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박노자의 만감일기>

밑줄 쫙 2008. 8. 4. 11:59 Posted by Ru
제목 : < 박노자의 만감일기>
박노자의 만감일기 상세보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간 박노자의 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통찰의 기록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인간' 박노자의 사적이고 사회적인 고백을 전해주는 책이다.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궁금증과 생각을 풀어낸 인터넷 블로그 일기들을 모아 엮었다. 너무 민감하거나 너무 개인적이라서 그동안 신문, 학술지 등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박노자의 새로운
글쓴이 : 박노자
부제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출판사 : 인물과 사상사
출판일 : 2008. 1




2부 : 우리를 넘어
제목 : 제 손으로 제 무덤파기, 과잉성 혹은 예방성 폭력
쓴 날 : 2006. 5. 31


그제 운 좋게 1988년에 개봉한 명작 영화 <칠수와 만수>를 봤다. 나는 영화 비평가도 아니고 영화를 보는 전문적인 눈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일개 관람자로서 바라본 1980년대 말의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들은 최근에 나온 영화들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 등)보다 어쩌면 대사회적 효과는 물론 작품성(주인공 성격의 다면적 묘사 등)도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는 의문이지만.
영화 <칠수와 만수>의 줄거리는 흥미롭다.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칠수와 만수가 술을 마신뒤 한탄하던 장면이다. 고층 건물 맨 꼭대기에서 술김에 세상에 대한 한탄을 쏟아놓던 칠수와 만수는 '농성자'로 오인받아 순식간에 '진압'의 대상이 된다. 굳이 '진압'하지 않아도 몇 시간 후에 조용히 내려갈 '생사람'을 놓고 권력자들이 하등의 필요성이 없는 '생쇼'를 벌이는 바람에 '블랙 코미디'가 연출된다. 당국자들은 만수 부친이 양심수라는 걸 파악하고는 확성기를 통해 자극적인 방법으로 그 이야기를 꺼낸다. 결국 과격한 행동을 할 것 같지 않던 만수가 밑으로 뛰어내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어떤 명시적인 '전복적' 의도를 갖지 않은 사람이 '과잉성의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폭도'로 둔갑되어 '진압', 즉 위로부터의 폭력 행사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공권력 남용이라는 의미에서 '과잉성 폭력'이라 명명해도 되고, 권력의 의도가 체제 반대의 의사 표현 그 자체를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기에 '예방성 폭력'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는 분명 전두환 말기이지만, '민주 인권 태평성세'인 지금도 권력의 이와 같은 속성은 바뀐 것 같지 않다. 강정구 교수 재판만 해도 그렇다. "6.25는 통일 전쟁, 우리는 신식민지!"라는 말을 듣고 성난 군중들이 죽창을 들고 청와대와 미군 기지를 공격할 것 같은가? 이와 같은 류의 주장들이 무수히 나왔던 1980년대 조차 한국은 명실상부한 혁명의 문턱에 닿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의 대북 포섭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강정구 교수와 그 주장이 현 권력체계에 대해 하등의 위협이 될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권력자들은 '전복적 행동'의 그림자만 보여도 벌써 파리에 대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사상 재판이라는 '생쇼'가 열리고 강 교수는 직장에서 마녀사냥의 대상자가 되었다. 기껏 해봐야 수백 명이 될까 말까한 농민과 학생, 시민운동가들을 '박살내려고' 약 1만 5,000명의 군경병력과 철거용역을 파견했떤 '대추리 대첩'은 어떤가. '안보' 관련의 분야라면 함부로 덤빌 생각도 말라는 어떤 협박성 (혹은 경고성)의 과잉 폭력 행사로 보인다. 정상적인 공권력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세계 12위의 통상대국을 통치하는 이들이 왜 이리도 겁에 잘 질리는 걸까?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상황에서 저들의 지배에 대한 민중적 동의 기반이 점차 파괴돼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 이러는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권위주의 시대 권력자들에겐 아비투스를 성찰, 교정할 만한 능력이 결여된 것인가? 북한과 '친북세력'들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으면 비정상적으로 비대화된 육군, 안보기관에 대한 대수술이 불가피해질 것이라는 점을 감지하여 본인들도 믿지 않는 '북한 위협론'을 계속 붙드는 것인가? 정치적으로 봤을 때 북한은 이미 하나의 (하위) '파트너'로 취급 받고 있음에도 국가보안법이 건재하고 간헐적인 '사상 재판'들이 터지는 것으로 봐서는 '공안 관료들의 할 일 만들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의외로(?) 많은가 보다. 희비극이다.
1960년 부정선거시의 발포, 1980년 광주 등의 사례에서 보듯 '과잉성 폭력'이 그들 스스로의 권력명분을 파괴시켰던 과거를 그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숙도로는, 대추리에서 시민운동가와 학생들을 거의 '재미 삼아' 쓰러뜨려 집중 구타하는 경찰의 모습은 이미 '과거의 흉물'이상으로 보이지 않을터이니 말이다.

----------------------
이상은 글의 전문(全文)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이모부의 친구가 극장과 관계된 누구시라는 덕분에 가끔씩 강남의 동아극장에 갔다. 그리고 형과 같이 미성년자 관람불가(정확치는 않음)였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우리형은 중학교1학년이었지. 어찌되었건 굉장히 충격적인 영화였는데, 사실 충격보다는 내겐 그 이상한 아이러니가 강하게 남았다. 내내 웃으면서도 씁쓸했던 기억은 아무래도 당시에 TV만 켜면 나오던 대학생 형, 누나들의 시위장면들이 생각나서였을까.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인 칠수와 만수는 대학생도 아니고 단지 칠쟁이(이자 장이)들일 뿐이었다. '칠수'. 정감가는 이름. '만수', 어쩜 이런 필부의 이름을.... ^^
박노자가 얘기하는 과잉성의 폭력은 또 다른 정권이 바뀌면서 훨씬 더 강해지고 있다. 앞으로도 정권의 속성은 계속 이런 것일까? 어제 본 <존 레논 컨피덴셜>의 몇몇 장면과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드는 어떤 강한 마음속의 인상들을, 몇몇 용어와 논리적인 단어들로 머릿속까지 전달시켜주는 일!
게다가 이러한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들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필수적이지 않을까.
단순히 영화를 놓고서 내외적으로 보고 분석하는 것 다음으로 이제 당신들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하지 않는가? 그것이 꼭 주먹쥔 손이거나, 구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떠한 '인식'이 그냥 시작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모두(?) 다 알다시피, <인베이젼>은 이번이 4번째로 만들어지는 영화다. 잭 피니라는 소설가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4명의 자식이 만들어진 셈. 그러나 이는 돈 시겔의 1956 <신체강탈자의 침입>, 필립 카우프만의 1978년작 <신체강탈자의 침입>, 아벨 페라라의 1993 <바디 스내쳐즈>(국내 출시명 : 바디 에일리언)에서 현재 올리버 히르비겔의 <인베이젼>까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거꾸로 보았다. 시대의 역순을 따라가면서 이번 추석 프로젝트(?)를 실행한 셈. 괜찮은 느낌의 순서를 나열해 본다면, 첫번째로 1978년 필립 카우프만 작, 2번째로 1993년 아벨 페라라 작, 1956년작과 2007년작은 비슷한 느낌이라고 혼자서 나열해본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재미와 관심에 관한 것이며, 특별한 기준에 의거해서 순위를 매긴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4작품 모두가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어설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화란 보는 자의 취향과 마음에 달린 법이니까! 딴지를 건다면 내 맘대로 !’을 날려주리라. 푸하하하..

 

여러 군데의 리뷰(최소한 네이버 검색에 의해서 나오는 홍성진의 영화해설이나 어떤 개인들의 영화평)들을 살펴보면 뻔히 나오는 말들이 바로 시대와 엮어내는 지점들이다. 이런 분석은 결국엔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라면 누구나 찾아낼 수 있으므로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다. 그런 건 내가 써도 내 것이 아니니깐. 정 궁금하면 알아서 찾아볼 것. 억지로 세로축을 사다리 삼듯 이어야 하는 부분에서만 다시 조금씩 언급하는 수준일 것임을 미리 알리는 바이다.

 

우선적으로 살필 영화는 당연히도 <인베이젼>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처음으로 뒤에서 들린 말은 완전 무서, 완전 무서. 허리가 다 아파라는 어떤 여성의 말이었다. 그 문장 속의 느낌은 몇해 전 내가 <큐브> (지금은 없어진) 동숭 씨네마텍에서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그러한 촉각과 동일한 것이었다. 생생히 기억하건데, 난 그 때 <큐브>를 보고 나오면서 허리에 굉장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허리가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뻣뻣함을 느꼈던 가장 무서운 영화였고, 그 기억을 그대로 소환하는 말이었다.

한편, 그 사람의 말은 나의 기억을 떠올렸으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나에겐 그 때 그 느낌을 고스란히 재현시키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여기저기 검색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올리버 히르비겔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올리버 히르비겔이 촬영을 완료하고, 편집한 버전에 대해서 제작자(조엘 실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감독(제임스 맥테이그)을 고용하여 많은 군중씬들을 재촬영했고, 다시 편집되었다. Imdb의 데이터로는 제임스 멕테이그는 ‘not credited’이다.

그래서 일까? 올리버 히르비겔의 편집본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랬더라면, 이전의 3편의 작품들과 비해서 어떤 평가를 들었을까? 막연히 상상해 보지만, 그것은 전혀 알 수가 없으니만약에 존재만 한다면, 제임스 본을 고용해서라도 그 편집본을 훔쳐오게끔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랬다면, 좀 더 이 시대상과 맞물려서 영화는 더욱 강한 인상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간단히 전작들을 얘기하자면, 돈 시겔의 작품은 당시의 매카시즘을 암시하는 바가 있고, 필립 카우프만의 작품은 70년 후반의 급격한 사회의 보수화를 꼬집는 면이 있다. 또 다른 리메이크작 아벨 페라라의 작품은 90년대 초 미국의 첫번째 이라크 침공과 관련한 미국사회의 보수성을 짚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샛길, 무엇보다도 아벨 페라라의 작품에서는 그 변화하는 주체로서,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군인들은 외계의 식물에 의해 변화했지만, 내 생각에는 군인들은 굳이 그렇게 변화하지 않았어도, 똑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경직성들을 잘 표현하는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폭격에 의해 부서지는 군대의 모습은 이상한 쾌감을 전해주고, 뭔가 아이러니컬함을 남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베이젼>은 충분히 앞의 작품들의 성향을 이으면서, 또 한편으로 독자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2007년 현재,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괴뢰정부를 세워놓은 상태이다. 물론 그렇게 확대 해석 하지 않더라도, 현재 미국(한국도 다름 없지만) 사회에서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을 충분히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사회는 이것을 가족주의의 온정(?)으로 치유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인베이젼>을 위시한 신체 강탈자시리즈가 갖고 있는 강점이자, 독자성은 한 문장의 대사로 대표된다.

 

“My husband is NOT my husband.”

 

익숙했던 사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감정과 표정 등이 탈색되어서 나타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위의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원래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일 뿐이고, 어떤 다른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져오는 두려움은 무엇보다도 크다. 그것은 어떤 괴수보다도 무섭고, 에일리언 보다도 무섭다. 저 대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네 편의 영화를 통틀어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 역시 그러한 ‘NOT’의 지점이다. 우리 사회안에서도 그러한 폐쇄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거꾸로 반대로 그것을 작용시키고 있다. 예전에 박노자씨는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자신이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미 귀화한 지 수 년이 지난 그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 시장의 아줌마는 박노자씨를 한국인이 NOT(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모 언론의 기사는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몇몇 출연자들의 국적인 한국임을, 다시 말해 그들이 외국인이 NOT임을 걸고 넘어지면서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다들 좀비가 되어버린다. 한국에서 외국인은 외계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 영화가 1차적으로 깔고 있는 메시지는 이렇게 억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우 굉장한 상업적 완성도로 잘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시지 따위를 지우려고 편집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히르비겔 감독의 편집본이 궁금하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정녕 그러한 외계인들과 같다. 획일화하는 우익집단이 판치고, 스포츠 민족주의가 판치고,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신체강탈자시리즈에서 보이는 미국의 모습과 다를 것은 크게 없을 것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볼 때 별 씁쓸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몰락>을 만든 독일 감독 올리버 히르비겔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이고, 그의 완성본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제작자 조엘 실버는 다른 감독을 데려다가 재촬영, 재편집을 통해서 완성한 새로운 영화가 가족주의라는 또 다른 우파적 생각으로 영화안의 비극 혹은 재난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그럼 어디쯤에 서야하는 걸까 의문이 생기지만, 그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78년판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 답이지 않을까? 결국엔 그 도날드 서덜랜드 처럼 되는 게 아닐까?

 

ps. 그래서 요즘 괴상한 소리과 그 제스쳐를 연습중이다. ^^ 그건 바로 이거다

OoO

궁금하면, 78년작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보시길.. 이걸 알고 나면 열라 무서울 거다.