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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된다!

다들 많이 들어 본 얘기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혹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태도에 따라서 이 문장은
체념적으로 들리기도, 강렬하게 들리기도, 가치중립적인 느낌으로 들리기도 한다.

뻔하게도 역사는 단순히 한 민족, 국가 안에서 되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간을 옮기고, 또 거기서 시간을 옮겨서 다시 되풀이된다.
일단 이유는 차치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앞뒤 정황을 얘기해보자면...

<존 레논 컨피덴셜>.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틀즈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존 레논의 독보적 행보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단순히 '반전운동'을 했다는 행적으로 나름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레논은 낯선 존재이다. 언제나 남의 나라의 위인들은 '일화'로써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비틀즈의 입장에서는 60년대 말,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멤버들간의 불화 및 음악 노선의 변화로 이미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오노 요코가 있다. 그리고 존 레논은 일단 요코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로서의 도약을 한다. 68년도를 거치면서 전 세계는 이미 들썩들썩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베트남전은 발발했다. 20세기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 사회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존 레논을 낳았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냉전의 대리전으로써 진행된 베트남전 시기에 요코와 레논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 사이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단 하나 '평화'다.
이미 비틀즈 시기에서 거침없는 발언을 하곤 했던 레논. 세상은 연예인 조차 가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요코와 신혼여행을 아예 '침대 시위'로 변모시킨다. 수년간 대중의 우상으로써 군림한 레논은 그에게 가해지는 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를 적극 이용해서 세상에 거침없이 '평화를 택하라'고 소리친다. 그들의 침대 시위는 정녕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미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찾아온 미디어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며,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다름이 아니라, 레논과 요코가 전 세계 11개 도시에 "War is over"라는 짧고 굵은 메시지를 닮은 포스터를 붙였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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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메시지를 붙였다.
자세히 보면(아니 대충 봐도) "if you want it /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라고 적힌 이 문구.
TV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는 그 포스터를 붙이는 작업의 돈은 어디서 나와서 쓰냐고 묻는다. 레논은 당당하게 '지금은 우리의 주머니(pocket)에서 나온다'라고 대답한다.
어떤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레논과 요코는 자신들의 돈을 털어서 11개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저 메시지를 뿌리고 있었다. 저 메시지를 읽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이 바로 "John & Yoko"가 원하던 당신(YOU)이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미국 내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극도의 패권주의자였던 닉슨과 그의 공화당. 한편 존과 요코는 공화당의 전당대회를 따라 다니면서, 그 곁에서 평화콘서트를 주최한다. 한편, FBI국장이던 에드가 후버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한다. 흑인들의 급진당이었던 블랙팬더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인권 운동을 주창한다. 그러는 가운데 마틴 루터킹은 암살을 당한다. 이러한 장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72년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존과 요코는 절대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계속한다. 백악관 주변에서 반전평화론자들이 촛불시위를 펼치고, 닉슨은 촛불시위를 축구경기 구경하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지저분한 방법으로 존과 요코를 추방하려 한다. 체류 비자를 연장해주지 않음으로써 강제 추방을 하려고 하지만, 존과 요코는 이에 대해서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수년이 걸리는 사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고, 존과 요코는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한다.
이후 영화는 투쟁에 승리한 존과 요코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잠시 이어간다. 결국 80년 12월 9일 데이비드 채프먼에 의해 권총 암살을 당하는 걸로 생을 마감하는 존 레논.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영화를 보면서 섬찟한 것은 이 역사가 고스란히 2008년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닉슨은 이명박, 에드가 후버는 어청수, 베트남전은 쇠고기 정국, 미국의 보수기독교는 한국의 보수기독교, 반전행동의 촛불은 시청앞 촛불, 관련한 수배자들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은 2008년 한국에는 '존과 요코'가 없다.
앙꼬없는 찐빵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불만이 아니라 일종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존은 <Happy Xmas (war is over)>, <Give peace a chance>, <Power to the people>, <Imagine>, <Love> 등의 노래를 만들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고, 민중들 역시 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더욱 힘을 모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우리에겐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노래가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대칭항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윤민석 이라는 민중가요 작곡가가 만들었다. 이 노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다름을 얘기하는 것이다. 존의 노래들은 메시지도 강렬하지만, 존 스스로가 원래 대중가수였고, 그의 의식이 발전하여 예술가가 되었고, 다시 사회참여로 이어진 경우인 거다. 그가 가지는 파급력은 단순한 호응과 집결을 넘어서, 예술적 승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힘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레논의 노래를 부르면서 정치적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의 힘에 감복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정말로 "If you want it"라는 말을 보고 어떻게 원하지 않겠는가? 전쟁이 정말로 끝나기를 원한다면, 노래를 부르면서 옆사람의 손을 잡고, 군인들의 총부리에 꽃을 꽂으면서 '사랑'으로 감싸안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존과 요코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어떤 분야의 누군가가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또는 준비한다고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나라의 문화가 결국에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여 '존과 요코'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일 뿐이다. 좀 더 다르게 얘기해봐도 그래봤자 수많은 '예술가'들의 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안에서 어떤 영웅을 만들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잘못 택한 길이 될 거라 믿는다.

존은 스스로가 이렇게 노래한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
from <Imagine>
간단히 말하면, 함께 하자, 연대하자 쯤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나도 친구이고 평등한 관계로서 인간의 본연한 마음으로 만나서 함께 하자는 거다. 패권 따위일랑은, 나만이 잘살겠다는 욕심일랑은 버리고 같이 살자고 말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말그대로 당신이 원하면...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된다.

서글픔만을 따져서 본다면, 분명 우리는 아직 '존과 요코'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산 '존과 요코'를 만들거나 기다릴 것인가라면 그건 아닌것 같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일단 이 영화를 보고, 존과 요코의 노래를 듣고 생각해보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서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하는 거다. 진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해야할 일은
저 위의 사진...
마지막 줄에 쓰인 "Happy Christmas from John & Yoko" 옆에 당신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다.


<Give peace a chance>
처음에 나오는 장면은 존과 요코가 침대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호텔방에서 콘서트를 하는 장면이다.
뒤에 'Hair Peace', 'Bed Peace'라고 쓰인 문구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자신의 자료화면을 내보낼때 'PEACE'라는 문구를 꼭 내보라고 했다.


<Happy Xmas (War is over)>
존과 요코의 메시지의 마지막에 우리의 이름들을 적어놓고 전세계를 누비는 투어를 시작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피스보트가 출발한다면, 나의 이름을 같이 적어주기를.. 그 피스보트에 붙일 메시지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꼭 선물하겠다.


<Love>
존과 요코의 사랑인 듯 하지만,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래서 강렬하다.
우리의 이야기다.



<Power to the people>
민중에게, 시민에게 권력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촛불을 꺼트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나가자구요.
대한민국의 '존 레논'은 어떤 사람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일단 당신의 마음에 있구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서로서로 보여주고 나눠주고, 더욱더 키워나가면 그 곳에 '존과 요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슷한 사람도 나오리라 믿습니다. 순진한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ps.
또 다른 혁명영웅이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한마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존의 노래 <Imagine>의 가사와 놀랍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다.

뭐랄까 체와 레논은 만난적이 있을까? 어찌되었건 천상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만났겠지.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ps2.
영화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 칼 번스타인은 <힐러리의 삶>의 저자이며, 닉슨을 하야 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대우자동차 CF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통령의 음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인물이다.
그외에 노암 촘스키, 타릭 알리, 월터 크롱카이트 등도 인터뷰이로 나온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영화도 보고, 더 찾아보는 기쁨을 누리기를..



11월 4일. 영상자료원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프로그램.
글쎄, 일부러는 아니었는데... 다니다보니 독립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사실은 내 안에서 이미 뭔가 '다른' 것들을 원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지도.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속에 남는 이상한 이물감들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든다.
글도 못쓰고, 이러한 잡스런 글조차 다시 고쳐쓰는 버릇이 없는 나에게는 글쎄올시다.
이러한 글이 나에겐 일종의 "즉흥연기"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적 문제를 뱉어내고 남는 것은 차가운 이성의 사유일 것이다.
영화적 윤리? 윤리의 영화??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쟁점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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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이미지가 없어서.. 일단 옛날거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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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하여 - 어부로 살고 싶다]
2006|Documentary|DV|Color|75min
감독 이강길



1. 활동가로서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로서의 활동인가?

이 영화에서 화자의 태도는 굉장히 뜨겁다. 선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끓어넘치기 직전에 냄비 만큼의 온도를 갖고 있다.
누군가의 통곡하는 모습을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누구를 향해서, 무엇때문에 저토록 섧게 울고 있는가? 의문을 갖게 한 후 그것에 대한 답을 계속 유보한다. 그 답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다.
이후 물이 막혀서 말라가는 갯벌의 모습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마치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비슷한 체험을 가져온다. 그리고 말라가서 갯벌에서 기어져 나오는 동죽, 생합(조개류)들. 그것의 모습은 일순간 우리가 자연에게 어떠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인간으로 포커스를 옮겨온다. 계화도의 아침을 보여주면서, 분주하게 일을 준비하는 주민들을 따라서 우리는 계화도, 새만금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부로 살고싶다>는 3부작 연작의 제 3부격인지만, 각각은 독립된 주제를 갖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안을 관통하는 어부들의 삶과 인간다움에 대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토록 조용했던 계화도는 이제 물로 나가는 어부들과 갯벌로 채집을 나서는 사람들로 나뉘어져서 묘사된다. 그러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조제의 물막이 공사를 보여준다. 어찌보면 단순한 진영나누기? 이야기는 쉽게 펼쳐진다. 이른바 공사하는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계화도 주민들로 이분해서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대책위원회가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제도측을 오가면서 대화창구를 마련하고 작은 갈등들이 펼쳐진다. 물막이 공사가 점점 마무리를 향하고, 대책농성을 하던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이제 점점 힘든 싸움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여기서 이어지는 큰 문제는 주민들 내부에서의 갈등인 셈이다. 보상을 제대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과, 원칙적인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 그리고 마지막 공사를 앞두고서 해상시위가 이루어지고 거기서 언론들 앞에서 나서 인터뷰를 한 대책위원장은 결국 주민들의 의사를 모두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은근슬쩍 보상에 대한 말만을 언급하면서 내부적 갈등은 심화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장 뜨거운 화자가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는 감독은 가장 이질적인 형태로서 영화에 개입해서 들어온다. 느닷없이 영화를 만든이가 이야기에 참여해 올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선 느낌이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보면 낯섬보다도 델 것 같은 뜨거움이다. 하지만 끝내 영화안에서 인터뷰 장면을 돌려서 대책위원장의 거짓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인간적인 윤리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언제나 최전선에 있다. 각종 시위장면, 혹은 농성장에서 갈등의 가장 깊은 간극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담아내고, 이른바 자신이 있는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 자체가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편에 강하게 달라붙어 있다. 정치적인 활동!
그리고 이후 점점 남성들 사이에서 지쳐가는 싸움의 흐름은 여성들에게로 중심이 옮겨간다. 실리보다도 언제나 명분을 정확히 내세운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반박할 논제가 없다. 산자부의 사람들도 그녀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고작 '추운데 고생하시지 말고 이쪽으로 들어오셔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담당자들도 나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내부적인 분열과 이른바 중요한 순간에서 지지의 힘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결국 새만금 방조제는 마지막 트럭을 쏟아붓고야 만다. 그리고 펼쳐지는 태극기들. 이젠 태극기가 오염된 듯 하다.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새만금 간척 사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앞두고, 방조제가 완성된 그들의 기쁨이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어찌되었든 그들에게 갯벌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안에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발'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고, 기득권들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시 된 개발은 결국 또다시 태극기를 '전유'한다. 그 누구의 태극기인가? 효순이 미선이가 죽어가는 동안에 휘날렸던 붉은악마들의 태극기와 같은 태극기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가 하더니, 영화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류기화'씨의 죽음. 게다가 그 죽음마저 동죽들의 운명과 별다를것이 없다. 잠깐씩의 해수유통을 위해서 설치한 수문에서 어느날 갑자기 쏟아진 물에 휩쓸려 맞이한 죽음. 여기서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감독은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태도를 등장하는 이들과 삶을 합치시키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이루어낸 성과가 내부의 작은 균열들, 그리고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다시 새만금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 영화는 분명 활동가의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1차적으로 정서적인 문제에서는 성공적인 이야기전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좀 더 영악하게 활동으로 이어지는 문제는 다르게 생각해봐야 한다.


2. 객관화해서 더 들어가야할 영화

이 영화는 사실 앞서말한 화자의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는 영화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오히려 감동을 받되, 이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잘 떠오르지 않을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정서중심의 영화만들기가 흐릴 수밖에 없는 객관적 판단의 영역이다. 물론 감독이 무려 7년의 시간을 새만금에서 살아오면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영역의 사람들을 두고서 어떻게든 그 사람들을 누구는 나쁘고, 누구만 착하고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치하받아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누었던 QnA에서 하는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고, 이제 이 영화를 갖고서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것이 단순히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런이러한 상황이니 우리와 함께 해달라는 손내밈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 시선과 방식은 충분히 순진하고, 순박하다. 글쎄 21세기의 다큐멘터리적 선동(?)은 조금은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가슴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감독은 아직도 가슴이 뜨겁고, 심지어 영악하지조차 못하다. 그의 뜨거운 가슴은 영화 안에서 내레이션의 활용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내레이션'은 화자를 등장시켜서 풀어가는 직접적 설명이다. 이 영화에서는 더더욱 내레이션이 없으면 앞뒤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선택한 내레이션인가? 분명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레이션을 썼을지도 모른다. 즉, 정서적 호소! 게다가 내레이션이란 감독의 입이면서, 이야기를 안내해주는 길잡이이다. 즉, 전지적인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영화 안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관객들은 화자가 제시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는 다시 요즘 시대의 관객들에게 (더더욱 이 다큐멘터리를 찾아올 관객들에게) 억지의 강요라는 측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화자의 목소리는 민중가요 가수인 연영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장 적합한 권위가 너무나 적합해서 그에 대한 어던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만한 여지가 없을 수 있다. 이는 촬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사실 언제나 관객의 시선과 동일시 할만한 장면들이다. 특별한 중개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에서 단독쇼트들로 인터뷰가 이루어지면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간극이 발생한다. 화면은 그러한 단독쇼트와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내레이션은 강력한 권위를 갖고서 영화적인 내용, 인물들과 관객들의 거리를 가까이 붙이려 한다. 다시 말해 어쩌면 내레이션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거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이 영화를 그러한 거리감을 두고서 관객들의 현장성을 높이는 위치에 카메라가 있다. 이 상태에서 내레이션을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점하려 할 수 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어디서 이들을 보아야 하는지 찾아가는 사유를 할 여지가 생긴다. 이 때 영화는 새롭게 관객을 보좌할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스로 사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로써 이 영화는 본래 하고자 하는 목표('연대 투쟁'이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한것일까?)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감독은 좀 더 이 상황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취재는 당연히 그들의 정서적 거리를 좁혔고, 당연히 더 진솔해졌으며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찾아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좀 더 차가운 이성을 발휘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영화를 잘 만들었냐 못 만들었냐의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목적에 좀 더 부합하냐 안하냐를 고려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 명의 관객으로써 영화를 본 나 역시 새만금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하고, 영화과 감독 역시 이 문제를 더욱 잘 전달하고 앞으로 해결 혹은 투쟁해가는 데 새로이 생각해볼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차가운 이성이 영악한 감독을 만들고, 더욱 강력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구조는 영악해(?) 보인다. 전반적인 양식에서 가장 잘 선택한 것이 전체적인 구조라고 보인다. 수미쌍관으로 한 사건을 배치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수분이 모자라서 갯벌밖으로 입을 벌려서 빗물을 받아먹으며 말라죽어가는 동죽의 운명이 그레질을 하다가 휩쓸려서 돌아가신 류기화씨의 운명까지 확장하면서 그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슬픔이 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를 떠나, 진정 영화적으로 그 논리와 내적 상징이 일관되게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에 타당한 설득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타당한 설득과 정서적 감동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은 과히 쉽지 않은 일이며, 연출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하겠다. 영악한 영화만들기가 중요하다거나,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기획적인 태도로 출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과 머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이 연출자의 숙명일 것이다.


3. 맺으며

분명, '새만금'이 이강길 감독을 찾아간 것이라 생각한다. 7년의 시간을 온전히 들여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그것에 대한 가치는 단순히 글 몇줄로 표현해서는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그를 더더욱 응원하는 마음에서 이제는 이강길 감독이 '새만금'을 새로이 찾아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지만, 아직 새만금은 일부의 수문을 통해서 해수조절이 조금씩 되고 있고,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주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생죽들이 나온다고 한다. 그토록 생명은 질긴 것이다. 그의 말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그 생죽들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해서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만금 개발 사업은 온전히 한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의 존폐가 달린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그 안에 담긴 개발 지상주의, 효용만을 생각하는 자본의 횡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새만금은 이 시대의 모든 병폐를 한데 모으고 있는 아이콘일 뿐이다. 그 안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문제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제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 시점이다. 영화는 정말 고맙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공하고 있다. 오죽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커서 판사같은거 꼭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겠는가? 또한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삼성비자금 문제에서 검찰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한다. 제발 잘 알아듣자.



PS. <광고>
이 영화는 11월 21일부터 시작하는 서울독립영화제 2007에서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해 있다. 꼭 보길 바라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 글이 광고의 효과를 가지기를 기대하면서........

이강길 감독 블로그
http://blog.jinbo.net/camerae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