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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다라본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6.30 [이바구] 촛불정국와 영화<미스트>.
  2. 2008.01.12 [리뷰/미스트] 불안의 씨앗은 수퍼마켓에 뿌려진다. 4
6월 28일의 촛불 시위는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단어를 넘어서는 끔찍함의 날이었다.
어찌되었든, 이제 더이상 정권이라는 저들, 공권력이라는 이름은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참여연대 1층에 마련되었던 국민대책회의 사무실을 압수수색(!)까지 저지르고 있다.
간단히 말한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모르는 거다.
멍청한 존재들이다.
자신이 움직이는데 어디로 왜 움직이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존재야 말로 downer cow인 셈이다.
언제들 그렇게 일찍 미쿡소를 즐쳐드셨는지.. 잠복기도 좀 빠른듯 하다.

29일 광화문 우체국 앞에서 시위를 지켜보았다.
(물론 머릿수 채움의 '참여'이지만, 왠지 난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10일에 진보신당 칼라TV 자원활동을 해본 인연으로, 왠지 칼라TV 근처에서 뭔가 도울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런 탓에 그냥 그곳에 자리를 잡고 계속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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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8시쯤 시청으로 도착해서, 시의회 앞을 지나, 프레스 센터쪽을 통과, 청계천 이상한 소라쪽으로 해서 종로까지 간 것이었는데..
이미 물대포와 소화기는 시작되었다.
뭐랄까. 이 쯤되면, 공성전인 셈이다. 닭장버스 뒤에 무엇이 있는 지 궁금해지는 거다.
그뒤에 앉은 놈은 뭐하는 놈이길래, 맨날 거짓말로 고개 숙이고, 돌아서서 하는 소리는 '불법시위 엄단', '배후세력 축출' 등등의 쥐소리인가.
그러니깐 쥐새끼 소리를 듣는 거다.
그런데 이 외계의 쥐는 이러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행위에 더욱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나보다. 하긴 그런식으로 현대건설을 끌어왔고, 서울을 망가뜨렸지.

어디보자. 그런데, 이 상황은 묘하게도 영화 <미스트>와 닮아 있다.
이 날의 상황은 미친듯이 뿌려대는 소화기와 물대포 때문에 완전히 자욱한 안개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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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촛불시위를 하고 있는 시민들은 이러한 재난(!)에 맞서 싸우고 있는 거다.
몇가지 유사점을 얘기해보자.

영화 <미스트>의 재난은 과학자들의 실수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는 이미 자연에 대한 도전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결국 한국 사회로 들어올 미쿡소는 단순히 먹거리의 광우병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죽은 소의 뼈를, 혹은 다른 가축들의 뼈와 내장을 버리기 아깝다고 갈아서 사료화해서 만든 자연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 버린 과학자들은 바로 우리가 실수로 뽑은 이명박 정권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위와 같은 안개를 만들고 있고, 시민들은 그 안에서 살겠다고 발버둥치며 싸우는 거다.
<미스트>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시민들이다.

이날 시위에서 결국 바리케이드인지 차원의 문이지 모를 줄줄이 버스사탕(아 맛없겠다.)을 끝내 끌어서 돌려낸 시민들의 상황. 사실 시민들은 정말로 순진하다. 무언가 진출을 하겠다고 버스를 흔들었고, 끝내 그것을 열었지만, 그것을 열었던 순간은 '와아~~'하는 함성이 다 였다. 함성 뒤에 아주 잠시의 공백상태. 아무도 어떻게 해야하는 줄 잘 몰랐다. 말도 안되는 짓거리로 길을 막아서 뜯어내긴 뜯어냈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그런데 이내 상황은 돌변했다. 차원의 문을 뚫은 것 같은 이 곳에서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내던 녀석들이 저글링을 하며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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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이 11시 54분 되시겠다. 뜯어낸 직후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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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가 11시 55분 되겠다. 놀랍지않은가?


단 1분 만에 저글링해서 나오는 이 갑각류크리쳐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나왔고, 바로 대오를 갖춘다. 기자가 아닌 터라 이 이후에는 갑자기 치고오는 의(!)경들 덕분에 무서워하며 뒤로 빠졌다.
이 상황직후, 강경진압을 바로 시작한 의경들은 집히는데로 아무거나 다 던지며 다가왔고, 사진 왼편에 계신 칼라TV 카메라맨은 소화기에 머리를 맞고 찢어지는 큰 부상을 당하셨다.

의경들의 헬멧과 장구류, 소재들을 보면, 밤 조명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정말로 무슨 벌레가 가득한 것 같다. <미스트>에서는 차원의 문이 열리고 쏟아져 나온 안개 속에서 이상한 갑각류 크리쳐들이 날아들어서 인간을 공격한다. 고스란히 지금, 2008년 6월의 한국에서 실사판으로 재현되고 있다.
본 사람을 알겠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스트>는 2008년 1월 첫 외화로 개봉을 했고, 나 역시 그 영화를 극찬한 바가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목적은 단순히 영화 <미스트>와 한국의 현실이 묘하게 닮아있다.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단순한 모양새의 비교는 말 그대로 아이러니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지적해서 찾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미스트>와 비교할 지점은 바로 이제부터다.

다들 가보면 알겠지만, 시위장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들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거대한 재난 앞에선 연합군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강경진압 후, 그냥 얌전한 대치 및 소강상태에 이르면, 대오 안의 의경들에게 아저씨들이 '형'이랍시고, '삼촌', '아버지'뻘이랍시고 반말로 자극하는 경우를 꽤나 자주 볼 수 있다. 아.. 동방예의지국이라서인가? 어찌나 그렇게 나이값들을 열심히 하시는지.

음, 자꾸 이야기가 샌다.
아무튼 이토록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있어서 참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것은 고스란히 <미스트>에서 수퍼마켓 정국으로 비교된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고립후 처음으로 등장해서 아이를 찾으려 가야한다는 엄마이다. 이 엄마는 자신의 자식들이 집에 남겨져서 기다리고 있다면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주인공을 비롯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돕지 않는다. 물론 그만큼 외부의 안개는 두렵다. 나가면 죽을것 같은 곳이다. 영화는 이것을 매우 작은 에피소드로 얘기하지만, 그 여파는 정말로 영화의 모든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 보호를 핑계삼아서 수퍼마켓 안에 남는다. 즉, 주인공은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셈이다. 결국 집에 남은 그의 아내는 시체로 발견된다. 막연한 희망은 절대로 밝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법이다. 세상일 중에 어떤 것은 분명히 all or nothing이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절망하여, 갖고 있는 권총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 죽이고, 자신만이 혼자서 이 지옥을 견뎌내려 한다. 그러나 이내 곧 군인들이 등장하고, 점점 사태는 진정에 이른다. 이때 군용트럭에 실려가며 주인공을 보고 가는 이가 있으니, 바로 처음에 자식들에게 간다던,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여자다. 그녀는 그 덕분에 모두(all)가 살아남았고, 주인공 남자는 남은 가족이 없다(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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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표정은 뭐라 할 말이 없다. 영화를 보다가 이 장면이 되면 정말로 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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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울부짖어도 때는 늦었다. nothing.


자 이 지점이다.
결국 영화의 인물들은 우리와 다름이 없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는 명백하다. 중요한 것은 '가치'이다. '효율' 혹은 '효용', '실용'이 아닌 게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분열이 있을 수 밖에 없다면,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보자. 주인공은 자신의 효율적인 선택에 대해서 자각할 수 있을까? 물론 있다. 바로 그 여자를 만나는 순간에 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늦다.
효율적인 선택이란 결국 자신안에 들여다보기 싫어하는 속물성과 다름없다. 결국 이명박을 뽑은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에게 무언가가 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뽑았고, 그에게서 실제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계급은 정녕 대한민국 1%이다. 자신이 1%가 되기를 원했거나, 그래도 무언가 콩고물이 떨어질거라고 생각한 사람들 중에서 지금 이 촛불정국에 동참하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머릿수는 중요하다. 그러나 내적인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 여전히 부화뇌동하면서도 가장 늦게 움직이는 사람들, 마지못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얼른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여 깨쳐야한다. 자기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어물쩡 넘어가려 한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촛불로 광장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 안에 촛불을 집어넣어서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을 밝히고, 꺼내서 깨끗하게 불살라야 할 필요가 있다.


뱀발1.

그리고 이 게임은 소고기와 FTA를 따로 떼어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도 결국엔 All or Nothing 게임이다. 순진하게 소고기는 문제가 있어도 FTA는 해야한다라는 식의 생각은 결국 NOTHING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전법이 아니라, 주성영같은 똘추들이나 하는 생각이고, 저열한 방법론이다.


뱀발2.
영화는 함의와 관계없이, 한국사회의 몇십년 후의 모습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결국 내가 현재 작업하고 있는 영화 <고기 도시>도 결국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다.
가장 안쪽의 싸움을 이겨야만, 가장 바깥의 싸움에서 이길수 있다.


예고편보다는 스티븐킹과 프랭크 다라본트의 3번째 만남이라는 것에 훨씬 기대를 했고, 결국엔 극장을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난 그게 이번주 개봉인줄은 몰랐다. (개봉일 따위가 무어랴.. 왠만해선 영화에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요즘은 개봉일이 언제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영화를 그냥 보는 편이다. 무취향!)

고등학교 2학년이었나... 천호동의 한일시네마라고 당시에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나름의 2관짜리 멀티플렉스였고,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서 극장에서 본 영화가 바로 <쇼생크 탈출>이었다. 어렸을 당시에 그 영화는 왠지 강한 인상을 주었고, 심지어 삶이 지옥같았던 군 생활에 나의 수첩에는 그 영화의 주요한 대사이자, 카피인 "Fear can hold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라는 문장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렇게 만났던 다라본트 감독이다.

SOMETHING in the Mist!!!!

SOMETHING in this Film!!!!!!!!!!!!!!

영화의 줄거리는 하등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다. 영화 포스터 그림을 그리는 데이빗은 어느날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에 집이 난장판이 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들과 같이 생필품을 사러 읍내에 나온다. 그전날밤의 사고로 인해 읍내의 마트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있다. 그런 가운데 동네의 한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면서 마트로 뛰어들어온다.
"SOMETHING in the Mist!!"
순식간에 덮쳐오는 안개를 두고서 사람들을 자연히 마트안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견제하고 싸우고, 죽여나가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결말은 과히 충격적이다. 이 결말을 놓고서 Film2.0의 프리뷰는
원작과는 확연히 다른 결말을 택하고 있는 영화의 결정은 상당한 의아함을 남긴다. 소설이 열린 결말을 지향하며 희망도 절망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현재의 암울함을 끈적하게 이어나가고 있는 데 반해, 영화는 훨씬 더 충격적인 결말을 택한다. 그러나 파국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결정에 대해 쉽게 납득할 만한 근거도 마련되고 있지 않거니와, 이어지는 상황 종결은 관점에 따라서는 헛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라고 적고 있다.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좀 더 재미나고 의미있게 보는 법은 헛웃음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둔다. 극장에 가서 꼭 볼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플롯상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분위기를 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유를 어떻게 범주화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거대한 공포를 근간으로 하여 중요한 인물들을 (자본주의의 전시장이자, 전쟁터인) 마트로 몰아넣는다. 아니 엄밀하게 보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떠한 공동체 혹은 집단, 직장 또는 반대로 물리적인 건물, 광장, 공원 등에서 어떤 부분을 딱 택해서 수십명을 뽑아내더라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영화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곳이 다른 곳이 아닌 '마트'라는 곳이다. 그곳은 언제나 풍요롭지만, 한편으로 상품들은 언제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수많은 캠벨 수프 캔들이 간택되어지기 위해서 항상 제일 앞에 나오려 하고, 그것은 결국 영화를 다보고 났을 때, 그 안에 수많은 인간들과 다를 바없다. 아니 그 인간들이란 결국 하나의 캠벨 수프 캔과 다를 바가 없다. 어찌되었든 영화는 마트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균열이 드러난다.  그것은  여러가지 양상을 가진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계급적 갈등,  외지인과  현지인들사이의 지역적 갈등,  젊은이와 나이든이 사이의 세대적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인과 비종교인(혹은 광적이지 않은 종교인)사이의 원형적 갈등(이는 분명 종교적 갈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어찌되었건 주인공 데이빗을 근간으로 그 Something을 확인한 사람들은 공포감을 갖게 되고 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대처하려고 한다. 이 가운데에 주된 갈등이 원형적 공포를 주술적으로 풀어내려 하는 카모디 부인(마샤 게이 하든)을 중심으로 풀려나간다. 이 때 부터는 영화는 외부의 공포를 내재화 시켜서 사람을 선동 혹은 다스리려 하는 보복의 기독교같은 중세적 커뮤니티와 이성적 사유를 중심으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는 근대적 커뮤니티 사이의 전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했을 때는 오히려 영화가 시대에 너무 낙후되어 보이지 않느냐라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이다. 21세기는 여전히 중세와 근대가 계속적으로 진행중이다. 심지어 기득권을 위해서 언제나 공포 혹은 두려움을 '발행'하는 행위들이 서슴치 않고 일어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보고 있으면 그렇다.
그러나 결국에 영화는 한쪽을 선택해서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내러티브적 한계성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데이빗을 위시한 무리들이 과연 이 곳을 벗어나서 살아날 수 있느냐 라는 부분이다. 즉, 다시 말해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마무리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영화의 2/3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갈등의 전개양상에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마트를 벗어나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과연 가장 바깥의 세계 또는 신의 눈에서 그들은 어디로 향할 수 있을 것인가? 기름이 다 될때까지 달려보자고 해서 나갔고, 혹시나 그들을 덮칠 두려운 생물체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끝내 챙겨온 권총의 그 트리거는 어떻게 쓰일 것인가? 이 결말은 정말로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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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든 '마녀'같은 카모디 부인(마샤 게이 하든 분)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중심점은 말 그대로 이 시대를 은유하고 재현해내는 지점이다. 한 집단에 커다란 숙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두고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다시 그것이 어떤식으로 커뮤니티를 분화시키고 그들은 어떠한 갈등양상을 전개하며, 해결해가는가를 잘 들여다 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단선적이지 않고 다층적임을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마트를 하나의 국가 혹은 집단에 위치시키고, 카모디 부인을 굉장히 보수적인 집단에 대입하고, 데이빗을 조금 진보적인 성향으로 사람으로 위치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다. (물론 이 하나의 범주화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미국 사회의 현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현실에 이 영화를 병치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소소한 대표성들을 찾는 것 또한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상품들간의 경쟁은 다시 마트안에서 인간들 간의 경쟁으로 대치되고 은유된다. 또한 그 분화된 집단 혹은 조직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결말이 뻔히 보이기 까지 하다.(이 부분에서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 '경쟁'을 강조하는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엔 커다란 "SOMETHING"이 존재하는 마트 바깥 = 개미지옥 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고, 거기서 살아남는 방식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쳐밀어넣는 것이 아님은 분명할 진대, 카모디 부인은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상황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제물을 찾아나설 뿐이다. 마치 기업의 구조조정, 혹은 한국 사회에서 비리가 터졌을 때 그 기관의 장이 사퇴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데이빗을 중심으로 한 집단의 이성은 역시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데에 아주 좋은 수단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가야 하는가를 합의를 통해 도출해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까지는 이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끝내 결말에 가서 배반을 당한다. 글쎄 감독은 무슨 생각인걸까? 결국에 이성 혹은 감성에 절대적 힘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인가?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헛헛해 하거나, 심지어 분노를 하거나 혹은 악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은게 미리 내리는 결론이다.
결국 영화에서 가장 멀리 벗어났을 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수단으로써의 이성과 절대 버리지 말고, 지켜야할 가치로서의 감정을 같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설의 결말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멘트라고 한다. 그것은 '희망'이라는 추상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것을 영화적으로 변주해 낸 결말이지, 이것을 두고서 영화와 소설이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좀 미흡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별점 : ★★★★★

뱀발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잡생각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크리처들은 어디서 왔을까? 사실 다른 영화들을 만들면서 그려진 수많은 스케치들을 모아서 여러 사람들에게 가장 무섭거나 징그러운 것들을 골라보라고 해서 선택한 것들을 아닐까 하는 잡생각.
왜 인간들이 두려워 하는 괴물 혹은 외계 생명체들은 갑각류와 비슷한 걸까. 혹은 곤충과 비슷한걸까? 인간은 키틴질이 아닌 soft한 피부를 갖고 살기 때문에 단단한 갑옷 같은 피부를 가진 생명체에 대해서 원형적 공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일리언, 에일리언 마스터, 프레데터, 프릭스, 스타쉽 트루퍼스 등등)
영화에는 다양한 크기의 생명체가 나온다. 마치 거미를 형상화한 녀석들. 그 작은 것들과 영화 말미에 나오는 공룡보다도 거대할 것 같은 절대적 크기의 거물. 그런가 하면 최초로 등장한 연체류의 촉수와 벌침을 합쳐놓은 생명체 등등등.
한편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에게는 이름이 있을까? 뭐 영화를 만들면서 부르는 이름은 있겠지만, 영화상에는 누구도 그것을 불러주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알 수 없다. 언뜻 극장에서 보았던 D-war의 크리처 중의 하나인 '불코'가 떠올랐다. 그건 뭐하러 이름을 붙이고, 굳이 불러주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외형적 디자인 같은데에서 어떤 맥락들이 있을까?

마샤 게이 하든의 연기는 정말 끝내준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 역시 그녀의 종으로써 움직여야 할 기분이 든다. 그녀가 가진 분위기는 맹목적인 느낌이 있다. 그녀는 잭슨 폴락의 전기 영화인 <Pollock>에서 폴락의 연인이자 정신적 지주로써 등장했고, <미스틱 리버>, <밀러스 크로싱> 등의 독특한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배우이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