편지인가? 제 때 도착하는 편지!!) 그리고 그 안에는 둘이 행복했던 시절에 주고 받았던 이야기와 둘이 못내 그리고 싶어했던 곱게 늙은 커플의 사진이 담겨있다. (아 얼마나 21세기적이고, 새로운 기술의 위력인가!!) 이것 한 방으로 그동안에 멀어졌던, 이해하지 못했던 크레바는 순식간에 봉합되고, 뒤돌아서 뛰어온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한다. 정녕 21세기적이고도 순식간에 강력한 드라이아이스 분무식의 봉합이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날카로운 메스를 담고 있다. 수술을 너무 급하게 끝낸 나머지 메스를 미처 꺼내지 못하고 봉합해 버린 거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앞으로 몇 년을 연애 중‘일’지도 모른다. 아주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정녕 사진속의 늙은 커플 처럼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단기적으로 내일은 만나고, 혹은 이번에는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것을 충분히 읽어내고서 모호한 결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본 분석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최근 다니고 있는 카페 더 블루스의 커피미팅 후기임을 미리 밝히며..
(싸이 클럽에 썼던 가벼운 소감을 그냥 긁어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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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팅 후기는.. 다들 영화만 보고 스르륵 가시는 바람에.. ㅜ.ㅜ
소심한 저로서는 말도 잘 못걸고 그러는 터라..
(정말로 소심한거에요.. 낯가림 없는 듯.. 있는 거에요. ㅡㅡa)

영화 시작전, 정말 생크림같이 곱게 부푼 카푸치노로 속을 데워주시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정면 보기"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좌석인지라..

뭐 언젠가는 재미난 뒷풀이도 할 날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카페 뤼미에르>라는 영화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작품이구요.
어제 영화 초반 크레딧을 기억해보면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면 기념작품'이라는 자막이 있었죠.
말 그대로 입니다.

오즈 야스지로라면,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감독중의 한 명입니다.
어찌되었든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영화답게 처음에 나오는 제작사 크레딧도 옛날 걸로 붙여놨지요
(이것 역시 기억하시면 좀 옛날그림 풍의 후지산 그림밑에 松竹映畵라고 쓰인 걸 보셨을 겁니다. '쇼치쿠 영화사'의 로고입니다.
물론 옛날 거에요. 일부러 옛날걸 붙인 듯...^^ 오즈 야스지로가 쇼치쿠에 소속되어 작품활동을 했구요. 이 영화도 쇼치쿠에서 만들었어요)

허우 샤오시엔 역시 현재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감독입니다.
1947 년생일거에요. 저의 아버지뻘 세대인데요. 대만 출신이고, 에드워드 양(양덕창)과 더불어 80년대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이끈 감독이구요. 그 이후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대단한 감독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최근작 <빨간 풍선>은 프랑스에서 제작하여 스폰지에서도 2월에 개봉할 예정이랍니다.

간단한 내막소개였구요.
처음 보시는 분들은 조금 의아할 영화들입니다.
저 역시 그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끝도 없는 지루함에 미칠것 같았죠.
하 지만,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여태껏 봐왔던 영화들 (드라마, 스토리가 강하고 볼 것 가득한 영화들)이 양념을 가득히 해서 막 담근 남도식 김장김치라면, 그의 영화는 대충 살짝 간을 해서 물이 가득하게 만든 평양식 백김치 같다면 비유가 될까요?
간단히 말하면 그냥 다른 맛일 뿐입니다. 김장 김치와 백김치간에 어느것이 더 우월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 하겠죠?

저로서도 실은 <까페 뤼미에르>를 3번째 본 겁니다.
처음엔 끝도 없이 잤구요.(그의 영화를 자꾸 보아도, 여전히 처음에는 자꾸 잡니다. 남도김치에 익숙하면 백김치가 맛이 없거든요.)
2번째는 본 게 사실 처음 본거나 다름 없구요. 어제가 3번째인데... 엄밀히 2번째라고 할 수 있을 듯.

보는 와중에 혼자서 키득거려서 방해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뭐랄까 '감자조림'만 나오면.. 그렇게 재밌을수가 없어요.
요코와 엄마(계모라고 하지만, 실제 계모들이 그런정도 아닐까요? 신데렐라의 계모나 팥쥐엄마는 오히려 잘 없을 듯), 요코와 아버지 사이의 답답한 듯, 정말 우리와 비슷한 모습들을 보다보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애정가득한 시선이 가게 되구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법과도 같은 장면, 이 한 장면을 위해 13일을 찍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 지하철 장면, 하지메(아사노 타다노부)가 녹음을 하고 있는 장면이 건너편의 지하철에서 보이다가 카메라가 그걸 따라 이동해서 보면, 이쪽 지하철 안에 요코가 외로이 서있는 장면. 그 장면을 제일로 좋아했어요.
그 자체로 영화가 주제를 함축하고 있고, 거의 마법같은 장면이라서요.
그런데 어제 보면서는 요코가 아버지 집에서 자다가 밤에 기어나와서 야식을 챙겨먹고, 엄마가 따라나와서 곁에 앉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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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니 이 장면이 더 좋다.


밥 먹는 와중에 엄마에게 '나 임신했어'라고 하는 장면. 그 전체 씬을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감자조림을 좋아하는 요코의 마음을 잘 몰라서, 혹은 준비를 못해서 썰렁한 모녀관계. 그런가 하면 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
야식먹는 딸의 곁을 지켜보는 엄마.
낮 에는 안먹고, 밤에 일어나서 야식을 먹으려는 행동들. 피가 통했나 안통했냐의 느낌도 있지만, 따로 나와살던 자식이 오랜만에 집에 가면 참 이상한 느낌이 있잖아요. 이게 우리집인지 아닌지... 맞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이 영화 안에 그런 게 잘 드러나 있어요.

요코와 하지메간의 관계도 마찬가지구요.
둘 사이에 어떤 로맨스를 기대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로맨스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굉장히 열정적이거나, 서로간에 관계설정에 열을 올리는 데이트가 아니라서 그렇지.
둘 간에는 어떤 신뢰같은 게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도시의 소음과 소리들을 저장하는 하지메의 모습이 왠지 친근하거든요.
소음 자체는 싫어하지만, 도시의 소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왠지 아득함이 있어요.
만약에 하지메 처럼 누군가 소음을 녹음해서 계속 저장해둔다면, 그 소음은 언젠가 소음이 아니라 특별한 소리가 될 거에요.
얼마전 김포공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김포공항을 들어가니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았거든요. 왠지 80년대의 느낌이 가득한 곳.
그런 것 처럼 하지메가 녹음한 소리들은 그런 시간성과 공간성을 담아내겠죠.
이는 다시 허우 샤오시엔 감독만이 가장 잘 찍는다는 '철도장면'들과도 연결되요.
그의 영화에는 빠짐없이 '철도', '기차' 등이 등장합니다. 그의 철도장면들은 이상스럽게 정서적으로 충만해요.
감히 도전해보고 싶지만, 너무 아득한 경지에 있는 장면들이죠.

뭐.. 두서없이 몇 마디를 적어본 거에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잘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ps. 어제 보면서 느끼는 건데, 허우 샤오시엔의 화면에서 '등'을 찍는 장면이 많아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도 인물들간에 관계가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사실 보통 영화에서는 등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