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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8 [안녕? 허대짜 수짜님!] 노동영화는 그래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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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한 <안녕? 허대짜 수짜님!>을 보았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기획한 극영화이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해 왔던 노뉴단의 첫 장편 극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가질만 하다.
자 그렇다면... 영화는?

노-노 갈등의 문제를 제기하다.


90년대 초반의 <파업전야>를 기억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고, 공안정국의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 노동현장 및 각 대학에서의 상영을 진행했던 엄청난 영화다. 민주화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엔 여전히 사회적 분위기가 엄숙하기도 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열망들이 만나서 완성되었던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스탭들은 현재 충무로의 각지에 뻗어나가 영화를 하고 있고, 90년대의 중반 학번이었던 나조차 공대 지하의 어느 강의실에서 쉬쉬하면서 겨우 보았던 영화이다. 그 <파업전야>의 그림자가 21세기에 다시 드리워졌다.

<파업전야>와 <안녕? 허대짜 수짜님!>(이하 <허대수>)님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거리감만큼이나 너무나 다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동영화'라는 단어를 쓴다면 하나의 궤를 이룬다고 할 수 있지만, 두 편의 영화를 안으로 들어가서 본다면, 그것은 정말로 판이하게 다르다.
갈등의 소재가 '노-사'였던 <파업전야>, 그러나 IMF이후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친 대한민국은 새로운 신조어 '비정규직'이 등장하고 이것은 다시 '노-노'(정규직-비정규직)갈등을 만들어냈다. 이게 현재 21세기의 가장 극렬한 초상이다.
이는 분명히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에 신자유주의의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란 여전히 '서민' 옆에 붙어있는 단어이며, 그것은 결국 외적으로 양적팽창을 중심으로 내적인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섬찟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의외로 익숙하다. 현재 이미 현대자동차 노조는 신차조립라인의 투입을 앞두고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고, 거기서 주인공인 허대수는 정규직 노조 대의원으로써 사측과 협상의 주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200명 감축안을 20명의 비정규직 감축안으로 협상성과(?)를 이뤄낸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 노조는 투쟁을 계속하고 그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런 가운데 딸이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우연히 딸이 사귀는 남자가 비정규직 노조 투쟁에 앞장선 세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대해서 딸을 생각한답시고, 거짓말로 아픈 척을 하고 딸은 잠시 결혼얘기를 접는다. 게다가 세희는 계속 마음에 들지 않는 가운데 실제로 디스크 진단을 받는다. 한편, 처남의 실수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고, 결국 아버지를 철썩같이 따르고 존경했던 딸 연희는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집을 나간다. 그래도 세희는 대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딸을 찾아 세희를 쫗았던 대수는 옛날 직장동료였던 영조를 만난다. 98년 대투쟁때 영조를 외면했던 대수. 그리고 그의 재해 진단은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다. 망연하게 공장에 서있던 대수는 갑자기 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때 세희가 대수를 구하려다 같이 다친다. 둘은 어줍잖은 화해를 하게 되고, 세희는 좀 더 강한 투쟁을 해야한다고 마음먹지만, 대수는 절대 안된다고 세희를 말린다. 그리고 퇴원후 대수는 마음을 바꿔먹고 사측과 재협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다. 쉽진 않지만,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힘을 합쳐 사측과의 협상에 성공하고 세희, 연희는 결혼한다. 그리고 예쁜 딸을 얻는다.
영화는 손녀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

대충 내용은 이렇다. 익숙한 TV드라마 같은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사실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해결이 난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 새로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원인에 대한 고찰 부족.

영화가 진정으로 얘기하고자 한 지점은 어디일까?
정말로 노-노 갈등을 다루고자 한 것인가? 노-노 갈등이라면, 그 안에서 무엇을 문제로 제기하고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과정까지가 주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노-노 갈등의 출발점은 사실 IMF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다. 사실은 매우 고전적인 수법이라고 봐야한다. 중세 사회에서 지주와 농노(혹은 소작농)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름'이라는 특별한 지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노사관계에서 끼어있는 정규직인 셈이다. 이런 것을 '분리주의'라고 한다. 분리주의는 계급적이기도 하고, 민족적이기도 하다. 물론 계급적인 차원이 더욱 심각하고, 만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용자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불만들을 완충시키기 위해서 중간자를 두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들에게 돌아가야 할 저항은 중간에서 흡수되어버린다. 바로 허대수가 처한 상황처럼 ...
여기에 대항할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은 바로 노-노 갈등을 노-노 '연대'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방법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은 핵심이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을 그렇게 쉽게 던지더라도 그 현실 안으로 들어가면, 매우 첨예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파이 영화에서 가족들을 볼모로 잡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잡는 것도 그러한 이유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명분은 약자에게 있다. 그러나 실리는 강자에게 붙어야만 생긴다. 즉, 기본적으로 희생정신이 생기지 않고서는 거의 이러한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어내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허대수>는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가? 이 영화의 기획의 출발점이 바로 현대 자동차 정규직 사내방송에서 시작했다면, 더더욱 그 갈등의 시작점과 중간 과정, 그리고 그것이 어떤식으로 해결이 나는지에 대해서 더욱 주목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지점에서 허대수가 마음을 바꾸고, 재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비정규직노조와 정규직 노조가 텐트앞에 모여들어 웃으면서 끝이난다. 그리고 정작 해야할 이야기는 애니매이션 부분에서 해설로써 끝을 맺는다.  결국 영화는 그냥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연대해야 해!'라는 '선언'만 한 셈이고,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영화의 아버지격인 <파업전야>에서 조차 시나리오는 훨씬 뛰어나다. 단지 노-사문제에서만 하더라도, 내적 약점을 가진 자를 포섭하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갈등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노-노 간의 갈등은 단순히 친구(영조)에게 잘못했던 자신의 과오, 그리고 딸과의 관계, 세희의 인간성 등으로 손쉽게 그 갈등을 봉합해버리고 만다. 해결은 가족주의다. 사실 이 부분에 난 노동영화는 사실 퇴행했다고 느꼈다.
이는 단순히 감독이 현대 자동차 노조에 대해서 얼마만큼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회를 보는 틀에 있어서 너무 순진한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알면서도 뭔가 한계에 봉착한 나머지 외면을 해버린 것일까?
어쩌면,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플롯이 잘 섞이지 않아서 일까?

영화적 재미?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을 찾는다면, 바로 의사 캐릭터가 아닐까? 대수에게 디스크 진단을 내리는 의사야말로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다. 그에게는 어떠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재해진단을 자주 접한 의사로서의 본연의 건조함만 남아있다.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의사로써의 따뜻한 인간미 따위는 세세하게 가지지 않고, 오로지 사실의 진단을 내리는 데에만 집중한다. 영화는 사실 여기서 가장 영화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오히려 이쪽에서 좀 더 재미난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어떠했을까? 매일매일 아픈 사람을 상대하고, 똑같은 조끼를 입는 사람만 보는 의사는 당연하게도 삶이 별다를 것이 없을테고, 그런 가운데 새로이 나타나는 환자들에게 인간적인 교감을 하기는 커녕, 정확히 진단해주는 것만이어도 어디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산업재해 문제를 좀 더 깊이 가져가서 재해 진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를 가진 사람으로 끌어올렸다면, 노-사간의 문제에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기서 허대수는 자신이 돕지 못했던 영조와의 문제, 거기서 사실 노-노 갈등과 산업재해의 문제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예전에 친구를 돕지 못했던 자가, 지금 와서 자신이 같은 처지에 처하는 아이러니에 방점을 맞추었다면, 그리고 다른 비정규직인 세희 혹은 사측에서 나오는 어떤 인물들이 허대수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플롯이 있었다면 영화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에 영화적 드라마란 인물에 대해서 관객이 얼마나 밀착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감동과 정서가 통용될 것이고, 더더욱 원래 기획의도에 부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외에..
이 영화의 편집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유림은, 단편에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또 다른 감독이다. 그는 <크레인, 제4도크>, <낫시리아>, <새끼여우> 등의 자신의 단편에서 더 깊숙한 노동영화의 한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노동영화의 전적인 스타일 혹은 드라마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새로운 감수성을 담아내고 있는 가능성있는 감독이다. 그가 <허대수>의 편집을 맡았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더 뛰어넘는 노동영화를 기다리며..
세상의 결국 계급의 분화가 마치 아메바의 분열만큼이나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분화하는 세상속에서 각 계급의 입장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다면화할 것이다. 누구는 언제나 갑이고, 누구는 언제나 을일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최상과 최하는 큰 요동이 없겠지만, 중산층이 몰락하고, 중간 관리자들이 여러 문제에 부딪쳐서 갈려나가고 하는 와중에 중간계급의 몰락과정에서 그 자신들은 '갑'이 되고 싶어하지만 ,'을'일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개인적으로, 계급적으로 상황적으로 다양하게 펼쳐질 것임에 분명하다. 그럴수록 영화는 그리고 예술은 더욱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어서 그 면들을 아주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허대수>의 등장은 영화적인 아쉬움을 남긴다 하더라고, 현재의 시점에서 꼭 한번은 나왔어야 할 영화이며, 그것이 노동자 스스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좋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또 더 좋은 노동영화를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덧붙여..

김규항씨가 블로그에 올리던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계급01 : 우스운 건, 다들 ‘양극화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계급'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양극화라는 말은 계급적 격차가 커진다는 뜻이다.

계급02 : 세상은 공식적으로는 '국가(나 민족)'로, 실제론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계급03 : '계급의식'은 노인이 신문을 보기 위해 돋보기를 준비하듯,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계급04 : 대중들이 계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니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은, 사랑이 메마른 세상이니 사랑이라는 말을 폐기하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계급05 : 계급을 인정하든 부인하든 계급이라는 말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누구나 계급에 속해 있다.


계급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때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