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다. 첫째로, 우주에서 지구로 찾아든 침입자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의 자식들이 자꾸 위험에 빠지게 되고, 주인공들은 자신의 아이를 구하는 데 정신이 없다는 두 번째 지점, 마지막으로 이 침입자들이 주인공들의 영웅적 노력이 아니라, 지구라는 낯선(그들에게는 분명 낯설지..) 행성에서의 부적응(혹은 면역 부족)으로 망하게 된다는 커다란 틀들이 매우 비슷하다.

 

나는 여기서 영화들이 왜 이런 반복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영화들이 가족애를 강조하는 결말을 갖고 있다. 단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두 편이 너무나도 비슷한 구조와 성격을 갖고 있기에 집중 조명해보자는 것일 뿐!

 

내러티브를 단순화 해보자.

 

1.     전제로서의 사건 우주왕복선의 추락, 그리고 그에 묻어들어온 이상한 외계의 바이러스.

2.     주인공의 남편에게 바이러스 중독

3.     주인공의 환자 남편 역시 중독

4.     점차 커지는 위협

5.     주인공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놀러가는 전환 사건

6.     주인공이 알게 되는 주변의 사건들(바이러스의 발견, 남편의 변화)

7.     아들구하기 및 살아남기

8.     해결책의 발견

9.     그리고 대단원

 

위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러면 이것을 다시 갈등이라는 측면으로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의 가장 큰 갈등은 [외계의 바이러스 vs 지구인], 메인플롯은 지구인들이 죽도록 고생(?) 후에 살아남기쯤이 될 거다. 그리고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미분해보면,

 

1.     [주인공의 남편 vs 주인공 정신과 의사]

2.     [아이의 납치 vs 아이의 엄마 (주인공 정신과의사)]

3.     [남편으로부터 바이러스 감염 vs 잠들지 않아서 감염을 이겨야 하는 주인공]

 

식으로 다층화 한다. 가장 큰 외연에는 위에서 언급한 사회 대 사회의 갈등이 싸고 있으면서, 그 안으로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사회의 갈등 들이 다층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형태의 갈등 구조인데,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 2,3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2,3번 갈등이 이루어지고 작용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가족주의인 셈이다. 비록 남편이라는 상징적 권위가 배제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가부장(다니엘 크레이그)이 등장하면서 대치되고, 그 근원으로는 아들을 구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모성애가 가장 큰 핵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결국 이 가족이 붕괴되지 않고, 다시 안정적인 엄마,아버지,아이라는 축으로 가족을 이루면서 이 영화의 질서는 모두 회복한다. 아이의 뇌염 면역은 주인공에 의해서 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대 사회적 갈등인 지구인의 살아남기에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은연중에 가족이라는 집단으로 회기함으로써 우리가 살아남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또 하나의 보수반동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키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이렇게 강한 선언을 하는 것은 나의 쓸데없는 버릇이라고 생각하고!!!! 갖다 버리라고 하셔도 상관없고!!!

어찌되었거나, 이 영화가 끌고 가는 주인공 니콜 키드만의 가장 큰 갈등은 아들 올리버를 지키고 싶다는 지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바깥의 갈등과 무관하다. 혹시라도 올리버가 수두를 앓고, 뇌염에 관한 면역이 없었다면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긴 개연성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러한 내러티브적인 개연성보다도 아버지를 새롭게 대치하는 다니엘 크레이그는 결국엔 대안이 아닌 대치일 뿐이라는 지점에서 결국 활성화 에너지가 모자라서 다시 메타 스테이블한 상태로 내려앉은 영화의 운명 및 결론이 슬퍼보일 뿐이다.

 

한편, <우주전쟁>의 경우, 딸은 구하려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이 눈부시다. (희한하게도 니콜 키드만은 아들을 구하고, 탐 크루즈는 딸을 구하는데 거의 목숨을 다 바치면서 뛰어다닌다. 그런데도 더욱 아이러니컬한 (영화밖) 사실은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을 영위할 당시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가족이었던 두 배우가 아이도 없는 채로 찢어져서 각각 가족의 온정이 넘치는 영화를 찍었으니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신가? 거참 장난도 심하시지) 개인적으로 <우주전쟁>을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실망감을 가졌다. 실망감을 갖고서 내가 왜 실망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1차적인 답은 탐 크루즈의 이미지였다. 그는 출연한 전작들에서 꽤나 열심히 뛰어다니고 능력이 뻗는 요원이었기 때문이고, 나는 <우주전쟁>을 보면서, 탐 크루즈가 화성에서 온 트라이포드를 부수고, 외계인을 처단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영화안에서 단 한번 수류탄으로 트라이포드를 부수는 장면을 봤을 때는 정말로 영화의 남은 1/3이 우리의 영웅탐 크루즈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기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전쟁>에서 빛나는 장면은 탐 크루즈가 차를 갖고서 도망치려고 할 때이다. 굴러가는 유일한 차를 본 군중들은 그것을 뺏으려고 달려들고, 그는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한 장면은 <인베이젼>에서 (이미 변신한) 외계 지구인들이 니콜과 아들이 도망치려는 차 위로 달겨드는 장면과 겹친다. 이것은 두 영화에서 공통된 공포이고, 각각에서 괜찮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벗어나서 현대 사회를 생각해보면, 점차 가족의 단위는 축소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고, 가족간의 혈연 역시 그 끈끈함이 묽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전 지구적 위기를 가족주의를 통해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러한 영화들이 갖고 있는 성찰들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이 강조하는 퇴행적(!) 이데올로기인 가족주의를 다시 불러들어야 하는 것인가?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사실은 그렇게 얼굴에 무언가 뱉어지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외계인이다.

모두(?) 다 알다시피, <인베이젼>은 이번이 4번째로 만들어지는 영화다. 잭 피니라는 소설가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4명의 자식이 만들어진 셈. 그러나 이는 돈 시겔의 1956 <신체강탈자의 침입>, 필립 카우프만의 1978년작 <신체강탈자의 침입>, 아벨 페라라의 1993 <바디 스내쳐즈>(국내 출시명 : 바디 에일리언)에서 현재 올리버 히르비겔의 <인베이젼>까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거꾸로 보았다. 시대의 역순을 따라가면서 이번 추석 프로젝트(?)를 실행한 셈. 괜찮은 느낌의 순서를 나열해 본다면, 첫번째로 1978년 필립 카우프만 작, 2번째로 1993년 아벨 페라라 작, 1956년작과 2007년작은 비슷한 느낌이라고 혼자서 나열해본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재미와 관심에 관한 것이며, 특별한 기준에 의거해서 순위를 매긴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4작품 모두가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어설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화란 보는 자의 취향과 마음에 달린 법이니까! 딴지를 건다면 내 맘대로 !’을 날려주리라. 푸하하하..

 

여러 군데의 리뷰(최소한 네이버 검색에 의해서 나오는 홍성진의 영화해설이나 어떤 개인들의 영화평)들을 살펴보면 뻔히 나오는 말들이 바로 시대와 엮어내는 지점들이다. 이런 분석은 결국엔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라면 누구나 찾아낼 수 있으므로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다. 그런 건 내가 써도 내 것이 아니니깐. 정 궁금하면 알아서 찾아볼 것. 억지로 세로축을 사다리 삼듯 이어야 하는 부분에서만 다시 조금씩 언급하는 수준일 것임을 미리 알리는 바이다.

 

우선적으로 살필 영화는 당연히도 <인베이젼>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처음으로 뒤에서 들린 말은 완전 무서, 완전 무서. 허리가 다 아파라는 어떤 여성의 말이었다. 그 문장 속의 느낌은 몇해 전 내가 <큐브> (지금은 없어진) 동숭 씨네마텍에서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그러한 촉각과 동일한 것이었다. 생생히 기억하건데, 난 그 때 <큐브>를 보고 나오면서 허리에 굉장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허리가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뻣뻣함을 느꼈던 가장 무서운 영화였고, 그 기억을 그대로 소환하는 말이었다.

한편, 그 사람의 말은 나의 기억을 떠올렸으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나에겐 그 때 그 느낌을 고스란히 재현시키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여기저기 검색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올리버 히르비겔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올리버 히르비겔이 촬영을 완료하고, 편집한 버전에 대해서 제작자(조엘 실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감독(제임스 맥테이그)을 고용하여 많은 군중씬들을 재촬영했고, 다시 편집되었다. Imdb의 데이터로는 제임스 멕테이그는 ‘not credited’이다.

그래서 일까? 올리버 히르비겔의 편집본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랬더라면, 이전의 3편의 작품들과 비해서 어떤 평가를 들었을까? 막연히 상상해 보지만, 그것은 전혀 알 수가 없으니만약에 존재만 한다면, 제임스 본을 고용해서라도 그 편집본을 훔쳐오게끔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랬다면, 좀 더 이 시대상과 맞물려서 영화는 더욱 강한 인상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간단히 전작들을 얘기하자면, 돈 시겔의 작품은 당시의 매카시즘을 암시하는 바가 있고, 필립 카우프만의 작품은 70년 후반의 급격한 사회의 보수화를 꼬집는 면이 있다. 또 다른 리메이크작 아벨 페라라의 작품은 90년대 초 미국의 첫번째 이라크 침공과 관련한 미국사회의 보수성을 짚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샛길, 무엇보다도 아벨 페라라의 작품에서는 그 변화하는 주체로서,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군인들은 외계의 식물에 의해 변화했지만, 내 생각에는 군인들은 굳이 그렇게 변화하지 않았어도, 똑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경직성들을 잘 표현하는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폭격에 의해 부서지는 군대의 모습은 이상한 쾌감을 전해주고, 뭔가 아이러니컬함을 남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베이젼>은 충분히 앞의 작품들의 성향을 이으면서, 또 한편으로 독자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2007년 현재,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괴뢰정부를 세워놓은 상태이다. 물론 그렇게 확대 해석 하지 않더라도, 현재 미국(한국도 다름 없지만) 사회에서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을 충분히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사회는 이것을 가족주의의 온정(?)으로 치유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인베이젼>을 위시한 신체 강탈자시리즈가 갖고 있는 강점이자, 독자성은 한 문장의 대사로 대표된다.

 

“My husband is NOT my husband.”

 

익숙했던 사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감정과 표정 등이 탈색되어서 나타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위의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원래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일 뿐이고, 어떤 다른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져오는 두려움은 무엇보다도 크다. 그것은 어떤 괴수보다도 무섭고, 에일리언 보다도 무섭다. 저 대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네 편의 영화를 통틀어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 역시 그러한 ‘NOT’의 지점이다. 우리 사회안에서도 그러한 폐쇄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거꾸로 반대로 그것을 작용시키고 있다. 예전에 박노자씨는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자신이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미 귀화한 지 수 년이 지난 그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 시장의 아줌마는 박노자씨를 한국인이 NOT(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모 언론의 기사는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몇몇 출연자들의 국적인 한국임을, 다시 말해 그들이 외국인이 NOT임을 걸고 넘어지면서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다들 좀비가 되어버린다. 한국에서 외국인은 외계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 영화가 1차적으로 깔고 있는 메시지는 이렇게 억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우 굉장한 상업적 완성도로 잘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시지 따위를 지우려고 편집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히르비겔 감독의 편집본이 궁금하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정녕 그러한 외계인들과 같다. 획일화하는 우익집단이 판치고, 스포츠 민족주의가 판치고,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신체강탈자시리즈에서 보이는 미국의 모습과 다를 것은 크게 없을 것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볼 때 별 씁쓸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몰락>을 만든 독일 감독 올리버 히르비겔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이고, 그의 완성본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제작자 조엘 실버는 다른 감독을 데려다가 재촬영, 재편집을 통해서 완성한 새로운 영화가 가족주의라는 또 다른 우파적 생각으로 영화안의 비극 혹은 재난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그럼 어디쯤에 서야하는 걸까 의문이 생기지만, 그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78년판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 답이지 않을까? 결국엔 그 도날드 서덜랜드 처럼 되는 게 아닐까?

 

ps. 그래서 요즘 괴상한 소리과 그 제스쳐를 연습중이다. ^^ 그건 바로 이거다

OoO

궁금하면, 78년작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보시길.. 이걸 알고 나면 열라 무서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